서리서리/서울역사문학기행

북촌 기행 1-3 인촌 김성수 선생 옛집, 만해당, 민형기 고택

달처럼 2010. 12. 12. 20:02

 

북촌의 한옥들 중 비교적 큰 규모로 남아있는 인촌 선생 옛집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민족운동가·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이다. 본관은 울산이다.

일본에 유학,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교육운동에 투신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실력양성론을 주장하며

민족자본육성 활동과 재정난을 겪은 중앙고등보통학교보성전문학교 등을 인수, 운영하며 교육활동을 하였고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동아일보를 경영하였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동아일보의 폐간 문제로 수시로 조선총독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가 운영하던 중앙고등보통학교보성전문학교의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그는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당했다.

1935년부터는 공직에서 은퇴한 후, 국내 고미술품의 밀반출을 막기 위해 고미술품 수집에 힘을 기울였고,

태평양 전쟁기간 중 창씨개명과 협력 강요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한 뒤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위원을 지냈다.

그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고,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고,

민주국민당 창당과 이승만의 장기집권에 반대하여 호헌동지회를 추진, 주관하였다.

경성방직·보성전문학교(뒷날의 고려대학교)의 설립자이며 동아일보 창설자의 한 사람이다.

자는 판석(判錫), 아호는 인촌(仁村). 조선시대의 유학자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전라북도 고창 출생으로, 부안 줄포에서 자랐으므로 부안을 고향으로 보기도 한다.

선대의 고향은 전라남도 장성이므로 장성 출신으로도 본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대문 옆 표지판에는 이 집에서 2.8독립선언을 준비하고 3.1운동 준비 단계에 독립 투사들의 밀회 장소였다고 적혀 있다.

 

 

안타깝게도 이 집은 일반인에게 개방하지 않고 있어 문 밖에서 인촌 선생의 생애를 회고했다.

 

 

인촌 선생 옛집 뜰안을 보는 방법은 언덕 위에 있는 대동세무고교(옛 대동상고)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다.

대동세무고교 교문을 들어서서 운동장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는 일행들

 

 

역광이라 희미하긴 하지만 제법 웅장한 한옥과 조경수로 가득찬 마당이 보인다.

 

 

북촌 계동 43번지에 있는 만해당은 한용운 선생이 머물던 집이다.

1918년 창간한 불교 잡지 '유심'을 발간한 곳이며,

최린이 이 집으로 한용운을 찾아 와 불교계가 3.1운동에 참여하게 만든 곳이다.

 

 

우리의 방문이 예약된 시간에 직전 행사인 '대패시연'이 끝나지 않아

안타깝게도 안에 들어서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시 '님의 침묵'은 3.1 운동으로 잠시 비치던 희망이 사라지고 일제의 압제가 되살아나던 

1926년에 내설악 백담사에 머물며 쓴 것이다.

 

<님>만님이아니라 긔룬것은 다님이다

衆生이釋迦의님이라면哲學은 칸트의님이다

薔薇花의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님은 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아니라 나를사랑하나니라

戀愛가 自由라면 님도自由일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조은 自由에 알뜰한拘束을 밧지안너냐

너에게도 님이잇너냐 잇다면 님이아니라 너의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벌판에서 도러가는길을일코 헤매는 어린羊이 긔루어서 이
詩를쓴다 <군말>

 

한용운 시인이 '군말'에서 밝혔듯이 그의 임은 어느 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승려였으니 부처님일 수도 있고, 구도자라는 점에서 진리일 수도 있고, 독립운동가였으니 조국이 그의 임이기도 하다.

시 '님의 침묵'은 국권 상실과 회복을 노래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불교적 인식도 깔려 있다.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는 그 자체로 역설이면서 제목 <님의 침묵>에 대한 부정이다.

국권의 상실을 노래함에 있어 그는 국가의 영원한 죽음으로 생각하여 슬픔과 절망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침묵은 침묵이 아니라는 역설을 통해

국가는 영원히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식만 바꾸었을 뿐이라는 역설적인 논리로

국권의 죽음을 부정하고 적극적인 사랑과 실천을 통해 국권상실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형기 고택

조선 말기 명성황후 친족인 재무관 민형기의 집이다.

'민 재무관댁' 혹은 '계동마님댁'으로 불리던 이 집은 2002년부터 '북촌문화센터'로 사용하고 있다.

북촌을 홍보하는 공간이자 전통문화 강좌를 개설하여 수강생을 교육한다.

현재 진행 중인 강좌로는

글 (한글서예, 한문서예),

그림 (민화, 전통섬유그림),

소리 (거문고, 가야금병창),

솜씨 (전통자수, 전통보자기, 전통 서각, 전통천연염색, 한지공예인형, 전통매듭공예,칠보),

맛 (전통다례, 다도 체험, 전통주 빚기)

그리고 엄마와 함께 하는 박물관, 미술관 교육 등이 있다.

 


홍보전시관에는 한옥의 구조와 북촌의 역사에 대한 전시물이 있다.

 

 

 

겨울이라 덧문을 내린 대청마루 끝에 둘러 앉아 명성황후의 친정인 민씨 가문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흥미롭다.

 

 

 

 

전통을 전하는 사랑방 북촌문화센터

북촌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수준 높은 전통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문화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

지난 2002년 10월 개관한 북촌문화센터!
본래 조선말기 세도가였던 '민 재무관댁'이었던 이 곳은 '계동마님댁'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전체적으로 원래 안채,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한옥 개보수 기준 조례에 의거해 최대한 한옥 원형을 보존하고 복원하는데 중점을 두어 개보수 되었다.

뒷행랑채였던 홍보 전시관은 북촌의 역사와 가치를 홍보하는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북촌 보존의 중요성을 알리는 영상물을 상영하고

북촌의 곳곳에 산재해 있는 문화재와 전통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북촌 투어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사랑앞 마루 주민회의실    

안채마당안채사진캡션

 

홍보전시관 옆에 위치한 안채는 한옥문화과 사무실과 한옥 리모델링 관련해 정보 제공 및 상담을 하는 수선 상담실을 두었다.

 그리고 전통문화관련 행사를 진행할 회의실과 주민들이 쉬어갈 수 있는 사랑방도 멋스럽게 마련되었다.
안채 뒤로 마련된 아담한 정자는 원래 사당이었던 것을 휴식공간으로 제공해

단아한 한옥의 정취를 느끼며 차 한 잔 나누는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정자를 돌아 안쪽으로 자리한 안행랑채는 전통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문화센터를 마련했다.

 

북촌문화센터 홈페이지 : http://bukchon.seoul.go.kr/exp/center1_1.j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