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 중간고사 기간에 국어교과 회의를 하면서 기말고사 때 답사를 떠나기로 의견을 모았다.
첫 번째 답사지는 양평 소나기마을로 정했다.
국어과 교과교실제 업무를 맡은 심 선생님이 경비 문제를 행정실과 의논하다가 공식 출장으로 처리하였다.
당연히 자비 부담 여행이거니 여겼는데, 출장비까지 받게 될 줄이야.
오전 근무를 마치고 학교 근처에서 콩나물국밥으로 요기를 하고 서둘러 출발했다.
양수리 두물머리를 지나 북한강을 끼고 양평군 서종면을 향한다.
문호리를 지나 수능리가 가까워지니 물이 노래하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소나기가 내리는 날에는 물안개가 피어나리라.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올린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한참 세수를 하고 나더니, 이번에는 물 속을 빤히 들여다 본다. 얼굴이라도 비추어 보는 것이리라. 갑자기 물을 움켜 낸다. 고기 새끼라도 지나가는 듯.
소녀는 소년이 개울둑에 앉아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날쌔게 물만 움켜 낸다. 그러나, 번번이 허탕이다. 그대로 재미있는 양, 자꾸 물만 움킨다. 어제처럼 개울을 건너는 사람이 있어야 길을 비킬모양이다.
그러다가 소녀가 물 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만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 '소나기'에서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는 물이 만남을 매개한다.
개울가에서 징검다리에 앉아 있던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며 시작된
소년 소녀의 풋풋한 사귐은
소나기로 인해 불어난 물을 건너며 추억을 만들고 그리움이 되더니
소설을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독자들에게 자신의 일인 양 애틋하게 기억된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한 주차장에서 문학관을 가려면 개울을 건너고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 한다.
그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에 앉아서 물을 움키며 소녀 흉내를 내 본다.
누군가 분홍 스웨터가 아니어서 아쉽다는 말을 하자 까르르 웃으며
다른 이가 남색 스커트였으면 더 좋았겠다고 응수한다.
국어 교사들이기에 소설 속의 구체적인 묘사까지 주거니 받거니 척척 통한다.
고개를 넘으니 길가에 흰둥이 석상이 있다.
소설 '목넘이 마을의 개'를 염두에 두고 조성한 고갯길이다.
언덕을 다 내려가 모퉁이를 돌아서니 소나기마을 정문이 보인다.
아니, 이 편한 진입로를 두고 그 고생을?
힘은 들었지만 일제 시대 남부여대하고 국경을 넘던 사람들이 지나가던 길목을 제대로 체험했다.
정문 안에 들어서서 중앙 광장 우측에 있는 황순원 문학관으로 향한다.
7월의 햇살은 따갑고 공기는 후텁지근하여 그늘로 들어서서 땀을 식히는 것이 급했다.
황순원 문학관은 소년 소녀가 소나기를 피했던 수숫단을 형상화하여 지붕이 원뿔 모양이다.
방명록에 흔적을 남기고 내부를 둘러 본다.
중앙홀에 전시된 황순원 문학제 수상 작품을 둘러 본다.
마타리꽃 사랑방이라는 문학카페는 다양한 문학체험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대형 서적 모양의 모니터를 터치하며 소설을 이어 쓸 수 있고,
서가에서 종이책을 골라 그 자리에서 읽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다.
책 모양의 대형 화면을 통해 영상 자료를 보여 주며,
원하는 책을 골라 들을 수 있는 오디오북 코너가 있다.
남폿불 영상실
'소나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재구성한 영상을 상영하는 곳이다.
옛날 책걸상이 놓인 교실에 앉아 영상을 보노라면
비오는 대목에서는 천장에서 실제로 물방울이 떨어지고
바람 부는 대목에서는 바람이 쌩하고 부는 4D 체험을 할 수 있다.
또박또박 손글씨로 쓴 시간표가 정겹다.
언제부턴가 신학기가 되면 각 대학에서 멋지게 인쇄된 시간표를 제작하여 교실에 붙여준다.
교실까지 파고드는 홍보 전쟁이다.
제2전시실은 작품별로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입체적으로 감상하는 공간이다.
소설 '별'이 디오라마로 설치되어 있다. 작은 틈으로 입체 조형을 보면 오디오로 줄거리가 나온다.
'독 짓는 늙은이'는 아내가 조수와 바람 나서 떠나고, 어린 아들마저 남의 집에 보낸 후,
독을 굽는 가마 속에 들어가 앉은 노인을 재현했다.
'학'은 한국전쟁 때 치안 대원에게 체포된 단짝 친구 덕재를 성삼이가 책임자가 되어 호송하는 이야기이다.
성삼은 호송 도중 덕재에게 공산주의 이념이 없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 병환으로 피난 가지 못하고 마을에 남아 있다가 빈농 이라는 이유로 농민동맹 감투를 썼을 뿐이다.
마침 학을 발견한 성삼은 학사냥을 제안한다.
둘은 어린 시절 사냥꾼을 피해 학을 풀어 주었던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덕재는 자기를 쏘려는 것으로 의심하다가 성삼의 의중을 눈치채고 풀섶으로 몸을 숨기고 달아난다.
학창시절에 읽은 '카인의 후예'. 박훈과 오작녀의 사랑이 오래 뇌리에 남아 있었다.
해방 직후 북한 사회는 토지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지주의 토지를 무상몰수하고 지주를 적대시하도록 소작인을 충동질한다.
박훈 집안의 마름으로 토지를 관리하던 도섭 영감도 배신하고 만다.
다만 도섭 영감의 딸 오작녀의 기지로 훈은 인민재판에서 살아남고,
분노한 도섭 영감이 훈을 낫으로 해치려 할 때,
영감의 아들 삼득이가 박훈 대신 낫에 찔려 피 흘리며
어서 도망가라고, 자기 누이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제목 '카인의 후예' 가 암시하듯 비극적이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이다.
동족에게 증오를 부추기는 것이 인간의 비열한 본성이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겪은 젊은이들의 정신적 방황과 갈등을 그린 '나무들 비탈에 서다'
아, '소나기'
국립극장과 김천시가 '소나기'를 뮤지컬로 제작하여 2012년 7월 무대에 올린다는 소식이다.
문학 작품의 창조적 수용의 좋은 예가 되기를 기대한다.
다른 전시실에서 작가의 문학세계를 만난다.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평양 오산중학교와 숭실중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1931년 시 '나의 꿈', '아들아 무서워 말라'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출발하여
1934년 단편집 '늪'을 간행한 이후 소설 창작에 주력했다.
경희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많은 문인을 길러냈다.
글은 구도의 방법이니라. 황순원 작가가 방명록에 남긴 글씨
육필 원고
작가의 집필실 모습과 유품들
병풍에는 작가의 작품 제목이 적혀 있다.
201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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