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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갔네 / 박남준

달처럼 2012. 5. 2. 13:54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 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짝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뻔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하다
그래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렜을 것이다
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둣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는 섬진강가 잔물결마저 눈부시구나
언젠가 이 강에 나와 하염없던 날이 있었다
흰빛과 분홍과 붉고 노란 봄날
잔인하구나
누가 나를 부르기는 하는 것이냐

 



― 「봄날은 갔네」 중에서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

 




봄비가 오는 아침


독자들에게



봄비가 오는 아침이었다. 전주 근교 지인의 집들이에 초대받아 차와 술로 차곡차곡 지난밤을 새웠던 터였다. 봄꽃들이 피어있었는데 먼저 일어나 처마 끝에 앉아 있던 선배가 중얼거렸다.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마루를 내려서다가 들은 그 소리에 나는 감전된 것처럼 멈칫거렸다.

 

지리산 자락 집으로 돌아오는 길 쌍계사로 가는 화개골짜기는 그야말로 벚꽃이 피어 꽃사태였다. 반짝이는 섬진강과 연둣빛을 휘날리는 버드나무와 하얀 꽃잎이 눈처럼 날리는 풍경 속을 걷다가 문득 나도 모르게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선배의 말투를 되뇌었다. 무언가 내 안을 스치고 가는 것이 있었다.

 

메모장을 꺼냈다. 벚꽃이 흐드러지는 꽃그늘 아래 앉아 받아쓰기를 시작했다. 그 선배의 내몰린 처지를 떠올렸다. 청춘의 언젠가 쑥부쟁이꽃이 피어난 섬진강길을 걷다가 하염없었던 날들과 이제는 반백의 머리가 되어버린 내 모습을 덧대어 그려 넣었다. 「봄날은 갔네」라는 시가 나왔다.

 

전주 한옥생활체험관 개관기념행사에서 처음 이 시를 낭송했다. 엿장수 가위와 반쯤 남은 소주병을 소도구로 사용하여 단순하게 낭송만이 아닌 퍼포먼스적인 시낭송을 하려고 시의 첫 행을 읊는데 앞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아니 아이들하고 같이 왔는데 무슨 시 낭송을 한다고 하면서 욕을 다 하느냐고 저런 것이 무슨 시냐고, 시도 아니다고” 아이를 데리고 나가버린다.

 

행사가 끝나고 뒤풀이를 하는데 여기저기서 깔깔거린다. 술상이 이렇게 푸짐하고 지랄이냐고, 안주는 자꾸 갖다 주고 지랄이냐고.

 

시가 아름다운 시어로만 쓰여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슬픔과 아름다움과 분노와 절망과 상처, 탄생과 죽음, 그리하여 시는 세상의 삶에 대한 노래인 것이다. 한 시인이 온 몸으로 밀고나가는 정신에 다름 아니다. 이 시에 나오는 한마디의 욕이 당신의 일상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어줄 수 있다면…….


박남준 올림

박남준
1957년 전남 법성포에서 태어났다. 1984년 시 전문지 『시인』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풀여치의 노래』,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적막』이 있고, 산문집으로 『작고 가벼워질 때까지』, 『꽃이 진다 꽃이 핀다』, 『박남준 산방 일기』 등이 있다.


 

출처 : 행복한 문학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