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좋아하는 글, 생각나는 글

한양호일(漢陽好日) / 서정주

달처럼 2012. 5. 23. 23:37

열대여섯짜리 少年이 芍藥(작약)꽃을 한아름 自轉車뒤에다 실어끌고 李朝의 낡은 먹기와집 골목길을 지내가면서 軟鷄(연계)같은 소리로 꽃사라고 웨치오. 세계에서 제일 잘 물디려진 玉色의 공기 속에 그 소리의 脈이 담기오. 뒤에서 꽃을 찾는 아주머니가 白紙의 窓을 열고 꽃장수 꽃장수 일루와요 불러도 통 못알아듣고 꽃사려 꽃사려 少年은 그냥 열심히 웨치고만 가오. 먹기와집들이 다 끝나는 언덕위에 올라서선 芍藥꽃 앞자리에 넹큼 올라타서 방울을 울리며 내달아 가오.

―서정주(1915~2000)


 

 


 

 
열대여섯 살의 꽃이 이제 막 핀 꽃을 팔러 다닌다. 하마터면 자기까지를 사겠다고 덤비는 이도 있겠다. 나 같으면 그러고 싶을 게다. 꽃에 반해서 자기 신명 속을 가는 소년이여. 나의, 우리들의 영영 잃어버린 고향이여. 꽃을 팔아 이문을 남겨 돈을 벌게 생겼는가. 꽃에 반해 그저 싱글벙글 한시라도 행복하겠는가. 막 목청 트인 목소리로 꽃을 사라고는 외치나 그것은 호객일 수 없고 그저 그러한 가사의 신명 들린 노래였으니 그 소리에 반해서 창호지 창문 열고 부르는 아주머니의 표정도 꽃빛이었을 터.

실지로 이 소년은 꽃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양의 어느 골목의 풍경을 넉넉히 하기 위한 것이 제 일인 듯하다. 꽃 앞자리에 냉큼 앉아 내닫는 꽃 소년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과속이여. 나랑 자리를 바꿀까나. 먹기와집 위의 옥색 공기, 그 사이의 백색 창호문, 그리고 작약꽃의 그 진보라 내지 유백색의 꽃잎들, 이만한 색채면 저 색(色)의 마술사라는 앙리 마티스의 붓만 빌리면 되지 않겠나. 호일(好日)은 호일이다!

 

( 장석남·시인·한양여대 교수 )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 입력 : 2012.05.06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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