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시인 시모음]
우리 살던 옛집 지붕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
강이 그리울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강이나 바다의 높이로 그 옛집 푸른 지붕은 역시 반짝여 주곤 했다
가령 내가 어떤 힘으로 버림받고
버림받음으로 해서 아니다 아니다
이러는게 아니었다 울고 있을 때
나는 빈집을 흘러나오는 음악 같은
기억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에는
우리가 울면서 이름붙여 준 울음 우는
별로 가득하고
땅에 묻어주고 싶었던 하늘
우리 살던 옛집 지붕 근처까지
올라온 나무들은 바람이 불면
무거워진 나뭇잎을 흔들며 기뻐하고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그해의 나이테를
아주 둥글게 그렸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 위를 흘러
지나가는 별의 강줄기는
오늘밤이 지나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 집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천장을 바라보며 죽을 수 없었다
우리는 코피가 흐르도록 사랑하고
코피가 멈출 때까지 사랑하였다
바다가 아주 멀리 있었으므로
바다 쪽 그 집 벽을 허물어 바다를 쌓았고
강이 멀리 흘러나갔으므로
우리의 살을 베어내 나뭇잎처럼
강의 환한 입구로 띄우던 시절
별의 강줄기 별의
어두운 바다로 흘러가 사라지는 새벽
그 시절은 내가 죽어
어떤 전생으로 떠돌 것인가
알 수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집을 떠나면서
문에다 박은 커다란 못이 자라나
집 주위의 나무들을 못박고
하늘의 별에다 못질을 하고
내 살던 옛집을 생각할 때마다
그 집과 나는 서로 허물어지는지도 모른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죽음 쪽으로 허물어지고
나는 사랑 쪽에서 무너져 나오고
알 수 없다
내가 바다나 강물을 내려다보며 죽어도
어느 밝은 별에서 밧줄 같은 손이
내려와 나를 번쩍
번쩍 들어올릴는지
마음의 오지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내 젖은 구두를 해에게 보여 줄 때
그는 두꺼운 그늘로 옷을 짓는다
아침에 내가 입고 햇빛의 문 안으로 들어설 때 해가 바라보는
나의 초록빛 옷은 그가 만들어준 것이다 나의 커다란 옷은
주머니가 작다
그는 나보다 옷부터 미리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내가 아닌 그 누가 생겨났다 하더라도 그는
서슴치 않고 이 초록빛 옷을 입히며 말 한 마디 없이
아침에는 햇빛의 문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저녁에 나의 초록빛 옷은 바래진다
그러면 나는 초록빛 옷을 저무는 해에게 보여주는데
그는 소리없이 햇빛의 문을 잠궈 버린다
어두운 곳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것들은 나를 좋아하는 경우가 드물고
설령 있다고 해도 나의 초록빛 옷에서
이상한 빛이 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나의 초록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의 섬유로 옷을 만든다
그는 커다란 그늘 위에서 산다
그는 말이 없다
그는 나보다 먼저 옷을 지어 놓았다 그렇다고
나를 기다린 것도 아니어서
나의 초록빛 옷은 주머니가 작으며
아주 무겁다
극히 드문 일이지만 어떤 이들은 나의 이상한
눈빛은 초록빛 옷에서 기인한다고도 말하고
눈빛이 초록빛이라고도 말하는데
나와 오래 이야기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두꺼운 그늘을 먹고 산다
그는 무거운 그늘과 잠들고
아침마다 햇빛의 문을 열며 나에게 초록빛 옷을
입힌다 아침마다 그는
나는 그를 모른다
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그늘이 많은 사람 나는 지금 그의 곁에 없지만
노우트 겉장의 글씨처럼 아직도 나는
그의 이름을 천천히 쓰고 천천히 읽는다
오후 세 시의 사랑은 오후 세 시에 끝나고
더운 물에 손을 씻는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이라도 읽을까
눈을 들어
강변으로 나있는 송전선보다 빨리
나는 저녁의 그 집에 닿고 있다
그림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걸음걸이로 그는 집으로 돌아온다
찻잔이나 옷걸이에는 일부러 먼지를 묻혀놓고
상류의 폭우를 이야기하지만 아직 그는
그림 속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가방 속에서 오래된 무관심을
꺼내 놓는다
여름 휴가
여름의 휴가
나는 그를 아직 알 수 없다
해바라기가 많은 그 집으로 이사를 하지요
그럼 당신의 아이를 서른 명 낳아 주겠어요
서른 명 서른 살
그는 나를 모른다 플라타너스보다
낙엽을 많이 만들어내는 사람
그는 그림 속에서 잠자고
그림 속에서 식사를 한다
그때 서른 살이 언덕 너머 멀리에 있을 때 그때
나는 왜 그곳을 지나갔을까
해바라기 씨앗이라도 사올까
씨앗만이라도
오후 세 시 전화로 끝나버리는 사랑
나는 순결한 사각형으로 남아 있고
그의 여름 휴가는 어디에 가 있을까
강변으로 나있는 의자에는 먼지가 쌓여 있다
서른 살
그는 아직 나를 모르고 해바라기는 불을 끈다
나는 이미 서른 살인 것이다
거울
모든 빛을 통과시키기 때문에
유리창은 늘 차갑다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아서
거울은 모든것을 되비춘다
유리의 막힌 한쪽
거울의 뒤쪽
거울은 따뜻하지 않다
내 살아온 날들은
내 죽음이 함께 살아온 날들
이렇게 살아 있음의 뒤편이
바로 나의 죽음
거울의 배면
내가 죽어야 내 죽음도 죽는다
저물녘에 중얼거리다
우체국이 사라지면 사랑은
없어질 거야, 아마 이런 저물녘에
무관심해지다보면 눈물의 그 집도
무너져버릴 거야, 사람들이
그리움이라고, 저마다, 무시로
숨어드는, 텅 빈 저 푸르름의 시간
봄날, 오랫동안 잊고 있던 주소가
갑자기 떠오를 때처럼, 뻐꾸기 울음에
새파랗게 뜯기곤 하던 산들이
불켜지는 집들을 사타구니에 안는다고
중얼거린다, 봄밤
쓸쓸함도 이렇게 더워지는데
편지로, 그 주소로 내야 할 길
드물다, 아니 사라만진다
노을빛이 우체통을 오래 문지른다
그 안의 소식들 따뜻할 것이었다
푸른곰팡이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화전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어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노독(路毒)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문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리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농담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한다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길에 관한 독서
1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
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
이름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
2
밤에 길은 길어진다
가끔 길 밖으로 내려서서
불과 빛의 차이를 생각다 보면
이렇게 아득한 곳에서 어둔 이마로 받는
별빛 더이상 차갑지 않다
얼마나 뜨거워져야 불은 스스로 밝은 빛이 되는 것일까
3
길은 언제나 없던 문을 만든다
그리움이나 부끄러움은 아무 데서나 정거장의 푯말을 세우고
다시 펴보는 지도, 지도에는 사람이 표시되어 있지 않다
4
가지 않은 길은 잊어버리자
사람이 가지 않는 한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의 속력은 오직 사람의 속력이다
줄지어 가는 길은 여간해서 기쁘지 않다
마음의 지도
몸에서 나간 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데 벌써 내 주소 잊었는가 잃었는가
그 길 따라 함께 떠난 더운 사랑들
그러니까 내 몸은 그대 안에 들지 못했더랬구나
내 마음 그러니까 그대 몸 껴안지 못했더랬었구나
그대에게 가는 길에 철철 석유 뿌려놓고
내가 붙여댔던 불길들 그 불의 길들
그러니까 다 다른 곳으로 달려갔더랬구나
연기만 그러니까 매캐했던 것이구나
거미줄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모든 눈물은 모든 뿌리로 모두 간다
혼자 눈물은 두 손에 받는다
손은 단지다
손은 깊어지고 싶어 운다
두 손은 또 울면서 길어져서
뿌리에 가서 닿고 싶어한다
몸이, 몸이 되고 싶어한다
손의 절망은 자기 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러나
손은 거개가 타인이다
무시로 손은 타인을 향한다
내 손은 내가 아닐 때가
많다, 너무 많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손이다
대중소비사회는 손에 달려 있다
손을 잘 간수해야 한다고
두 손 둘데를 시시각각
결정해야 몸이, 몸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 지독하게 외로워진 것이다
손이 내 몸 거죽을 긁는다
뿌리의 손들이 붉은 꽃 게워낸다
도보 순례자
나 이제 돌아가리라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지리라
지그시 눈감으며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깡그리 무시하리라
그리하여 나 돌아가리라
등한시했던 몸의 변두리를 찾아
두 발에게 두 손에게 머리 숙이리라
때와 장소를 자백하고
20세기에 태어난 그 어린 이름들도 불리라
하여 나 어서 몸이리라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반응하리라
맛에 겸손하고
촉감에 민첩하며
육감에 충실하리라
나 몸이리라
오로지 몸으로 더운 몸이리라
그리하여 낯선 나
나에게로 돌아가리라
민들레앞정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
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
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
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
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
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
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낙타의 꿈
그가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내가 물을 버렸을 때
물은 울며 빛을 잃었다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어두워지는 저녁 그는
나를 데리러 왔다 자욱한 노을을 헤치고
헤치고 오는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길이 되어 나는 그 길의 마지막에서
그의 잔등이 되었다
오랫동안 그리워해야 할 많은 것들을 버리고
깊은 눈으로 푸른 나무들 사이의
마을을 바라보는 동안 그는 손을 흔들었다
나는 이미 사막의 입구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길의 일부가 내 길의
전부가 되었다
그가 거느리던 나라의 경제는 사방의 지평선이므로
내가 그를 싣고 걸어가는 모래언덕은
언제나 처음이었다
모래의 지붕에서 만나는 무수한 아침과 저녁을 건너는
그 다음의 아침과 태양
애초에 그가 나에게서 원한 것은 그가
사용할 만큼의 물이었으므로 나는 늘
물의 모습을 하고 그의 명령에 따랐다
햇빛이 떨어지는 속도와 똑같이 별이
내려오고 별이 내려오는 힘으로 물은 모래의
뿌리로 스며들었다
그의 이마는 하늘의 말로 가득가득
빛나고 빛나는 만큼 목말라했고
그때마다 나는 물이 고여있는 모래의
뿌리를 들추어 내 몸 속에 물을
간직했다
해가 뜨면 모래를 제외하고는 전부 해
바람불면 모래와 함께 전부 바람인 곳
나는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그의 마른 얼굴을 씻어주었다
그가 나를 사랑하였을 때
나는 많은 물을 거느렸다
그가 하늘과 교신하고 있을 때
나는 모래들이 이루는 음악을 들었다
그림자 없는 많은 나무들이 있고
그의 아래에서 바라보는 세계는
늘 지나가고 그 나무들 사이로 바람 불고
바람에 흐느끼는 우거진 식물과 식물을
사랑하는 짐승들이 생겨나고
내 잔등 위에서 움직이는 그가
그 모든 것을 다스려 죽을 것은 죽게 하고
죽은 자리마다 그 모습을 닮은
나무나 짐승을 세워놓고 지나간다
도중에 그는 몇번이나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시고 몸을 청결히 했다
모래언덕이 메아리를 만들어 멀리
멀리로 울려퍼지게 하는 그의 노래
그가 드디어 사막을
바다로 바꾸었을 때
나는 바다의 환한 입구에서
홀로 늙어가기 시작했다
출렁출렁 바다 위에서 그를 섬기고 싶었지만
그는 뚜벅뚜벅 바다 위를 걸어나갔다
오랜 세월이 흘러가고
또한 훌러와
사막이 아닌 곳에서 그를 섬기는 일이
사막으로 들어가는 일로 변하고
바다가 다시 사막으로 바뀌어
바다의 입구에서 내가 작은 배가 되지 못하고
종일토록 외롭고
밤새도록 쓸쓸한 나날
그가 나를 떠났을 때
나는 물을 버렸다
버리고 버리는 일도 다시 버리고
나도 남지 않았을 때
저녁 나무들 사이로 태양을 버리고
물의 어두운 어깨를 바다로 띄워 보냈다
이문재
1959년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현재 계간 <문학동네> 편집 주간으로 활동
■ 작가 이야기
어슬렁거릴 줄 아는 자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시
이문재는 '도보 고행승'을 꼭 빼어 닮은 시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사막이나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고행승의 선(禪)적인 포즈를 흉내내지 않는다. 또한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는 방랑시인의 음풍농월을 따라 부르는 법도 없다. 오히려 그는 느슨한 산책을 좀처럼 허가하지 않는 도심의 한복판을 걸으며 현실의 풍경을 세세히 돌아 본다. 그래서 그의 시는 대부분 어슬렁거릴 줄 아는 자의 여유에서 비롯된다. 속도와 능률이 지배하는 현대적 삶의 중심에서 그의 시적 모반의 전략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는 도시를 다음처럼 규정한다. "느림보는/가장 큰 죄인으로 몰립니다/게으름을 피우거나 혼자 있으려 하다간/도시에게 당하고 말지요/이 도시는 산책의 거대한 묘지입니다"('마지막 느림보 ―散策詩 3'). 이러한 의식의 배경에는 빠른 것이 미덕이 된 우리 사회의 숨가쁨과 헐떡거림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반석(盤石)으로 깔려 있다. 발전을 위한 발전, 그 무한 질주의 급류 속에선 누구나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기 마련이다. 삶의 중요한 가치들은 이런 광(光/狂)적인 스피드에 휘말려 그 흔적을 감추기 십상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런 속도 숭배의 폐해와 위험성에 제동을 걸고, "게으른 사람은 힘이 세다/아프도록 게을러져야 한다//…/게으른 사람만이 볼 수 있다"('게으른 사람은 아름답다')고 당당히 말한다. 전진만 있고 역진(逆進)이 허락되지 않는 사회, 그 직핍한 세상을 천천히 에둘러가며 속도의 에스터시에 파묻혀 있던 삶의 진실과 실상을 찬찬히 끄집어낸다. 우리들은 지금 아주 아주 바쁘게, 지나치게 조급하게, 너무나도 조바심치며 앞으로, 앞으로만 줄달음질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시인의 말대로 '경부고속도로'에서 초고속 '정보고속도로'로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지 않은가. 어디 한 곳, 오랫동안 편안하게 눈맞춤 할 곳이 없다. 모든 것이 변화면서 질주한다. 지속이 없다. 순간적으로 지지고 볶는다. 식은 땀을 흘리며 이리 저리 뛴다.
그래서 "깜빡거리는 것들은, 위험하다/엘리베이터 표시등, 병원 약국의 번호판/횡단보도 신호등, 카드공중전화의/액정화면, 컴퓨터 커셔……/이것들이 무시로 깜빡거리며/기다림, 기다림인 것을 변질시켜버린다"('저 깜빡이는 것들'). 실로 끔찍한 세상이다. 우리가 이문재 시인의 조금은 헐겁고 느슨한 사색의 소롯길을 그리워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다림'의 시학과 '느림'의 미학으로 구축된 그의 시의 풍요로움이 가만히, 여유 있는 보폭으로 다가온다.
(류신/문학평론가)
■ 대표작
『산책시편』 | 민음사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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