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가족과 함께

바우회 영주 여행 3. 부석사

달처럼 2012. 10. 22. 22:37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화엄의 가르침을 펴던 사찰이다.

 

 

노랗게 물들어 가는 은행나무 사이에 일주문이 보인다.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천왕문을 지나 돌길 왼편에 우뚝 선 당간지주.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당, 즉 깃발을 달아두는 돌기둥으로 창건 당시인 신라 시대 유물.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는 그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서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당간지주 중 가장 늘씬한 몸매의 세련미를 보여 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라며,

' 위로 갈수록 약간 좁혀간 체감률, 끝마무리를 꽃잎처럼 공글린 섬세성,

몸체에 돋을새김의 띠를 설정하여 수직의 상승감을 유도한 조형적 계산'을 높이 평가했다.

 

 

 

 

범종루

 

 

안양루

 

 

 

안양루 너머로 펼쳐진 태백산맥 줄기가 부석사의 장대한 정원이다.

 

 

안양루 앞에서 무량수전을 바라보며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등 중 가장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조각 솜씨를 보여준다.

 

 

아, 무량수전이여!

고려 정종 9년(1043년) 원융국사가 부석사를 중창할 때 지은 것으로 창건 연대가 확인된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주심포, 훤칠하게 뻗은 배흘림기둥...

수많은 건축사가와 미술사가들이 극찬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물이다.

 

 

무량수전 좌측으로 돌아가면 이 절의 창건 설화를 간직한 부석(浮石)이 있다.

아래 위가 붙지 않고 떠 있다 하여 뜬돌, 부석이라 한다.

 

'의상이 중국에 유학할 당시 한 신도 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의 선묘라는 딸이 의상에게 반했으나 의상의 마음을 열지 못하자

세세생생에 스님께 귀명하여 스님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소원을 말한다.

의상이 귀국길에 그 신도 집에 들러 사의를 표하고 배에 올랐는데,

나중에 의상이 떠났다는 말을 들은 선묘는 용이 되어 저 배를 무사히 귀국하게 하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진다.

의상이 귀국 후 이곳에 절을 지으려 하니 邪敎의 무리 500이 자리잡고 있었다.

항상 의상을 따르던 선묘는 허공중에 사방 1리나 되는 큰 바위가 되어 사교 무리들의 가람 위로 떨어질까말까 하는 모양으로 떠 있었다.

사교무리들은 이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고 의상은 이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했다.'

(송나라 찬녕, '송고승전'.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재인용)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부석사 삼층석탑 쌍탑 중 동탑

 

 

부석사 주차장 근처 인공 연못에 서려 있는 무지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