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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 / 천양희

달처럼 2012. 11. 30. 22:32

 

 

 

그 말이 나를 살게 하고 

                                      

                                          천양희

 

 

접어둔 마음을

책장처럼 펼친다

머리 끝에는 못다 읽은

책 한권이 매달리고

마음은 또

짧은 문장밖에 쓰지 못하네

이렇게 몸이 끌고 가는 시간 뒤로

느슨한 산문인 채

밤이 가고 있네

다음날은

아직 일러 오지 않는 때

내 속 어딘가에

소리없이 활짝 핀 열꽃 같은

말들, 言路들



오! 육체는 슬퍼라. 나는 지상의 모든 책들을 다 읽었노라던 말라르메의 그 말이,

비가 오고 있다. 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던 김수영의 그 말이,

 

흠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던 랭보의 그 말이,

 

누가 나를 인간에 포함시켰소라던 브로드스키의 그 말이,

 

의 빛이 밤의 어둠의 깊이를 어떻게 알았겠느냐던 니체의 그 말이,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던 발레리의 그말이 ......



나는 본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내려앉은 말의 꽃이파리들

내 귀는 듣는다

나에게로 세상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말의 발자욱 소리들

나를 끌고 가는

밑줄친 문장들.

 

 

 

 

천양희, <마음의 수수밭>,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