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보원사 터
1천여명의 승려가 기거한 대사찰로 '보원사' 의 터가 발굴중이다.
백제의 고로(古路)를 지키며 잠든 폐사지 ‘보원사터’
빈 절터만큼 황량한 게 또 있을까. 그곳이 절터인지도 모르게 휑한 바람만이 머무는 보원사터. 고풍저수지를 지나 구불구불 오솔길을 오르다보면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을 지나쳐 만날 수 있는 이곳. 그 너른 터에 절이 있었을까 싶게 잔존하는 것들은 황량한 모습으로만 다가온다.
하얀 눈이 밤새내려 그 너른 터를 온통 하얗게 덮어버려도, 가을바람이 쓸고 지나간 감나무에 까치떼가 내려앉아 고즈넉함을 온통 깨버려도, 여름 한줄기 소나기에 쓸쓸한 기운이 잠시 씻겨 내려가도, 그 너른 터 곳곳에서 이름 모를 꽃들과 풀들이 지천으로 깔려도, 보원사터는 오늘도 그 묵직한 역사를 묻고 묵묵히 흐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때를 달리해 찾아도, 그 너른 터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줄기 시냇물은 그 깊은 침묵속에 잠긴 역사의 세월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 참 무심하게도 흐른다.
보원사터 가장 안쪽 산자락 밑에 자리한 법인국사 보승탑비의 내용에 의하면 승려 1천명이 기거하고, 절터 내에 1백여 개소의 크고 작은 사찰 건물터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절이 세워져 있을 그 당시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대 사찰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지금은 일부 몇 개의 흔적만 빼고 모두 소실돼 보원사의 창건연대와 소멸시기 또한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출토된 유물로 옛 이야기를 더듬어 백제시대 창건된 사찰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 보원사터가 세간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9년 국보 제 84호인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이 발견되면서 부터이다.
백제가 475년에 한강변 수도지역을 고구려에 빼앗기고 공주로 천도한 이후 중국과의 새 교역로를 태안반도의 항구로 정하였는데, 그 길목에 태안마애삼존불,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 예산 화전리 사면석불, 보원사지 금동여래입상 등 많은 불교유적이 남아있다. 그래서 이 길목을 ‘백제의 고로’라 명하여 많은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보원사지는 이 백제의 고로중 서산에서 덕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어, 사신, 승려 등의 기도처, 수도처이자, 항해시 쉼터로 조성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보원사터에서는 1969년에 금당지 남쪽 건물터에서 백제시대(6세기중엽) 금동불 입상이 출토되어 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19○○○ 철조여래좌불상, 1968년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어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중이다.
이외에도, 현 보원사터에는 보물 제102호인 석조, 보물 제103호인 당간지주, 보물 제 104호인 5층석탑, 보물 제105호인 법인국사보승탑, 보물 제 106호인 법인국사보승탑비가 현존하고 있다.
폐허가 된 절터에서 이렇게 많은 문화재적 보물이 출토되는 것도 매우 드문 일. 당간지주에서부터 석○○○지, 5층탑에서부터 부도비까지 남아 있으니 옛 절터에서 이만큼 종합선물 세트로 과거 찬란했던 불교문화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것도 쉽지 않다.
보원사터 사적지정 면적은 31,123평이다. 잠시의 시간으로 머무르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광대할 정도. 지금은 문화유적 발굴중이라 일부 문화재를 제외하고는 바닥 전부가 포장되어 발굴될 시간만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사진설명: 보원사 입구에서 이곳을 지키는 당간지주
보 물 제 103호인 당간지주
용현휴양림을 오르는 길에 오른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보원사터에 다다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당간지주이다. 입구에 당당한 풍채로 세워져 보원사터를 지키고 서 있다.
당간지주는 불교사찰의 당간을 세우기 위한 지지대로, 한쌍의 돌로 된 구조물을 일컫는다. 주로 석재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폐사지에서 많이 발견된다. 현존하는 당간지주중 유명한 것은 공주시 갑사에 있는 철당간(보물 제256호), 충북 청주시 남문로 용두사지 철당간(국보제41호)등이다.
보원사터에 있는 당간지주는 화강석으로 만든 두 개의 돌기둥을 92cm의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보게 세웠다. 지금은 당간없이 지주만 남아있다. 두 개의 지주 높이는 각각 420cm이고, 폭은 37cm이다. 지주의 형태는 4면에 넓은 홈을 파서 테두리를 도드라지게 하고, 지주의 상단부 바깥 끝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 거대한 크기에도 부드럽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당간도 없이 우뚝 선 모습은 폐사지를 지킬지언정 풍기는 분위기는 당당하고도 견고하다.
이 당간지주 앞에 서 보면 저 멀리 수십미터 밖에 있는 보원사지 5층 석탑이 정가운데로 들어와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5층탑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면서도 어찌보면 과거의 신기루처럼 아련해 보이기도 하는 느낌이다.
현존하는 석조중 가장 큰 보원사터 석조
보원사터 입구에서 오른쪽가에 있는 석조는 현재 남아있는 석조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조의 크기는 전체길이 348cm (안쪽길이 309cm), 폭 175cm(안폭 137cm) 높이 65cm로 많은 물을 저장할 수 있다. 과거 보원사터가 얼마나 큰 사찰이고, 얼마나 많은 승려가 살았는지를 대변하는 문화유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장방형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하나가 통돌이다. 내부를 네모지게 파내어 바닥에는 직경 약 8cm정도의 원형 배수구를 만들어 물을 빼낼 수 있도록 했다. 석조 안쪽과 위쪽만 정밀하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친 다듬자국만이 남아있으며, 조각의 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웅장한 느낌을 자아낸다.
어느해 겨울 석조의 물을 빼지 않은 채 그 안에 담긴 물이 얼어서 석조가 두동강 난 적이 있다. 자세히 보면 동강난 석조를 이어붙인 흔적이 있는데다가 표면을 깨끗이 닦아서 옛 고유의 맛이 덜해졌다.
사진설명: 법인국사 보승탑
사진설명: 법인국사 보승탑비
법인국사보승탑과 법인국사 보승탑비
당간지주와 석조를 지나 5층석탑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작은 냇물을 하나 건너야 한다. 강당천으로 불리우며 보원사터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유유히 흘러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 입구를 지나는 이 작은 냇물에는 커다란 돌들이 징검다리를 이루고 있다.
성큼 성큼 한발 씩 떼며 돌다리를 건너노라면, 마치 지금은 사라진 미지의 과거세계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는 묘한 기분이 든다. 기나긴 여름 오랜 추위에 얼어붙은 얼음밑으로 흐르는 저 냇물은 이 보원사터가 생겨나기전부터 흘러 지금에까지 흐르며, 물처럼 흘러가는 역사를 보듬어 투영해준다.
다리를 건너 오르막후 맞닿는 것은 보원사터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5층석탑이다. 보원사터의 중심부에 우뚝 서서 장대한 기품을 풍기는 이 탑은 보원사터를 가장 대표하는 문화유적이기도 하다.
그 뒤로 산아래에 포근히 안기듯 서있는 것은 법인국사보승탑과 법인국사보승비 이다. 법인국사는 신라말과 고려초에 활약한 유명한 승려로, 광종 19년(968)에 왕사로, 974년에는 국사가 되어 그 이듬해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978년에 왕이 ‘법인’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보승이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내렸다.
팔각원당식의 부도인 법인국사 보승탑비는 기단부가 땅속에 묻혔던 것을 1962년도에 조사하여 기단부의 구조가 밝혀졌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를 모셔놓은 탑을 일컫는 것으로, 절의 한 켠에 세워두는데, 법인국사 탄문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이 부도는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위에 8각형의 기단부와 탑신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상륜부를 세운 형식의 부도이다. 이 부도 또한 석탑 못지않게 아름답다.
밑돌에는 각 면마다 움푹하게 생긴 안상(眼象)안에 사자 한 마리씩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고, 윗돌에는 구름속을 거니는 용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이밖에도 모서리마다 꽃이 새겨져 있어 보는 곳곳 정교한 아름다움이 배어나온다.
법인국사보승비는 법인국사가 입적한 3년후인 고려 경종(978년) 3년에 조성된 것으로, 탄문스님의 생애와 왕실과 관련된 내용 등 총 5,500여자의 비문을 음각한 탑비이다.
비신높이 2.3m, 폭 1,15m로 비받침인 귀부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나와 있다. 비머리는 네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보원사터는 20년을 두고 발굴한다고 한다. 그 광대한 면적과 그 깊은 역사만큼이나 발굴의 손길또한 단순하지는 못할 터. 그 기나긴 역사를 땅속에 품은 채 오가는 이들에게 비밀이야기를 속삭이는 보원사터.
그 너른 터에 혼자 서 가만히 귀기울이면 그 옛날, 보원사 경내를 휘감아 돌던 청아한 목탁소리와 함께 스님들의 염불외는 소리가 아련히 깃든다. 그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길 바라는지, 지금까지 그래왔듯 깊이 잠들어 그 묵은 향기를 더 깊게 하고 싶은 것인지, 광활한 보원사터는 황량한 바람으로만 시끄럽지, 내내 고요하기만 하다.` <서산교차로 배영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