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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船)를 매며 / 장석남

달처럼 2012. 6. 10. 10:22

 

 배(船)를 매며 

                                 장석남


아무 소리도 없이

무슨 신호도 없이

등뒤로 털썩

밧줄이 날아와 나는 깜짝 놀라

뛰어가 밧줄을 잡아다 배를 맨다

배를 매보는 일은 이 세상에서의 참으로 드문 경험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배는 멀리서부터 와 닿는다




사랑은,

우연히 호젓한 부둣가에 앉아 있다가

배가 들어와

던져지는 밧줄을 받는 것

그래서 어찌할 수 없이

배를 매게 되는 것




잔잔한 바닷물 위에

구름과 빛과 시간과 함께

떠 있는 배

배를 매면 구름과 빛과 시간이,

그리고 그 근처의 물결까지도 함께

매어진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랑이란 그런 것을 처음 아는 것

빛 가운데 배는 울렁이며

온종일 떠 있다


제14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中에서.문학사상사.1999.


: 내 작은 열예닐곱 고등학교 시절
: 처음으로 이제 겨우 막 첫 꽃피는
: 오이넝쿨만한 여학생에게 마음의 닷마지기 땅을 빼앗기어
: 허둥거리며 다닌적이 있었다
: 어쩌다 말도 없이 그 앨 만나면
: 내 안에 작대기로 버티어놓은 허공이 바르르르르 떨리곤 하였는데
: 서른 너머 이곳 한적한, 한적한 곳에 와서
: 그래도는 차분해진 시선을 한 올씩 가다듬고 있는데
: 눈길 곁으로 포르르르 멧새가 날았다
: 이마위로,
: 외따로 뻗은, 멧새가 앉았다 간 저,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 차마 아주 멈추기는 싫여
: 끝내는 자기속으로 불러들여 속으로 흔들리는 저것이
: 그대의 내 마음은 아니었을까.
: 외따로 뻗어서 가늘디가늘은, 지금도 여전히 가늘게는
: 흔들리어 가끔 만나지는 가슴 밝은 여자들에게는
: 한없이 휘어지고 싶은
: 저 저 저 저 심사가 여전히 내 마음은 아닐까
: 아주 꺾어지진 않을 만큼만 바람아,
: 이 위에 앉아라 앉아라.
: 어디까지 가는 바람이냐.
:
: 영혼은 저 멧새 앉았다 날아간 나뭇가지같이
: 가늘게 떨어서 바람아
: 어여 이 위에 앉아라
: 앉아라
:
: *장석남 99현대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