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이 겨울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조병화, '추억')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우연히 접한 영화 광고 포스터의 문구에 눈길이 머무른다. 그로부터 며칠 후 조선일보에 어느 소설가의 영화 후기가 실렸다. '첫사랑은 대개 실패의 기록들이다. '건축학 개론'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게 한 건,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바라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스무 살에 같은 수업을 듣는 다른 과 선배를 좋아해서 고백했는데, 거절당했다.' 이 문장에서 사라진 것은 '죽도록' 고민했다는 것이고 '한마디'로 거절당했다는 것읻. 아마도 이때, 내 마음속에는 거절에 대한 공포와 트라우마가 자라나기 시작한 것 같다. 이후의 모든 연애의 시작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로 아프게 맞추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고. 그것은 마치 사랑 노래의 후렴구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됐다.' 학생들에게 훗날 배우자를 선택할 때 꼭 기억하라면서 수없이 되뇌인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내 개똥철학의 기저에도 그런 것이 깔려 있었던가. 픽 웃음이 터지며 이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때 마침 한 친구의 제안이 있어 영화 번개 모임을 추진했다. 비교적 한산한 영화관에서 친구들과 영화를 보는 일은 무척 재미가 있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간간이 추임새를 넣기도 하고, 소리 내어 웃기도 하다가, 가슴 저리는 대목에서는 별로 부끄러워 하지 않고 눈물을 닦아도 된다. 그러는 동안에 스트레스는 날아가고 즐거움은 배가 된다. 영화는 서연이 병든 부친을 위해 제주도에 있는 옛집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검은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배우 한가인의 실루엣이 서늘하게 아름답다. 고치다가 중단하고 버려 둔 건축 잔해 사이로 구석구석 누비는 그녀의 검은 하이힐에 흠집날까 봐 눈동자를 크게 하여 화면을 주목한다. 서연은 대학 시절에 그녀를 짝사랑하던 승민의 건축사무실을 찾아가 집을 설계해 달라고 의뢰한다. 승민은 그녀를 못 알아보는 척 시치미를 떼어 보지만, 15년 전 그에게 이 다음에 건축가가 되어 자기가 살 집을 지어 달라던 그녀를 위해 자기 이름을 내건 생애 첫 작품을 짓게 된다. 음대 신입생 서연은 방송반 선배의 권유로 '건축학 개론' 수업을 듣는다. 건축학과 승민은 그 수업에서 처음 만난 음대생 서연에게 반한다. 같은 동네에 사는 승민과 서연은 같은 버스를 타게 되고 함께 숙제를 하는 과정에서 차츰 가까워진다. 순진한 승민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툴러 망설이기만 하다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다. 종강하는 날, 서연에게 줄 선물로 주택 모형을 만들어 그녀의 집 앞에서 기다리던 승민은 종강 파티에서 술에 취한 서연이 선배의 차에서 내려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상처를 받은 그는 주택 모형을 서연의 집 모퉁이 쓰레기 더미에 내버리고 발길을 돌린다. 첫눈이 오는 날 서연은 전에 약속한 대로 둘만의 이야기가 깃든 정릉의 텅빈 고택으로 찾아가 승민을 기다리지만 그는 오지 않고, 서연은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CD와 CD 플레이어를 마루 끝에 놓고 대문을 나선다. 그 CD는 예전에 승민에게 주었던 것인데 승민이 플레이어가 없어 듣지 못한다고 되돌려 준 것이었다. 건축을 하며 둘은 자주 만나게 된다. 승민에게 선물할 넥타이를 준비해 간 날, 그에게 약혼자가 있고 곧 결혼해서 외국으로 떠날 계획임을 알게 된다. 승민도 서연이 이미 이혼하고 혼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건축주와 설계자로서 표면적으로는 자주 의견이 충돌하지만 결국 약혼자의 불안한 염려 속에 건축 공기가 늦추어지는 것을 무릅쓰고 서연의 의견을 수용하여 설계를 변경하고 제주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진다. 바닷가를 향한 넓은 창이 액자처럼 길게 펼쳐진 1층 거실, 서연의 방이 있는 2층 발코니의 잔디 마당, 그 가운데 나지막한 붉은 기와 지붕. 그 잔디에 승민으로 분한 배우 엄태웅이 엎드려 잠들어 있고, 맨발로 사뿐 사뿐 거닐던 서연이 그 옆에 비스듬히 눕는다. 카메라가 줌 아웃하면서 제주의 푸른 바다와 해변에 솟은 검은 용암, 지붕의 잔디와 붉은 기와가 만들어 낸 원근 구도와 색조가 멋진 조화를 이룬다. 그 대목에서 같이 영화를 보던 친구가 한 마디한다. "와, 멋지다. 우리 제주도에 여행 가자. 저 집이 있는 마을에 꼭 가 보자." 건물이 완공되고 짐을 옮겨주던 승민은 한 박스 속에서 그 옛날 서연의 집 모퉁이에 버렸던 건축 모형을 발견한다. 한편 승민은 서연이 주인 없는 고택에 놓고 나왔던 그 CD를 틀고 음악이 잔잔히 흐른다. 드디어 승민을 태운 비행기는 떠나고, 서연은 제주집에서 피아노 레슨을 하며 아버지와 지낸다. 벽에는 서연이 어릴 때 키를 재며 금을 그어 표시해 놓은 옛집의 담벼락이 고스란히 살아 있고, 아버지가 마당에 시멘트로 수돗가 바닥을 바르던 날, 마르지 않은 바닥에 남긴 어린 서연의 발자국이 있던 자리는 금붕어가 헤엄치는 연못으로 살려 놓은 집에서. '건축학 개론'에서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조마조마한 과정을 거쳐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건축'을 통해 무너진 담을 복구하듯 한 시절의 기억을 복구해 놓았다. 그들의 젊은 날은 잊혀진 존재가 되어 무의미하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소중한 의미로 깊이 각인되어 살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제 상처는 치유되었다. 각자 어느 방향으로 걸어간다 해도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해 할 말이 있으리라. 봄이 오는 길목에서 영화 속의 그들처럼 지난날을 가만히 내려 놓고 남은 생에서 만날 벅찬 환희를 꿈꾸고 싶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 김용택, '그대 생의 솔숲에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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