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건축 답사 - 후암동
안창모 교수가 설명하는 새건축사협회의 도시건축 답사는
9월 21일
후암동을 찾아갔다.
후암동은 일제 강점기 일인들의 거주지로 개발된 동네다.
후암동의 성남 교회. 성의 남쪽이란 뜻이다.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의 천리교 교당이 있던 자리이다.
일본이 물러간 후, 일본인이 쓰던 종교시설 부지는 종교단체에 불하되었다.
일인들이 문화주택으로 지어서 살던 가옥 형태
일본식 축대 쌓기의 모습. 견치쌓기라 한다.
견치란 송곳니랑 뜻인데 축대의 돌을 송곳니처럼 뽀족하게 쌓았다.
기와는 시대별로 다른 문양이 새겨져 있다.
창문틀이 돌출되어 있는 일본식 가옥의 흔적. 원래 목조 구조인 것을 후에 시멘트로 마감.
후암동 재래 시장의 채소가게
좁은 골목에 담벼락에 붙여 가지런히 널린 빨래
집을 덧대어 지으면서 교묘하게 자리잡은 좁은 계단
몇채 남은 일본식 문화주택
나무 판자로 만든 상부 벽체
후암동 도로변 내과의원도 일식 문화주택 형태가 남아있다.
후암동성당은 1960년대 유명 건축가 나상진의 설계로 지어졌다.
노출콘크리트 기법을 사용한 솜씨있는 건물이다.
후암동 골목에 살고 있는 기린 두 마리
일제 시대에 지어진 당시 조선은행 사택들
지금도 개인 주택과 사무실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움이 묻어나는 삼광초등학교
삼광초등학교는 일제 강점기의 삼판 소학교에서 개명된 이름.
소학교는 일인들이 다니던 학교. 보통학교는 조선인이 다니던 학교.
그 후 내선일체 정책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삼광초등학교 앞의 문방구 풍경.
삼광초등학교 앞 일본식 주택
현관과 창틀 위에 좁은 캐노피가 있는 일본식 가옥 구조
갈월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상업건물.
작년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벽에 몰타르 뿜칠은 일본 총독부가 전쟁에 대비하여 목재 대신 불연재로 마감하도록 건축법을 바꾼 후의 모습이다.
후암동에서 오각형 모습의 지붕만 보면 이제 일본식 가옥인지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후암동은 1930년대에 일본인들의 고급 주택지로 부상된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주로 남대문 밖 남서쪽 주거지에 모여살았다.
도심에 근접되어 있으며 언덕 위를 선호하는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는 지역이었다.
언덕 위에 집 짓는 문화는 일본 도쿄가 저지대에 위치해 침수 위험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한다.
일인 주택 지역은 후암동-흑석동-상도동-영등포로 뻗어 나갔다.
한인들은 동대문 밖 동북쪽 지역으로 뻗어 나갔다.
신설동, 보문동 평지에 소형 한옥이 많은 것은 그 때의 흔적이다.
후암동에 남아있는 일식 주택은 당시 문화주택으로 불리웠고
서구식 주거형태를 일본 주택과 접합한 구조였다.
이런 문화주택은 신교육을 받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한인들도 선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