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문학의 산실을 찾아

대구 문학기행 1 - 이상화 시인의 고택과 시비

달처럼 2010. 3. 26. 22:44

시는 절박한 생각을 언어로 함축하여 표현한 문학이다. 시인이 사회적인 상황에 민감한 것은 이런 이유다.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상황’을 경험한다면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저항적인 문인들은 자유가 차단된 곳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걸고 펜을 들 수 있었다.

중국의 고전인 ‘시경’ 서문에는 ‘마음속에 움직이는 바가 곧 뜻이 되고, 이 뜻이 가슴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절실한 언어로 다듬어지면 곧 시가 된다’고 했다.
결국 절박하고 절실한 속마음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통해 세상에 나오면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이 절박한 상황은 단지 자신의 상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합리와 부자유한 모순을 비판하면서 저항하는 것이 문인의 참다운 모습이다. 특히 조국이 위기에 처하거나 식민지 상황이라면 문인들은 개인적인 정서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식민 상황의 억울하고 부자유한 삶의 모습을 표현하며 독립의지에 불을 붙였다.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작가들은 자유가 차단되고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고난을 당했다. 일제하의 저항 작품들은 작가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소산이다. 그들의 삶과 문학이 감동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상화 시인은 식민지 시절 민족의 울분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 가슴을 저미게 하는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으면, 자유의 소중함을 새삼 확인한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시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

 

이 시가 발표될 무렵은 이미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한지도 15년이 지났을 때였다. 3,1운동으로 독립 될 듯 보였던 광복도 불가능해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차디찬 겨울이 지나고 빼앗긴 조국의 땅에는 봄이 오고 있었다. 그 산야에 아름다운 꽃이 피는 상상을 하니 기쁨보다는 슬픈 마음이 가슴을 울렁이게 하였으리라. 빼앗긴 나라에 봄이 오는 것은 슬프고 잔인한 것이라고 여겼던 이상화 시인은 논둑길을 걸었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은 즉자적인 농부에게는 기쁨이지만 일제의 수탈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대자적인 농부에게는 슬픔이다. 조국 전체가 남의 땅인데 지엽적인 땅의 현상들은 의미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개벽 70호(1926년 6월호)에 게재된 이 시는1920년대의 대표적인 저항시다. 나는 이 시의 저항의 의미론적인 시어에 감동을 받곤 한다.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은 곧 지평선의 표현이다. 이 지평선은 조국해방이 시작되는 땅이다. 이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작가는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는 신념의 언어를 토해낸다.

그러나 조국해방을 향해 그는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조국 해방의 이상과 현실의 벽 사이에서 속울음을 울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건강한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3,1운동은 2만 여명의 동포들이 일제의 군경에 의해 살상되었으며, 약 5만 여명이 체포 구금된 세계사적인 대사건이다.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실패한 운동이지만 민족독립투쟁의 불씨를 살려주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우리의 동포들은 실망하고 탄식했다. 죽음과 투옥을 작심하고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조국의 현실은 더욱 암담했다. 백조, 폐허, 장미촌의 동인 문인들의 작품들은 이런 조국 동포의 상실감을 반영한 것이다.

낭만주의와 퇴폐주의적 경향의 시들이 오래갈 수는 없다. 식민지 조국에 사회주의적인 사상들이 희망의 바람으로 확산된다. 특히 1917년 소련혁명은 제3세계 민중들과 식민지 치하의 민중들에게 희망의 등불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상화 시인은 한 때 이런 사회주의혁명과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상화 고택 입구

 

이상화의 아버지 이시우, 어머니는 김해 김씨는 4형제를 낳았다. 이상화는 둘째였으며, 큰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였다.
다섯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대구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이상화는 1918년에 서울 중앙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수료한다.

그는 대구에서 백기만 등과 함께 3,1운동을 일으켰다. 검거를 피해 서울에 있는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한다. 1921년 고향 친구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난 후에 ‘백조’ 동인에 가입한다.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와 함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이상화의 작품활동은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을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문단 등단 후 초기에는 '백조' 동인과 함께 문학활동을 하면서 '나의 침실로'와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쓴다. ‘나의 침실로’는 ‘백조’3호에 실렸는데 그의 초기 대표작이다. 1925년 박영희 김기진과 더불어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를 창립한다. 이 무렵 그는 저항시의 백미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다.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 동경에서 공부하던 중에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동포들이 살상당하는 참상을 목격하고 귀국한다. 대구 교남 학교(현 대륜 중고교)의 교사가 된다.
1925년 카프에 가입하고 사회주의적이 민족운동을 전환한다.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좀 더 강한 문학행위를 필요로 느꼈을 것이다. 이런 이유가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한 계기가 되어 주었다.

1925년 무렵 사회적인 책무를 느끼면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제목의 저항시로 식민지하의 민족현실을 노래한다. 그는 백조동인의 나약하고 낭만적인 시인에서 향토적인 저항시인으로 거듭난다. "금강송가", "역천", "이별" 등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의열단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일제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주목되어 여러 차례 가택수색을 당한다. 집안이 온전할 리 없었으리라.

저항시를 쓰면서 독립 운동 혐의로 몇 차례 감옥생활을 한다. 그는 살아생전 시집을 출간하지 못한 시인이다. 다만 백기만이 엮은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16편의 시가 수록되었을 뿐이다.

 

 

고택 마당 한가운데 있는 이상화 시인이 심은 석류나무

 

1943년에 43세에 위암으로 최근에 복원된 그의 고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계산성당 정문 우측으로 난 긴 담을 따라 걸어 가다가 끝나는 곳 왼쪽 기와집이 이상화고택이다.

이상화 고택은 시인 이상화(1901~43)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4년을 살았던 집이다. 1943년 이상화 시인이 사망 후에 이 고택은 한동안 요정이 되어야 했다. 주변이 재개발되어 철거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대구시민들은 이 집을 살리는 운동을 벌인다. 약 50만 명이 서명한 탄원서와 모금액 8600만원을 들고 대구시청을 찾아갔다. 감동이었다. 결국 2006년 고택 주변을 구입한 건설회사가 상화 고택을 대구시에 기증하여 이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이상화 시인이 심었다는 나무가 반긴다.

 

 

이상화 시인이 운명하신 방

 

 

고택 대청에 있는 시인의 흉상

 

 

이상화 고택 내부

 

 

 

 

겨울이라 을씨년스럽지만 그의 시비를 읽으면 추위가 가시면서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의 시‘역천’이 새겨진 화강암 시비를 오른 손으로 만지며 읽어본다.


이때야 말로 이 나라의 보배로운 가을철이다.
더구나 그림도 같고 꿈과도 같은 좋은 밤이다.

초가을 열 나흘 밤 열푸른 유리로 천장을 한 밤
거기서 달은 마중 왔다. 얼굴을 쳐들고 별은 기다린다. 눈짓을 한다.
그리고 실낱 같은 길을 끄으며 바라노라 이따금 성화를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오를 밤에 좋아라 가고프지가 않다.
아니다 나는 오늘 밤에 좋아라 보고프지도 않다.

이런 때 이런 밤 이 나라까지 복지게 보이는 저 편 하늘을
햇살이 못 쪼이는 그 땅에 나서 가슴 밑바닥으로 못웃어 본 나는 선뜻만 보아도
철모르는 나의 마음 홀아비자식 아비를 따르듯 불 본 나비가 되어
꾀이는 얼굴과 같은 달에게로 웃는 이빨 같은 별에게로
옆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곤두치듯 줄달음질을 쳐서 가더니
그리하야 지금 내가 어데서 무엇 때문에 이것을 하는지
그것조차 잊고서도 낮이나 밤이나 노닐 것이 두려웁다.

걸림없이 사는 듯하면서도 걸림뿐인 사람의 세상
아름다운 때가 오면 아름다운 그 때와 어울려 한뭉텅이가 못 되어지는 이 살이
꿈과도 같고 그림 같고 어린이 마음 위와 같은 나라가 있어
아무리 불러도 멋대로 못 가고 생각조차 못 하게 지쳤을 떠는 이 설움.
벙어리 같은 이 아픈 설움이 칡넝쿨같이 몇 날 몇 해나 얽히어 틀어진다.

보아라 오늘 밤에 하늘이 사람 배반하는 줄 알았다.
아니다 오늘 밤에 사람이 하늘 배반하는 줄도 알았다.

--- 이상화 시인의 시 ‘역천(逆天)’ 전문

 

 

이상화 고택에는 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할 수 있도록 그의 흉상이 서 있고 작품들과 글씨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에 그의 고택이 이렇게 복원 될 수 있었던 것은 대구시민들의 문화적인 역량의 힘이었다. 이상화 시인 때문에 대구는 문학의 고향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나는 이상화 시인의 호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호를 자세히 살피게 되면 그가 살았던 삶의 단면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화는 호를 4개 가지고 있던 시인이다. 처음에 그는 '무량(無量)'이라는 불교 용어의 호를 사용했다.
주로 문단에 나오기 전인 20세 이전에 그랬다. 의식적으로 물질적으로 무량이란 호처럼 별로 부족할 것이 없던 때였다.

두 번째 호는 '상화(尙火)'다. '항상 불같이' 란 뜻을 지닌 이 호는 주로 작품을 쓸 때 사용했다. 호의 뜻처럼 이 시기에 그는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한다. 1927년 이후에 그는 독립지사가 되어 제대도 문학 활동을 못한다.
세 번째 그의 호는'상화(想華)'다. 중국에서 지어 부른 호다. 지명수배자의 신분이라 작품활동은 못하던 불안 공포의 시기에 조국독립의 화려한 생각을 해 보려고 했으리라.

마지막 네 번째 호는 '백아(白啞)'다. 1936년부터 사용하였으며,'백치와 벙어리'처럼 살겠다는 결심이 녹아있다. 많던 가산은 모두 사라지고 절망이 가슴을 억누르던 시절에 역설적인 호를 사용한 것이다.
지금 주로 '상화(尙火)'로 불려지는 것은 그가 활발히 시작(詩作)할 때의 호이기 때문일 것이다. 1948년에 대구 달성공원의 시비(詩碑)에도 '상화시비(尙火詩碑)'라 새겼다.

다만 묘비에는 '시인백아이공휘상화지묘'(詩人白啞李公諱相和之墓)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곳에 '백아(白啞)'란 호가 보인다.
이상화는 미남이었기 때문에 '고뇌의 재료'라고 김팔봉은 말했다. 그런 그에게 사랑이 왜! 없었겠는가.
그의 시 ‘이별을 하느니’는 연시(戀詩)다.
시 몇 줄에도 이별의 슬픔이 오롯하게 녹아있다.


어쩌면
너와 나 떠나야겠으며
아무래도 우리는 나눠야겠느냐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남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꼭두로 오르는
정열에 가슴과 입설이 떨어
말보다 숨결조차 못 쉬노라

오늘 밤
우리 둘의
목숨이 꿈결같이 보일
애타는
네 맘 속을 내 어이 모르랴

남몰래 사랑하는 우리 사이에
우리 몰래 이별이 올 줄은 몰랐어라

우리 둘이 나뉘어 사람이 되느니
차라리 피울음 우는 두견이 되자

-- 이상화 시 ‘이별을 하느니’ 중에서

 

 

달성공원은 대구 중구 달성동에 위치한다. 삼한시대에 부족국가였던 달구벌의 성터가 공원화 되었다.
달성공원 터는 고려 중엽 이후 달성서씨(徐氏)가 대대로 살아왔던 사유지였다.그러나 조선 세종(世宗) 때 서씨 가문이 국가에 헌납하였다. 공원으로 처음 조성된 것은 1905년이었으며, 현재의 종합공원으로 조성 된 것은 1967년이다.

달성공원에는 1600m 토성(土城)과 잔디광장, 동물원 ,관풍루(觀風樓),망향루(望鄕樓)가 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의 동상, 의병장 허위(許蔿)선생의 공덕비, 달성서씨 유허비(遺墟碑)가 공원의 역사적인 의미를 더해 주고 있다. 또한 이곳에 이상화 시비(李尙火詩碑)가 서 있기에 달성공원의 품위가 더욱 돋보인다.

달성공원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문인의 시비가 서 있다. 이상화의 시비다.
1948년 3월14 수필가 김소운 등이 발의하고 구상 등이 참여한 역사적인 시비다.
시비 뒷면에는 수필가 김소운이 지은 글을 서예가 서동균의 글씨로 새긴 한국근대시인 최초의 시비이기 때문이다.

 

 

달성공원에 있는 이상화 시비

 

달성공원에 새긴 시비에는 당시 10세 된 아들 이태희가 시 ‘나의 침실로’ 한 구절 쓴 것을 새겨 넣었다. 그러나 그의 시 <나의 침실로>로 전문을 읽으며, 그가 절망상태에서 도달하려고 했던 삶을 회고하면서 대구를 떠나려고 한다.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련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桃)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 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마돈나, 구석지고도 어둔 마음의 거리에서 나는 두려워 떨며 기다리노라.
아, 어느덧 첫닭이 울고 - 뭇 개가 짖도다. 나의 아씨여 너도 듣느냐?

마돈나, 지난 밤이 새도록 내 손수 닦아 둔 침실(寢室)로 가자 침실로!
낡은 달은 빠지려는데 내 귀가 듣는 발자국 - 오 너의 것이냐?

마돈나, 짧은 심지를 더우잡고 눈물도 없이 하소연하는 내 마음의 촛불을 봐라.
양털같은 바람결에도 질식이 되어 얕푸른 연기로 꺼지려는도다.

마돈나, 오너라. 가자. 앞산 그리매가 도깨비처럼 발도 없이 가까이 오도다.
아, 행여나 누가 볼런지 - 가슴이 뛰누나.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마돈나, 날이 새련다. 빨리 오려무나. 사원(寺院)의 쇠북이 우리를 비웃기 전에
네 손이 내 목을 안아라. 우리도 이 밤과 같이 오랜 나라로 가고 말자.

마돈나,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 다리 건너 있는 내 침실, 열 이도 없느니
아, 바람이 불도다. 그와 같이 가볍게 오려무나. 나의 아씨여, 네가 오느냐?

마돈나, 가엾어라. 나는 미치고 말았는가. 없는 소리를 내 귀가 들음은 -
내 몸에 피란 피 - 가슴의 샘이 말라 버린 듯 마음과 몸이 타려는도다.

마돈나,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 가지 말고
너는 내 말을 믿는 마리아 - 내 침실이 부활(復活)의 동굴(洞窟)임을 네야 알련만….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구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 이상화 시인의 시‘나의 침실로’ 전문

 

백조3호 1923년 9월호에 발표된 시다. 박종화의 '시의예찬'도 함께 이 곳에 게재된다. 죽음을 예찬한 두 편의 시는 젊은 청년들이 쓴 시이기에 서럽다. 밤은 넓게는 조국의 암담한 현실이며 좁게는 작가 자신의 절망적이며 현실적인 삶의 현장이다. 밤이 암담한 현실이라면 새벽의 밝음을 고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나의침실로’에서는 오히려 새벽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자에게 광명의 빛을 지니고 다가서는 새벽은 오히려 부담과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해야 하는 자의 슬픔은 ‘ 마돈나와 나’다. 이들은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 모르게 숨는 두 별’과 같은 존재다. ‘나의침실’이란 은유의 상징적 단어는 사랑과 죽음이다.

시의 전반부는 1연에서 6연이다. 이 곳은 사랑의 장소다. 그러나 7연에서 12연의 후반부는 죽음의 공간이다. ‘뉘우침과 두려움의 외나무다리 건너있는 침실’이란 표현은 죽음의 장소를 암시한다. 이 죽음의 장소는 단순한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부활의 동굴’이다. 결국 죽어야 절망을 극복할 수 있고, 사랑의 가장 적극적인 행위와 저항하라고 표현한다.

 

 

상화 시비 앞에서

 

이상화는 성격적으로는 순수서정 시인의 길을 걸아야 하는 사람이었지만 일제시대 조국의상황은 그를 저항작가로 내 몰았다. 그의 시 창착은 주로 1922년부터 26년까지 4년간 주로 이루어 졌는데 원고들은 대부분 실종된 상태다.

임화(林和)는 이상화를 따르던 시인이었다. 시집을 출판하기 위해 임화는 이상화의 시 원고를 가져갔다. 임화는 해방 후에 월북과 사형을 당했으므로 그의 원고는 소실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상화의 친구인 월탄 박종화가 보관하던 그에게서 온 편지들과 시고(詩稿) 몇 편이 있었다. 그러나 이상화 시인의 제자 이문지가 출판하겠다고 가져갔는데, 이내 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다. 피난통에 이 원고들이 또 사라져 버렸다.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은 서로 마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생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다. 서상돈이 세상을 떠날 때 이상화는 고작 12세의 소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화는 마지막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살던 집에서 서상돈 선생이 살았던 집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상화 고택에서 바라 본 서상돈 고택

 

서상돈(徐相敦,1850~1913)은 1871년부터 대구에서 지물행상과 포목상 등으로 큰 부자가 된 사람이다. 계산성당 교인으로 신앙에 정진하면서 그는 자신의 삶을 조국해방에 걸었던 사람이다. 그는 1898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했다. 이 무렵 그는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며 민권보장 및 참정권획득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에 의해 빚을 많이 진 조선의 조정은 곧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이유다.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일제에 진 빚을 상환하면, 온 나라가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무렵 그는 대구 광문사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며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한다. 그가 제안하고 전개하던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방해하기 시작한다. 결국 이 운동도 실패로 돌아간다.

재개발에도 살아남은 서상돈고택은 이제 바로 옆에 있는 이상화고택과 이웃하며 대구의 자부심 있는 명소로 부활하고 있다.

 

 

서상돈 고택 내부

 

 

서상돈 고택 대청 앞에서 문학 기행의 길라잡이 김경식 시인의 설명을 경청하는 회원들

 

서상돈 고택 대문간

 

문학기행 2010년 2월

글 : 길라잡이 김경식 시인 제공 자료

사진 : 문학기행 회원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