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연산방
소설가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거주하면서 '달밤', '돌다리', '황진이' 등을 집필한 곳으로 성북동에 있다.
이 집은 1933년에 지은 개량한옥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결합한 양식이다.
이태준은 등단작 '오몽녀'(1925)를 필두로 북한에서 숙청되기까지 60 여 편의 단편과 18편의 중단편을 발표하였다.
성북동과 관련한 소설로 '달반', '까마귀'
여섯 살에 부친을 잃고 아홉 살에 어머니마저 잃게 되어 어린 나이에 가혹한 시련과 맞닥뜨린다.
비슷한 처지의 이광수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부끄러움'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된다.
반면에 이태준은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미화한다. 그에게 아버지는 '민족주의와 선비 사상'이다.
그는 월북작가라는 점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에 장애를 받아왔지만
일제 때에 발표한 '장마'( 1936)에서 일제가 '안국동'을 '안국정'이라고 바꾼 것을 두고
'능률 본위로 문화를 통제하는 것은 그릇된 나치스의 수입이다.
이러다가 사람의 성명까지 무슨 방법으로든지 통제할런지도 모르겠다.'
라고 날카로운 촌평을 늘어놓는다.
실제로 월북 후 한국전쟁이 나기 전 발표한 소설에서 쓰라는 것만 써야 하는 상황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전쟁 종군 작가 시절에는 '이승만 괴뢰 도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태준의 소설은 김유정의 소설에서와 같은 아이러니가 보인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바보'는 겉과 속이 다른 데서 오는 풍자를 노린다.
수연산방은 현재 이태준의 외종손녀가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본채 앞 작은 마당의 우물
심우장(尋牛莊)
심우장은 정면에 4칸, 측면에 2칸에 팔작기와지붕이 올라간 한옥이다.
벽산 김적은 스님과 몇몇 지인들이 거처할 곳 없는 만해를 위해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한다.
만해는 이곳에서 1933년부터 생을 마감한 1944년까지 살았다.
만해가 조선 총독부와 마주 보기를 거부하여 북향터를 선택했다고 한다.
'심우장'은 禪宗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데서 유래했다.
예전과 달리 신발을 벗고 집안에 오를 수 있게 했다.
만해가 겨울에도 냉돌 위에 형형한 눈빛으로 앉아 있던 그 방에서 만해에 대한 강의를 듣는다.
모두 자료집을 펴고 '님의 침묵'을 읽고 있다.
현판 글씨는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썼다.
방 안에 있는 만해의 초상
만해의 친필 글씨
모 방송사 PD의 인터뷰에 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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