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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기행

달처럼 2012. 3. 1. 16:08

 

음력 정월 대보름도 지나고 봄이 멀지 않았는데, 갑자기 날씨가 영하로 떨어졌다. 

쌀쌀한 새벽 공기를 가르고 2월 문학기행은 내 어머니의 고향 서천으로 향한다.

나의 피의 절반을 형성한 땅이라 유달리 설렌다.

봄흙의 폭신한 느낌조차 정겹다.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한산모시관 위쪽 양지바른 언덕에는

신석초 시인의 시비와 이상재 선생 추모비, 조선시대 여류 시인인 임벽당 김씨의 시비가 서 있다.

 

 

구름을 형상화한 신석초 시비에는 내가 즐겨 암송하는 '꽃잎 절구'가 새겨져 있다.

 

모든 꽃들은 '비바람에 뒤설레'는 '가냘픈' 존재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토아 피어'난다

꽃은 결코 인연이 될 수 없는 '하늘과 구름'을 '혼자 그리워' 하면서 '붉어져' 간다.

이렇게 애타게 간직한 그리움의 색이 붉은색이 아니겠는가.

'붉게 타다 가는 환한 목숨'의 꽃잎처럼

저마다 주어진 각자가 자신의 현실적인 삶에 충실하다가

이 지상을 떠나는 마지막 날 꽃처럼 저렇게 아름다운 이별을 암시한다.

 

   

신석초 시인의 고향 마을인 ‘활동리’로 간다.

 

 

신석초 시인은 1950년 6,25 전쟁으로 큰 아들을 잃어버리고

슬픔속에서도 고향 사람들의 강력한 추천으로 화양면장이 되기도 한다.

이후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문화부장과 현대문학지의 추천위원과 1965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이 되어 문단의 어른이 된다.

 

 

 

6.26 때 신석초의 고향 마을은 깊은 상흔을 남기고 그의 문중은 흩어진다.

홍매 한 그루가 있어서 홍매루라고 불리던 그의 생가는 없어지고 고추밭 머리에 표지석만 덩그러니 서 있다.

 

 

마을 앞 동산 신석초의 묘소에 천지를 닮은 시비가 있다.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역임한 신석초 시인의 조카가

몇 년 전 문학기행에 동행했다가 시비 하나 없이 썰렁한 것을 보고 안타까워 하여

그 후에 자발적으로 시비와 연보비를 세웠다고 한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바라춤' 초간본이다.

종이가 바스러질 듯하여 조심히 넘겨본다.

 

신석초 시인은 우리의 현대시를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라는 비교의 화두로 시를 쓴 시인이다.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한 석초시집(石艸詩集)은 프랑스의 시인 발레리와 두보와 이백 그리고 노장 사상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정서와 글로 시를 쓴 민족의 시인이다.

외래사조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언제나 민족이 존재한다.

 

‘가장 민족족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란 괴테의 말을 그가 자주 인용한 것도 이런 맥락이리라.

 

 

 

 

임벽당 김씨는 조선 중종 때의 여류 시인이다.

기묘사화를 피해 고향인 한산에 은거하던 임벽당 유여주와 혼인한 인물로

그녀의 시집이 존재했다고 하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단지 그녀의 시가 열조시집(列朝詩集)과 국조시산(國朝詩刪)에 7수가 전한다.

열조시집은 명나라의 문인 '전겸익'이 편찬한 책인데

1683년 애산 김두명이 사신으로 갔다가 이 책을 수집하여 국내로 들여왔다.

이 책에 임벽당 김씨의 시 3수가 게재되어 조정과 문인들 모두가 놀란다.

난설헌집(蘭雪軒集)에도 증별(贈別)과 빈녀음(貧女吟)을 제외한 나머지 시가 게재되어 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과 더불어 조선 전기 중기의 3대 여류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묘소는 서천군 비인에 있다.

 

 

 

구한말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 의장을 지낸 월남 이상재 선생 추모비이다.

 

 

 

이상재 선생의 생가지는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 있다.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는 내외담이 없는 개방형이다.

 

이상재 선생은 유머 감각이 뛰어나 일화를 많이 남겼다.

 

을사늑약이 있은 후 우연히 그는 조선 미술협회 창립 축하연에 참석했다.

상석에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 송병준이 앉아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이상재 선생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서 한 마디 했다.

 

 

“ 두 대감님들께서는 일본 동경으로 이사를 가시면 좋겠소.”

 

 

두 사람이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그대들은 나라를 망치는 데는 천재이니,

동경에 가서 살면 일본제국도 망할 게 아니겠소?”

 

 

 

 

 

 

문헌서원에 있는 목은 이색 선생의 신도비다.

130년이 지난 현종7년(1666년)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은 원나라가 명나라와 교체되는 시기에 친명정책을 지지한 학자다.

20대 때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성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고 1354년 그의 나이 36세 때 원나라 한림원에 등용되었다.

3년 상을 제도화한 인물이며 고려말 우왕의 사부(師父)가 되기도 했던 대 문장가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득세하자 ‘장단’과 ‘함창’으로 유배되기도 한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목은(牧隱) 이색(李穡)은

호(號)에 모두 ‘은(隱)’자가 있기 때문에 이들을 일러 삼은(三隱)이라 부른다.

목은은 태조5년(1396)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여강(남한강)에서 배를 타고 가다 술을 마시고 즉사한다.

그 술을 이성계가 보낸 술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목은의 묘소는 문헌서헌 좌측 기린산 중턱에 있다.

묘지 터는 ‘무학대사’가 정했다는 명당터다.

무덤 앞에는 문인상과 망주석, 마상(馬像)이 각 2기씩 양쪽에 서 있다.

 

 

문헌서원은 고려말의 대학자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선조 27년 (1594년)에 건지산 아래에 건립하였다.

 

이곡(1298~1351)은 목은 이색의 부친이며, 고려후기 학자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다.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을 중수하였으며,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에 3대에 걸친 실록 편찬 업무에 참여했다.

죽부인전(竹夫人傳)이 동문선에 전하며 우탁 백이정 정몽주등과 함께 경학(經學)의 전문가였다.

 

문헌서원 동쪽에 잘 생긴 소나무가 이곡의 묘소를 에워싸고 있다.

 

 

서원 담장 안의 배롱나무가 裸木으로 서 있다.

 

 

신석초 시인의 고향마을에서 한산모시전시관까지는 지척이다.

활동리에서 나와 논산과 ‘강경’ 방향의 29번 국도를 타고 고개를 넘어가면 그곳이 바로 ‘한산모시관’이다.

 

백제 때에 한산면에 있는 건지산 기슭에서 모시풀이 발견되었다.

이 모시풀을 이 지방 사람들의 인내와 피나는 노력으로 유명한 한산모시는 태어난다.

백옥처럼 희고 아름다우며 비단보다 섬세하고 가늘어 여름철 옷감으로는 최고다.

조상들이 1000년 동안 맥을 이어준 전통 직조기술로 생산하는 자연섬유가 바로 한산모시다.

한산면 일대에는 아직도 양질의 모시가 많이 생산된다.

서천군에서 한산모시 생산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쌀 생산소득의 17%나 되기 때문이다.

  

한산모시관은 이 지역 출신들이 한산모시의 맥이 끊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전수교육관'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29번 국도변 언덕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 ‘한산모시관’ 건너편에는 ‘한산소곡주제조장’과 ‘토속관’ 등이 있다.

모시의 역사를 말해주는 고서적과 베틀, 모시길쌈 도구, 모시 제품 등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을 관람하다 보면

우리 조상들의 고달픈 생과 멋을 동시에 실감한다.  

 

 

 

 

 

금강이 그 수명을 다하고 바다와 만나는 하구( 철새도래지)에는 많은 새들이 평화롭게 노닐고 있다.

AD 660년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당나라의 소정방 군사들이 배를 타고 부여를 향해 몰려가던 역사적인 장소이지만

지금은 무성한 갈대밭, 철새 도래지로 알려지고 영화 촬영지가 되면서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군청에서 갈대밭을 태운다는데, 올해는 우리 팀이 사전에 간청해서 갈대가 아직 남아 있었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갈대밭에서 우리끼리 또 한 편의 영화를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