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살뜰/문화답사

변산반도에 맺힌 인문학의 꽃망울 1. 계생의 시와 사랑 - 매창공원

달처럼 2012. 12. 5. 23:05

 

 

2012년 12월 길 위의 인문학은 부안을 찾았다.

부안은 기생 출신 여류문인 이매창(1573~1610)이 살던 고장이다.

아전의 서녀로 태어난 이매창은 용모는 별로 뛰어나지 않았으나 시와 글을 잘 지었으며 노래와 거문고에 능했다.

기생이었으나 음탕하지 않았고 술자리에 앉았어도 도를 지나치지 않고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다고 소문이 나 시인 묵객들이 그녀와 어울리기를 열망하였는데, 그 중 유희경과 허균과의 사랑이 잘 알려져 있다.

 

 

매창공원 초입의 시비에 새겨진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은 유희경으로 알려져 있다.

유희경은 천민 출신이나 박학다식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한 공으로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났다.

40대의 유희경과 18세인 이매창은 때로는 부녀의 정을 때로는 연인의 정을 느끼며 가까이 지냈다.

 

 

이매창 묘소

 

 

낮에도 영하인 추위에도 불구하고 매창 묘소에 둘러서서 인문학 강의에 빠져든다.

 

 

이매창과 허균의 사랑을 플라토닉 사랑이었다고 강의하는 이이화 역사학자

 

허균(許筠)은 아산(牙山), 군산(群山), 법성창(法聖倉)의 전운판관(轉運判官)에 제수되어 조운(漕運)을 감독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이 지역에 들렀을 때 이매창과 가까워져 자주 부안을 찾았다.

허균은 그녀를 계유년에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의 '계생(桂生)'이라 부르며 많은 시를 주고 받았다.

허균이 온갖 것을 버리고 부안에 묻혀 살려고 마음 먹었던 것도 계생 때문이 아니었을까?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는 허균의 시

 

허균이 나중에는 벼슬살이에 바빠 계생을 자주 찾지 못해 이런 편지를 보냈다.

 

'봉래산의 가을이 한참 무르익었으려니 돌아가려는 흥취가 도도하오.

 아가씨는 반드시 내가 시골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것이오.

만약 그 시절의 생각이 잘못 되었더라면 나와 아가씨의 사귐이 어떻게 십년 동안이나 그토록 다정할 수가 있겠는가? 

......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할는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 (성소부부고 문부)

 

계생이 이편지를 받은 때는 한창 병에 시달리며 고독을 노래하던 시절이었다.

 

독수공방 외로이 병에 찌든 이 몸

굶고 떨며 사십 년 세월 길게도 살았네

잠시 묻노니 사람살이가 몇 해 되는가

심사 서러워 어느 날도 울지 않은 적 없네

                                                                          - 계생시집

 

 

 

붉은 열매가 가지마다 조롱조롱 달려 눈길을 끈다.

 

 

계생은 마흔이 채 못되어 죽었다. 가난에 찌들어 약도 제대로 못 쓰고 죽어갔다.

그녀의 시는 대부분 없어졌으나 58수가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황진이의 시보다 많이 남았다.

그녀가 죽고 난 뒤 60여 년이 지난 후 시골 아전들이 여기저기서 모아 놓은 것을 부안 개암사에서 책으로 엮어 주었다.

오늘날의 평자들은 그녀의 시를 두고

"인종과 애수가 흐르는, 정감이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기의 속병을 그대로 읊었다"(김지용의 평)고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