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좋아하는 글, 생각나는 글

월훈 / 박용래

달처럼 2011. 12. 29. 23:46

월  훈  
                                                                                                                                                                                         박 용 래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콩깍지처럼 후미진 외딴집, 외딴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 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구마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 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박용래 - 1925년 충남 논산 출생. 1955년 《현대문학》에 시 「가을의 노래」가 추천되어 등단.

                   시집으로 『싸락눈』, 『강아지풀』, 『백발의 꽃대중』 등과 시전집 『먼바다』가 있음.

●  출전_ 『먼바다』(창비)

 

박용래, 「월훈」 (낭송 하성란)

 


박용래의 「월훈」을 배달하며


박용래 시인의 ‘강아지풀’을 기억하시나요? “다 두고 이슬단지만 들고간다 (…)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로 끝나는 애잔하고 슬픈 시. 산책 중에 강아지풀을 보게 되면 “오요요”라고 말해 보게 됩니다. ‘강아지풀’과 함께 제가 사랑한 시입니다. ‘월훈’은 달무리라는 뜻이지만, 뜻을 몰랐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한겨울 외딴 마을 고독한 노인의 저녁 즈음. 시인이 펼쳐놓는 단어들을 구절구절 귀 기울여 따라가다 보면, 말이 가진 아름다움이란 게 풍경을 고독히 오래 들여다본 이의 세심한 필사에 다름아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풍경을 낭비하며 사는가, 생각하게도 됩니다. “첩첩 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다고 할 때 ‘여기’는 어디일까요. 거기는 아마도 시인의 마음 속. 오랜 옛날이야기가 살아있는 따뜻하고 고독한 마음 저 깊은 곳의 마을. 2연과 3연을 거듭 읽어봅니다. 적절한 쉼표와 반복이 만드는 가없는 음악. 직설로 말하면 ‘독거노인’의 처량이 되겠으나, 시어의 가없는 음악 속에 독거하는 노인은 존재의 고독이 가진 어떤 품위랄지, 신비랄지 하는 것을 불러일으킵니다. 애잔하고 따스한 이런 환상성이 때로 저를 위로합니다. 오요요― 위로합니다.
                                                                                                                                                   문학집배원 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