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많은 집 장맛이 쓰다.'
이 속담의 원뜻은 가정에 말이 많으면 살림이 잘 안 된다는 말인데,
울 엄마로부터 세뇌 받기로는 말이 많은 여자는 음식 솜씨가 형편 없다는 해석이었다.
올해 결혼한 지 26년 만에 처음으로 김장을 담갔다.
신혼 첫 해는 시어머님께서 담가서 연립주택 화단에 항아리를 묻고 넣어주고 가셨고,
그 이후로는 계속 친정에서 가져다 먹었다.
처음에는 김장을 다 해서 날라다 주시더니
언제부턴가 와서 김치 속을 넣으라고 하셨고,
지난 해에는 김장하기 전 날에 와서 재료 준비부터 거들라고 하신다.
엄마가 농사 지은 배추라지만 갈수록 올케 눈치가 보였다.
딸 때문에 며느리 눈치 보여서 엄마가 그 연세에 찬물에 배추 절이고 씻는 것을 도맡아 하신다.
거저 먹는 것이 아니고, 해마다 김장 값 이상으로 댓가를 치르는 데도 마음이 불편하다.
게다가 나도 자식 나이가 있으니 머지 않아 시어머니가 될테고
김장을 직접 해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서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금년부터는 농사 지을 텃밭이 얻었으니 따로 김장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8월 중순을 넘겨 무 씨를 뿌리고, 배추 모종을 사다 심었다.
올 가을은 왜 그리 비가 안 오던지...
남편이 매일 새벽에 밭에 나가 물을 주었다.
정성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름이 부족했는지 영 볼품 없이 자랐다.
그래도 솎아다 김치를 해 보면 고소하고 맛있었다.
김장철은 다가오고 슬슬 김장에 대한 압박이 느껴질 무렵인
11월 18일 금요일
갑자기 날씨가 영하로 내려간다는 기상예보가 나온다.
이 날을 넘기면 배추와 무가 다 못쓰게 될 것 같아
남편이 일찍 들어오면 같이 가서 수확하리라 기다렸는데
해 지기 전에는 못 온다고 한다.
학교에 병가를 내고 쉬고 있는 중이라 밭에 나가지 않고 있었지만
할 수 없이 학교 밭으로 가서 모두 수확해서 돌아왔다.
집안에 배추를 들여놓으니 벌레도 따라왔는지 여기저기 기어다닌다.
그걸 보느니 바로 배추 손질에 들어갔다.
인터넷에서 몇 가지 레시피를 검색해서 그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출력해 놓고
절임용 소금물을 만들어 절이면서
남편에게 마트에 가서 레시피대로 양념거리를 사 오라 부탁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한지라
굵은 소금도 부족했고, 고춧가루, 양파, 마늘, 생강, 대파, 쪽파, 갓, 배, 찹쌀가루, 김장용 비닐 등 살 것이 많았다.
잠시 후 돌아 온 남편은 혼자 장을 보자니 홀아비 같아서 창피했노라며
앞으로 그런 심부름은 시키지 말라고 한다.
김장은 그렇게 엉겁결에 시작했다.
배추를 절이고 밤에 뒤집어 주면서
사이사이에 양념거리를 씻고, 참깨를 씻어 볶아놓았다.
아침에 찹쌀풀을 쑤어 멸치액젓과 고춧가루를 섞어 불려 놓은 후
배추를 씻어 건져 물이 빠지는 동안
무 채를 썰고 배추 속에 넣을 양념거리를 넣어 버무렸다.
드디어 속을 넣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허리가 아파 운신을 할 수 없었다.
쩔쩔 매는 모습을 보고 남편이 자기가 할 테니 쉬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우리 김장은 나의 입과 남편의 노동력으로 마무리 되어 갔다.
김치 통에 넣는 일까지 마무리 한 후 남은 속을 어찌 할까 하다가
남편이 굴을 넣어 버무려 먹고 싶으니 굴을 사다 달란다.
굴 사러 갔더니 동치미용 무를 한 다발에 1,500원에 할인 판매한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그걸 더 사다가 이번에는 깍두기를 담갔다.
배추 몇 포기를 우거지국이랑 쌈으로 먹으려고 남겨 두었는데
남편이 그것도 마저 김장 담그자고 한다.
또 절이고 씻고 양념 준비하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양념에 소금간을 하는데 남편이 자꾸 소금을 더 넣으라고 훈수를 한다.
마지막 한 통은 그렇게 담갔다.
보름쯤 지났을까.
담근 김장을 개봉하면서 내심 맛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대가리만 따고 통째로 식탁에 내 놓았는데 짜다 못해 쓰다.
다른 통들도 열어 맛을 봤더니 다른 통의 김치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마지막에 소금 더 넣으라고 해서 더 넣은 것이 불찰이다.
일단 무를 사다 토막 내서 사이사이에 넣는 응급 처방을 했다.
며칠 후 학교에서 입심이 센 선배한테 김장 맛있게 됐냐고 물었더니
표정이 어두워지며 고개를 흔든다. 레시피 대로 했는데 짜다고.
한바탕 웃고 나서 생각 하니 엄마 말이 딱 맞다.
조금 변형하자면
'말 많은 여편네들은 집안에 김치 맛도 쓰다.'
2011.09.28. 토평동 배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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