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
천양희
접어둔 마음을
책장처럼 펼친다
머리 끝에는 못다 읽은
책 한권이 매달리고
마음은 또
짧은 문장밖에 쓰지 못하네
이렇게 몸이 끌고 가는 시간 뒤로
느슨한 산문인 채
밤이 가고 있네
다음날은
아직 일러 오지 않는 때
내 속 어딘가에
소리없이 활짝 핀 열꽃 같은
말들, 言路들
오! 육체는 슬퍼라. 나는 지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었노라던 말라르메의 그 말이,
비가 오고 있다. 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던 김수영의 그 말이,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던 랭보의 그 말이,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소라던 브로드스키의 그 말이,
낮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떻게 알았겠느냐던 니체의 그 말이,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던 발레리의 그말이 ......
나는 본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내려앉은 말의 꽃이파리들
내 귀는 듣는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말의 발자욱 소리들
나를 끌고 가는
밑줄친 문장들.
천양희, <마음의 수수밭>,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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