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오래된 여행가방」
스무 살이 될 무렵 나의 꿈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여행가방과 펠리컨 만년필을 갖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낯선 곳에서 한 번씩 꺼내 엽서를 쓰는 것.
만년필은 잃어버렸고, 그것들을 사준 멋쟁이 이모부는 회갑을 넘기자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를 낳고 먼 섬에 있는 친구나, 소풍날 빈방에 홀로 남겨진 내 짝 홍도, 애인도 아니면서 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은 남자,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한 삼촌.......
추억이란 갈수록 가벼워지는 것. 잊고 있다가 문득 가슴 저려지는 것이다.
이따금 다락 구석에서 먼지만 풀썩이는 낡은 가방을 꺼낼 때마다 나를 태운 기차는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간다. 그러나 이제 기억하지 못한다. 주워온 돌들은 어느 강에서 온 것인지, 곱게 말린 꽃들은 어느 들판에서 왔는지.
어느 외딴 간이역에서 빈자리를 남긴 채 내려버린 세월들. 저 길이 나를 잠시 내려놓은 것인지, 외길로 뻗어 있는 레일을 보며 곰곰 생각해본다. 나는 혼자이고 이제 어디로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 시_ 김수영 - 1967년 마산에서 태어났으며,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오랜 밤 이야기』가 있음.
◆ 출전_ 『오랜 밤 이야기』(창비)
9월을 목전에 둔 오늘은 살짝, 옛날사진을 보듯, 낡은 흑백사진의 미감이 그리워서 이 시를 꺼냈습니다. 컬러풀한 세상이 좋다가도 문득 질리는 날. 오래된 흑백 영화를 보러가고 싶다거나 엘피판 긁는 바늘의 타닥 튀는 소리 같은 게 그리워지는, 그런 날이 가끔 찾아오는 생이어서 다행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행가방을 꺼내지요. 기차는 과거로 달리고요. 나를 태운 기차가 자그락거리며 침목을 밟고 가는 것을 추억합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이 있어서 소중한 것들이 생기는 지도 모르지요. 가방이 낡아갈수록 가방 주인도 늙어가고 세상도 변하고 추억의 의미도 달라집니다만, 기억의 빨랫줄에 널어두고 잊어버린 옷가지들이 문득 펄럭일 때, 추억이란 퍽 괜찮은 동행. 뜯어낸 달력에 표시되어 있는 만남과 이별의 간이역에서 때로는 ‘혼자라서 좋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어도 좋겠습니다. 나를 잠시 내려놓은 저 길의 안부는 좀 천천히 물어도 괜찮습니다.
문학집배원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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