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 김혜리 저
· 2011년 10월 07일
· 앨리스
성실함을 무기로 가장 독창적인 글을 쓰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김혜리 기자가 그림 산문집 '그림과 그림자'를 출간했다.
계속 영화에 대한, 혹은 영화와 끈을 맺은 책을 낸 그로서는 첫 번째 탈주이자 2007년에 나왔던 첫 책 '영화야 미안해' 이후, 다섯 번째 책이다.
여기 마흔 점의 그림, 마흔 편의 이야기가 있다. 그림과 이야기, 그 사이의 그림자를 오가는 이 묶음에는 경계가 없다.
지은이는 그 자신이 그리워하는 어린 시절,
즉 소설과 그림 속 세계와 현실을 가르는 벽이 훨씬 부드럽고 투명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던 시절로 돌아간 양
그림이란 2차원을 통과하며 주섬주섬 이야기의 파편들을 저장한다.
그러곤 집에 돌아와 미술관에, 갤러리에 두고 온 그림들을 상상의 미술관으로 소환해 한 점씩 걸어보고, 이야기의 파편을 하나하나 조각한다.
얼굴 없는 니케 상부터 인물의 감정과 피로가 팔뚝 아래 핏줄처럼 선명하게 비치는 루치안 프로이트의 그림까지
김혜리가 주목하는 그림엔 어쩔 수 없이 고독하고 공허한 틈이 많이 엿보인다.
그녀는 풍경화건 인물화건 그 안에서 어떤 ‘마인드스케이프’ 즉 심상을 한 움큼 잡아내, 책 밖으로 손을 펼치며 공감을 구하는 눈빛을 보내온다.
그 눈빛은 어쩐지 슬퍼 보여, 읽는 이로 하여금 책 속으로 들어가 그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그림 앞과 뒤를 오가게 만든다.
김혜리가 흩트려놓은 단어들을 주섬주섬 그러모아 그림 같은 산문을 함께 완성하고 싶게 만든다.
≫ 에드가르 드가, 「머리 빗기」(1892~96)
“모든 가면을 벗고 머리를 풀어 민얼굴의 자신으로 돌아온 여인과
하루의 마지막 노동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이 보인다.”
(『그림과 그림자』 80페이지)
≫ 레오느르 피니, 「봄의 수호자」(1967)
“「봄의 수호자」는 여자의 생애를 함축한 일러스트레이션인지도 모른다.
예쁜 잔을 하나 둘 모으며 누군가 채워주기만 기다리다가
어느 날 자신이 가장 깊은 잔임을 깨닫는 이야기의 삽화 말이다.”
(『그림과 그림자』 69페이지)
≫ 로버트 브레이스웨이트 마티노, 「가난한 여배우의 크리스마스 디너」(연도미상)
“그렇게 방치된 캔버스의 창백한 공백은 도리어 생의 피로와 고립을 백골처럼 드러낸다.
우리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림과 그림자』 119페이지)
미술 작품을 볼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찾는다.
비단 인물을 주제로 삼은 회화와 조각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화병의 꽃, 접시의 사과, 봄날의 잔디밭, 심지어 추상이라 해도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그것의 ‘얼굴’ 눈의 초점을 맞추고 감정을 투사할 지점을 본능적으로 찾아 방황한다.
자크 오몽이 썼듯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은 결국 타자의 얼굴이며, 존 버거가『포켓의 형태』에서 지적한 대로 모든 화가는
그리고 내 생각엔 관람자도 자신이 보낸 응시를 되돌려줄 화답의 시선을 대상에게서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상을 모방한 회화와 조각에서 얼굴의 부재는 충격을 야기한다.
결핍은 거기 존재했어야 마땅한 것을 강력히 환기시킨다.
_「사모트라케의 니케」에서
흔히 자연의 맞은편에 놓여 무기적인 영구불변함의 표상으로 치부되는 건축물들도 따지고 보면 한정된 삶을 산다.
그들은 녹슬고, 늙고, 숨 쉬며, 진동한다.
우리가 집이 살아 있다고 실감하는 때는 역설적으로 집을 오래 비운 연후다.
긴 여행으로부터 돌아와 첫 발을 들여놓으면 빈 집은 쾨쾨한 황폐의 냄새를 피운다.
한동안 어지르고 때 묻히지 않았으니 말끔해야 마땅할 텐데, 웬일인지 후줄근하고 시들어 있다.
그제야 집과 내가 날숨과 들숨을 주고받고 있었음을 안다.
어쩐지 훈훈한 깨달음이다.
_다니엘 아르샴, 「시트」에서
유화 앞에서 지독히 신중한 쇠라는 종이와 콩테를 잡으면 낭만에 휘둘린다.
색점이 또렷또렷한 유화와 달리 그의 소묘 선은 우단의 표면처럼 결을 형성할 뿐 분별되지 않는다.
무른 콩테 크레용과 짜임새가 불규칙한 미샬레 종이. 쇠라가 애용한 두 재료는 서로를 감싸고 저항하며
최소한의 터치로 형태와 빛의 분포, 분위기를 묘파한다.
거미가 자아낸 실로 짠 베일처럼 고개를 돌리면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쇠라의 소묘와 유화는 입자를 그린다는 목표는 같지만, 상이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쇠라의 집요한 점묘화는
그의 소묘가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답을 뭇사람에게 입증하기 위해 짐짓 나열해 보인 풀이과정의 식처럼 보인다.
_조르주 쇠라, 「에덴 콩세르」에서
밤은 내린다. 아침이나 낮에는 어울리지 않는 동사 ‘내리다’가, 밤을 주어로 삼으면 스르륵 날개를 편다.
밤은 사물과 풍경을 덮어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의 거대한 포장 설치 작품처럼 부드럽고 대범한 덩어리만 남긴다.
미처 사라지지 않은 일광의 노란 흔적이 다가오는 밤의 암청색과 마주치면 초록이 감도는 깊은 파랑이 공기 중에 번진다.
강가에서 맞이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은
한층 장중하니, 침착히 가라앉은 물의 청색이 낮게 드리운 하늘의 그것과 만나 거대한 블루의 화음을 이룬다.
우주의 움직임이 홀연 정체를 드러내는 시각.
경건한 이는 신을 생각하고, 고독한 이는 비로소 다시 혼자가 될 수 있는 짧은 평안에 한숨을 내쉬며,
젊은이들은 이제부터 하루 중 가장 근사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기대에 설렌다.
_제임스 맥닐 휘슬러, 「푸른색과 금색의 야상곡: 낡은 배터시 다리」에서
마치 테라코타 빛깔의 안료를 주머니에 넣어 캔버스 위에 곱게 두드린 듯한 「머리 빗기」의 채색기법은,
화장과 미술이라는 두 인간적 활동 사이에 걸쳐 있는 다리를 환기시킨다.
빗과 붓이라는 꼭 닮은 단어, 건하게도 습하게도 구사되는 연지와 파스텔의 독특한 물성,
피부를 어루만지는 손과 왁스를 개는 손을 연결하는 공감각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든다.
간혹 화장품을 안료로 쓴 것이 아닌가 싶은 로코코 화가들의 귀부인 초상화들과는 또 다른 이유로,
드가의 그림은 우리의 발을 멈춰 세운다.
벽에 걸린 거울이 지나가는 여인들의 눈길을 낚아채듯이.
_에드가르 드가, 「머리 빗기」에서
남자의 오른손과 여자의 왼손이 심장 근처에서 굳은 깍지를 끼고 있다.
나머지 자유로운 팔은 서로의 어깨와 허리를 휘감아 두 몸 사이에 한 치 틈도 용납하지 않는다.
여인은 남자의 귓불에 입술을 파묻고 남자는 눈을 감는다.
그의 다리는 울타리를 두르듯 애인의 치맛자락을 감싼다.
이 로맨틱한 그림의 제목은, 어이없게도「거짓말」이다.
_펠릭스 발로통, 「거짓말」에서
‘휩쓸린다’는 감각은 현대인에게 친숙하다.
정보와 노동의 속도는 생체 리듬을 추월하고, 자극성 강한 감상주의적 문화는 우리 마음을 급작스레 들었다 놓기를 거듭한다.
해일처럼 덮쳐오는 일상의 사태와 감정 속에서 우리는, 있는 힘껏 헤엄쳐야만 간신히 제자리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하물며 세상의 흐름을 역류해 원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고자 한다면 거의 영웅적인 노력이 필요한 지경이다.
생체 시계를 압도하는 세상의 어지러운 속도에 대응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묘사’를 하는 것이다.
묘사하는 행위는 텔레비전의 ‘느리게 다시 보기 화면’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당면한 사태로부터 안전거리를 확보해주고, 그 가장자리에 처한 나의 상태까지 파악할 여유를 준다.
주관적 시점으로 조율된 리얼리티는, 간혹 상상하지 못한 의미나 아름다움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보기’와 ‘쳐다보기’ 사이의 계곡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_빌헬름 사스날, 「무제」에서
그림 속 남자는 혼자다.
어쩌면 친구들과 어울린 술자리를 파한 후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한 병의 마개를 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독대했던 술병마저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남자는 마침내 완벽히 혼자가 되었다.
알코올은 육신을 마비시키고 의식을 펌프질한다는 속설을 확인하듯, 사내는 몸뚱이가 없고 머리만 있다.
주름이 고랑을 판 이마, 수염 그루터기가 까칠한 턱. 그의 얼굴에는 코도, 입도 없다.
커다랗게 열린 외눈만이 징그럽도록 부릅뜬 의식을 증명한다.”
-필립 거스톤, 「머리와 술병」에서
물끄러미,
그림 앞에서, 그 너머를 들여다보며
그림 뒤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겹쳐보며
감정의 수많은 결을 하나하나 쓰다듬어 감지하는,
김혜리 이미지 에세이
“내 안에 고인 물을 조용히 흔들었던,
때로 신경을 마비시키거나 불붙였던 그림들을
마음 속 화랑의 허랑한 빈 벽에 하나씩 걸었다.
한데 모아놓으면,
그들은 어쩌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내 ‘상상의 미술관’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림과의 인터뷰
김혜리는 말을 건다.
사람에게, 사물에게. 말을 건네기 전, 그녀는 대상을 세심하게 바라본다.
관찰하고 질문하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이면, 예컨대 대상의 그림자 너머까지 시선을 던진다.
그러고는 대상과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 인터뷰의 장엔 언제나 독자를 위한 자리가 마련돼 있다.
어렵사리 자신을 내보이며 진심으로 대상에게 다가가는 순간, 그녀는 항상 독자가 나란히 걸을 수 있도록 어깨 옆을 내준다.
김혜리와 동행하면, 그림 한 점을 둘러싼 이야기를 공감각적으로 감지해내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감정의 결을 하나하나 쓰다듬은 손길로 빚어낸 듯 유려하기 짝이 없는 그녀만의 감성과 문장에는 특출함이 있다.
그림 앞에서, 그림 뒤에서 우리가 느꼈던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알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김혜리의 문장을 통하면 흐릿하나마 피와 살을 얻게 된다.
그림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이, 실마리의 서두를 드러내는 것이다. 결
국, 이를 통해 우리는 정의할 수 없던 감정의 실체라는 해답을 찾게 된다.
김혜리의 독백과 방백이 점점이 흩어진 그림 앞의 고백은, 점묘화처럼 그렇게 뒤늦게, 조용히,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먼 고장과 이국 도시의 크고 작은 미술관들은 내가 주민인지 나그네인지 결코 묻지 않았다.
정문에 들어서서 표나 기부금을 내고 라커룸에 배낭을 맡기고 나면, 나는 인생의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고 가볍게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수첩 한 권을 쥐고 한나절을 그림이 걸린 방에서 방으로 소요했고, 생수 한 병으로 끼니를 족히 대신하며
남중했던 태양이 서쪽 창으로 서서히 저무는 광경을 전시실 벤치에 앉아 충만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_서문 中
“근본적으로 오늘날 한 인간이 본업과 취미를 따로 둘 만큼 풍부하게 살기란 불가능하다고 믿어온 내게
그림 보기의 즐거움은 귀족놀이에 가까운 무엇이었다.
끝내 내가 등록된 주소로부터 도망칠 수 없음을 알기에 더 달콤한 도피였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터다.
아,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게 사치를 열망하는가!
희고 중립적인 벽, 더위도 추위도 의식할 수 없는 적정 온도와 습도, 적당한 고요와 속삭임.
많은 현대 아티스트들이 갤러리라는 방습, 방취된 인공의 제도로부터 뛰쳐나오고자 몸부림쳐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평범한 한 관광객에게 미술관의 회랑은 평생 내게 달라붙어온 모든 조건,
불온하게도 시대와 국적까지를 잠시 잊게 하는 희귀한, 그래서 매혹적인 무중력 공간이었다.
그림 한 점 한 점이 독립된 장소였고 국가였다.”_서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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