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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문학기행 1. 고려궁터(강화유수부 동헌, 외규장각, 종각, 이방청)

달처럼 2011. 2. 13. 16:02

 

 

고려궁터에 오르는 길, 승평문

 

  

 

 

 

 

 

 

고려궁터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강화유수부 동헌인 명위헌(明威軒)이 있다.

강화는 고려시대에는 현재 인구의 10배 정도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수도 방위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유수부가 되었다.

 

유수 

전기에는 고려의 서울인 개성부만 유수부로 설치했다. 1438년(세종 20) 개경유후사(開京留後使)를 개성부로 개칭하고 장관은 개성유후에서 개성유수로 바뀌었다. 이때는 외관직이 아닌 경관직으로 대우했으며 정2품직인 판한성부사보다 1급 아래인 종2품관으로 했다. 조선 후기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도방위의 중요성이 증가하자 수도방위의 요충인 강화·광주(廣州)가 유수부로 승격했다. 18세기에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이장하고 수원을 육성하면서 유수부로 승격시켜 사유수부제가 성립되었다. 이때는 유수부의 군사적 기능이 중시되어 개성에는 관리영(管理營), 강화에는 진무영(鎭撫營), 광주에는 수어청(守禦廳), 수원에는 장용영(壯勇營)이 설치되었는데, 유수는 민사행정은 물론 관내의 영(營)과 청(廳)의 지휘권까지 장악했다. 정원은 2원(員)이나 1명은 경기관찰사가 겸직하고 유수관마다 전임관 1원이 있었다. 광주와 수원유수는 정2품, 나머지는 종2품직이었다. 임기는 전기에는 1년, 후기에는 2년이었다. 후기의 유수는 군사적 위치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부내(府內)에 축적된 많은 병선·병기·미포와 병기제조와 관련된 막대한 예산을 관장하는 직책이었으므로 정권을 담당한 당파와 척족에게 매우 중요한 관직이었다. 따라서 후기의 유수는 당파·척족의 천거를 받은 인물이 제수되면서 이들의 세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daum 백과사전에서 인용)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에 의해 약탈당한 조선 왕실 서고

눈이 덮여 더욱 눈이 시린 외규장각

 

 

 

 

 

 

 

 

 

 

 

 

 

 

 

 

 

 

 

 

 

 강화 유수부 이방청(江華 留守府 吏房廳)       

          1654년(효종 5) 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1783년(정조 7)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수리하였다.

          강화유수부의  행정 실무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구조는 ' ㄷ ' 자형 단층기와집으로 방이 8칸, 마루가 12칸, 부엌이 1칸으로 모두 21칸이다.

 

 

 

 

39년간 고려왕이 머물던 고려궁지

강화읍 관청리 743-1 일원 

 

이곳은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재위: 1213 ∼ 1259)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든 고려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로 천도하여 1234년에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1270년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 궁궐과 성은 무너졌다.

1637년 병자호란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으며, 그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 궁전건물(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 및 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은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 이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 고려궁지는 지금으로부터 760여년전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임금님이 거쳐하시던 궁궐로 이곳에서 약 39년간(1232~1270) 몽고에 항쟁하였습니다.

강화로 천도해온 고종은 약 2년에 걸쳐 연경궁을 본궁으로 궁궐과 관아를 지어 건물의 명칭을 전부 개성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궁궐은 몽고와의 화친에 따라 허물었으며 현재 궁지 내에는 강화지역을 다스렸던 유수부가 있습니다. 또한 고려궁지 내에는 외규장각이 있었으며 병인양요때 프랑스군들이 이곳에 있던 많은 서적들과 은궤, 지도 등을 약탈해 갔습니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고서들도 이곳에서 약탈해간 것입니다. 이곳은 고려가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재위: 1213 ∼ 1259)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든 고려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로 천도하여 1234년에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1270년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한 뒤 궁궐과 성은 무너졌다.

1637년 병자호란시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된 사실이 있으며, 그후 고려 궁터에는 조선 궁전건물(장령전, 행궁, 만령전, 봉선전, 외규장각, 척천정, 세심재 등) 및 유수부 건물들이 있었으나 1866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의해 건물 등은 소실되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있다. 이곳은 1977년 보수 정화되어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국난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국민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곳 고려궁지는 지금으로부터 760여년전 몽고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왕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당시 임금님이 거쳐하시던 궁궐로 이곳에서 약 39년간(1232~1270) 몽고에 항쟁하였습니다.

강화로 천도해온 고종은 약 2년에 걸쳐 연경궁을 본궁으로 궁궐과 관아를 지어 건물의 명칭을 전부 개성의 궁궐과 똑같이 하고 궁궐뒷산도 송악산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궁궐은 몽고와의 화친에 따라 허물었으며 현재 궁지 내에는 강화지역을 다스렸던 유수부가 있습니다. 또한 고려궁지 내에는 외규장각이 있었으며 병인양요때 프랑스군들이 이곳에 있던 많은 서적들과 은궤, 지도 등을 약탈해 갔습니다.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는 고서들도 이곳에서 약탈해간 것입니다. 고려궁지에는 오래된 역사와 함께 그 자리를 지켜온 고목들이 많으며 아름다운 꽃나무들로 봄이면 더욱 아름다운 정원이 됩니다.

 

<기타 정보> 

입장료    : 청소년, 군인 : 개인 - 600 ㅣ 단체 - 500 어 른 : 개인 - 900 ㅣ 단체 - 700

개방시간 : 하절기(09:00∼18:00), 동절기(09:00∼17:00)

휴관일    : 연중무휴
주요시설 : 명위헌, 이방청, 종각
찾아오시는길 :  강화대교→강화읍 고려당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00m→고려궁지

 

(강화군청 홈페이지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