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문학기행 5. 고구려 기상의 부활을 꿈꾸며 쓴 대서사시 동명왕편
고려시대의 문장가이며 시인 이었던 이규보(1168∼1241)선생의 묘소가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진강산 기슭에 있다. 선생은 고려 명종 19년(1191) 진사시에 합격한 뒤 당시 최고 집권자인 최충헌에게 기용된 문인의 한 사람으로 뒤에 관직이 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렀다. 이규보는 시문에 능하였으며, 특히 민족의 영웅시인 동명왕편을 지어 고구려인의 큰 포부와 활동을 읊어 민족의식을 선양하였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인한 국난극복을 위한 민족의 노력으로 8만대장경 조판의 국가적 사업이 시작될 때에 불교 호국의 신앙과 민족 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을 지었다.
이규보는 몽고의 침략으로 고통 받던 고려의 백성에게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불어 넣고자 고구려 시조 주몽의 일대기를 다룬 대서사시 '동명왕편'을 쓴다. 동명왕편은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실려 전한다.
고려의 근본이 되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부친은 天帝인 해부루의 아들 해모수이며, 모친은 물의 신 하백의 딸인 유화부인으로 곡식의 신이다. 주몽이 天孫이라는 대목은 우리 민족의 선민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다.
주몽이 알로 태어난 이야기나 금와 왕의 명으로 버려졌을 때 마굿간의 말과 산의 짐승들이 보호한 이야기, 어렸을 때 파리가 귀찮게 한다고 하자 어머니는 화살을 만들어 주고, 아기 주몽이 화살을 쏘는 족족 파리를 맞혔다는 대목을 읽다보면 저절로 신이 난다. 부여에서는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후에 부여 금와왕의 태자의 시기로 떠날 때, 그 때를 위해 미리 준마를 준비시키고 보리 종자를 보내준 유화 부인의 지략이나 쫓기는 몸이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무사히 건너는 대목에서는 신이 우리 민족을 버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고귀한 혈통, 비정상적인 출생, 비범한 능력, 버림받음, 구출자를 만남, 성인이 되어 위기 극복, 최후의 승리 등을 골격으로 한 줄거리는 후대 영웅서사 구조의 전형이 되기도 한다.
(전략) 왕이 천제 아들의 비(妃)인 것을 알고 별궁(別宮)에 두었더니, 그 여자의 품 안에 해가 비치자 이어 임신하여 신작(神雀) 4년 계해년 여름 4월에 주몽(朱蒙)을 낳았는데, 우는 소리가 매우 크고 골상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처음 낳을 때에 좌편 겨드랑이로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닫 되[五升]들이만 하였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이 새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 사람을 시켜 마구간에 두었더니 여러 말들이 밟지 않고, 깊은 산에 버렸더니 모든 짐승이 호위하고, 구름 끼고 음침한 날에도 알 위에 항상 햇빛이 있었다. 왕이 알을 도로 가져다가 어미에게 보내어 기르게 하였더니, 알이 마침내 갈라져서 한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낳은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언어가 모두 정확하였다. 어머니에게, "파리들이 눈을 빨아서 잘 수가 없으니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오." 하였다. 그 어머니가 댓가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스스로 물레 위의 파리를 쏘는데 화살을 쏘는 족족 맞혔다. 부여(扶餘)에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들 한다. 나이가 많아지자 재능이 다 갖추어졌다. 금와(金蛙)왕은 아들 일곱이 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며 사냥하였다. 왕의 아들과 따르는 사람 40여 인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주몽은 사슴을 퍽 많이 쏘아 잡았다. 왕자가 시기하여 주몽을 붙잡아 나무에 묶어 매고 사슴을 빼앗았는데, 주몽이 나무를 뽑아 버리고 갔다. 태자(太子) 대소(帶素)가 왕에게, "주몽이란 자는 신통하고 용맹한 장사여서 눈초리가 비상하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고 하였다. 왕이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그 뜻을 시험하였다. 주몽이 마음으로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나는 천제의 손자인데 남을 위하여 말을 기르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남쪽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려 하나 어머니가 계셔서 마음대로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 어머니가, "이것은 내가 밤낮으로 고심하던 일이다. 내가 들으니 장사가 먼 길을 가려면 반드시 준마가 있어야 한다. 내가 말을 고를 수 있다." 하고, 드디어 목마장으로 가서 긴 채찍으로 어지럽게 때리니 여러 말이 모두 놀라 달아나는데 한 마리 붉은 말이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었다. 주몽은 이 말이 준마임을 알고 가만히 혀 밑에 바늘을 꽂아 놓았다. 그 말은 혀가 아파서 물과 풀을 먹지 못하여 심히 야위었다. 왕이 목마장을 순시하며 여러 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서 야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이 말을 얻고 나서 그 바늘을 뽑고 도로 먹였다 한다. 건너려 하나 배는 없고 쫓는 군사가 곧 이를 것을 두려워 하여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개연히 탄식하기를,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황천(皇天)과 후토(后土)는 나 고자(孤子)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주소서." 하고, 말을 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가 나와 다리를 이루어 주몽이 건넜는데 한참 뒤에 쫓는 군사가 이르렀다. 쫓는 군사가 하수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가 이룬 다리가 곧 허물어져 이미 다리에 오른 자는 모두 빠져 죽었다. 주몽이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는 어미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하고 오곡 종자를 싸주어 보내었다. 주몽이 살아서 이별하는 마음이 애절하여 보리 종자를 잊어버리고 왔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쉬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이, "아마도 신모(神母)께서 보리 종자를 보내신 것이리라." 하고, 활을 쏘아 한 화살에 모두 떨어뜨려 목구멍을 벌려 보리 종자를 얻고 나서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고 한다. (후략)
성인(聖人)이 태어날 때는 기이한 행적이 따른다. 중국의 여러 성인이 그러했듯 우리 동명왕도 그렇다는 것을 밝힌 글이다.
「동명왕편」은 5언(五言) 282구(句)로 된 영웅 서사시이다. 이규보가 26세 때(1193년) 고구려의 건국 신화인 주몽 신화를 노래한 것으로 체제를 보면 앞에 서문이 있고 본문 속에는 부분부분 『구삼국사(舊三國史)』에 수록되어 있다는「동명왕 본기(本記)」의 신화를 옮겨 놓고 있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중요하다. 이 작품은 주몽의 영웅적 행적과 위업을 찬미한 작품인 만큼 주몽 신화의 내용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그 갈등의 폭을 넓히고 주몽의 영웅적 포부·의지·지혜 등을 더욱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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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선생 묘소
고려시대 개인의 무덤이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 예이다.
이규보 선생의 묘역은 사당인 백운정사 바로 좌측에 정비되어 있는데, 이중 활개에 용미를 길게 갖고 있는 원형 봉분으로 되어 있다. 봉분은 호석을 두르고 있으며, 봉분 앞에는 혼유석과 계체석을 놓았다. 계체석을 받침대로 앞에는 고석을 받쳐 놓은 상석이 있다. 상석 앞에는 새로 만든 향로석이 2개 있다. 향로석 좌우에는 형태만 남아 있는 문인석이 있고, 약간 앞 좌우에는 양석이 있다. 향로석 정면에는 장명등이, 장명등 좌우에는 민무늬의 8각 기둥형태의 망주석이 있다. 봉분 좌우와 중계 좌우에는 동자주가 각각 1개씩 있다. 상계 봉분 좌측에는 조선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묘갈이 있다. 민무늬 대석에 월두형 비신의 형태로 비에는 ‘고려이상국하음백문순공휘규보지묘배정경부인진양진씨부(高麗李相國河陰伯文順公諱奎報之墓配貞敬夫人晉壤晋氏쯊)’라 새겨져 있다. 이 뒷면에는 ‘○○○계축 9월(癸丑 9月)’이라 적혀 있다. 중계 상석 좌측에 옛날 것으로 보이는 묘표가 있는데 민무늬 대석에 월두형 비신으로 되어 있다. 비의 전면에는 “고려이상국문순공하음백규보지묘(高麗李相國文順公河陰伯奎報之墓)”라 새겨져 있다. 이것은 개국 527년 무오 4월에 세워진 것이다.
묘역 입구에는 1983년 1월 15일에 세운 “백운이규보선생문학비(白雲李奎報先生文學碑)”가 있다. 이 비는 김동욱(金東旭)이 찬하고, 이필용(李弼龍)이 썼다.
문학비 좌측에는 여주이씨대종회에서 1991년 5월에 세운 묘역정비기념비가 있다. 신도비는 묘역정비기념비 왼쪽에 있는데, 이규보가 죽은 지 699년 후인 1939년 기묘년 3월에 세워진 것이다. 비문은 이범세(李範世)가 찬하고 김교덕(金敎悳)이 서하고, 후손 이병하(李秉夏)가 전서한 것이다. 전후면에 전서로 “고려이평장사백운이선생시문순공신도비명(高麗李平章事白雲李先生諡文順公神道碑銘)”이라 하였다. 비제는 “고려금자광록대부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하음백이공신도비명병서(高麗金紫光祿大夫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河陰伯李公神道碑銘幷序)”라 하였다.
이 묘소는 1967년 국가의 지원을 받아 후손들이 묘역을 정화하고 제실을 복원하였다.
출처 : 강화군청 홈페이지
四可齋
묘소 오른쪽 아래에는 사가재가 있다.
4가지 옳은 것을 가지고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밭이 있으니 먹을 수 있고, 뽕나무가 있으니 입을 수 있으며, 우물이 있으니 마실 수 있고, 나무가 있으니 땔 수 있다.
선생의 삶의 철학이 담긴 당호를 바라보며, 현대인의 끝을 모르는 욕망이 얼마나 덧없는지 생각한다.
2011년 3월에 개봉 예정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의 포스터이다.
임권택 감독의 101번째 작품이 되는 이 영화의 포스터에는
이규보의 시 '영정중월'이 들어 있어 깊이를 더한다.
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 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어
幷汲一甁中(병급일병중)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 절에 돌아와 비로소 깨달았으리.
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 병을 기울이면 달도 따라 비게 되는 것을
스님이 우물에 물을 길러 갔다가 우물 속에 비친 달빛이 너무 아름다워 병 속에 함께 길었다.
그러나 절에 도착하여 병의 물을 기울이자 달도 함께 없어졌다.
손에 넣은 듯하면 빠져 달아나는 인간 탐욕의 무모함을 깨닫는 순간이다.
각 구의 끝글자를 연결해 보면 색중각공이라는 불교의 진리가 드러난다.
강화 문학 기행 : 2011.01. 넷째 주
답사 후기 정리 : 2011.01.24. 문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