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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당, 자주동샘, 청룡사, 정업원 (서울로 떠나는 휴가 #2 -2)

달처럼 2013. 8. 12. 09:47

5. 이수광의 비우당(庇雨堂) 단종비 정순왕후의 자주동천(紫芝洞泉)

 

 

비우당(庇雨堂)

 

비우당은 원래 조선 태조 때부터 세종까지 4대 35년간 정승을 지낸 유관(柳寬)의 집터였다.

유관 대감의 집은 정승답지 않게 동대문 밖 지봉(芝峰) 아래 작은 초가였다고 한다.

어느 날 비가 내리니 방에 비가 줄줄 샜다.

대감은 우산을 쓰고 비를 막으면서 그 아내를 보고 하는 말이

‘우산도 없는 집은 이 비를 어찌 막을고?’였다.

그런데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유 대감 부인이 빙긋이 웃었다고 한다.

 

창신역으로 가는 골목 이름 중에 ‘우산각길’이 있다.

비우당과 유관 선생을 떠올린 이름이다.

  

훗날 유관이 살던 집터에 그의 4대 외손인 이희검(李希儉, 1516~1579)이 살게 되었다.

그는 태종의 아들 경녕군(敬寧君)의 현손(玄孫)으로 성품이 고결하고 도량이 넓었다.

그는 승지, 호조․병조․형조판서와 장단부사 등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청빈하게 살았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집을 이희검의 아들 이수광이 복원하어, 당호를 ‘비우당’이라 하였다.

'비우당(庇雨堂)'은 '겨우 비나 피할 수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수광은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는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렸다.

 

이수광은 비우당에 은거하면서 '지봉유설'(1614년)을 편찬했다.

세 차례에 걸친 명나라 사행 경험과 평생 수집한 국내외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이 책은 천문, 지리, 역사, 정치, 경제, 인물, 시문, 언어, 복식, 동식물 등 방대한 주제를 3,435 항목으로 망라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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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광은 전주 이씨 왕족 출신으로 태어났지만, 실력으로 입신양명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편당 짓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권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벼슬살이 44년 동안 여러 차례 변란을 겪었음에도 흠결이 없어 칭찬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실록 편찬자가 평한 것으로 보아 지성과 함께 인품도 갖춘 훌륭한 인물이었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수광의 집안이 벼슬을 하기 시작한 것은 부친인 이희검(李希儉·1516∼1579) 때부터다. 이희검은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호조·병조·형조 판서를 지냈으나 청백리로 더 유명했다. 그의 모친 유씨 부인도 세종대 청백리 정승 유관(柳寬·1346∼1433)의 후손이다.

 

이수광은 외가와 인연이 많다. 동대문 밖 지금의 창신동에 유관의 집이 있었다. 비만 오면 물이 새는 초가집이었다. 비가 오면 유관이 우산을 들고 비를 막았다고 하여 ‘비우당(庇雨堂·겨우 비나 피할 수 있는 집)’이라고 하였다. 유씨 부인이 유관의 후손이었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이희검은 이 집에서 살았다.

 

이수광은 유년시절엔 외가인 ‘비우당’에서 살았다. 이수광의 호인 ‘지봉(芝峯)’은 비우당 뒷산 봉우리였다. 어린 시절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란 이수광은 16세에 초시(初試) 합격을 시작으로 20세에 진사시를 거쳐, 23세에 대망의 문과 시험에 합격했다. 벼슬길에 들어선 이후로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승문원을 시작으로 예문관·성균관·사헌부·사간원 등 요직을 거쳐 28세의 나이에 병조좌랑이 되고 문장력을 인정받아 임금의 교서를 짓는 지제교(知製敎)를 겸직하였다. 조선시대 문관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은 셈이다.

 

그는 명나라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접하였고 이때의 기록을 토대로 ‘지봉유설’을 집필하고, 서학을 국내에 소개하고 실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선조 대에는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광해군 대에는 뜻이 맞지 않았으며, 1614년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하는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비우당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지봉유설’은 비우당에 은퇴한 지 1년만인 1614년(광해군 6년)에 완성된 것이다.

 

그는 중국에 여러 차례 다녀오는 기회를 맞았는데 이때 중국에서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국내에 처음으로 가지고 와서 ‘지봉유설’을 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20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에는 천문·지리·역사·정치·경제·인물·시문·언어·복식·동식물 등 방대한 주제를 바탕으로 3435항목에 달하는 사전적 지식이 망라되어 있다. 최초의 백과사전적 저술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되지만 등장하는 이름만 2265명에 달하는 실로 방대한 책이다.

 

시인이나 학자나 문장가에겐 항상 역경이 그로 하여금 후세에 남는 책을 쓰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도 예외는 아니다.

 

“꿈에서 깨어나니 하늘엔 외기러기/ 아픈 몸에 찬 기운 세월을 느끼네./ 가을 바람엔 언제나 오동잎 날리고/ 옥 이슬은 소리없이 계화(桂花)를 적시네./ 사람들과 운수에 가려 아득한 가을/ 달빛 아래 집집마다 다듬이 소리/ 이 가을에 내 마음 한없이 스산하여/ 한가롭게 창 앞에서 차를 달이네.”

 

“약(藥)화로와 차(茶)솥은 한가롭게 살려는 뜻이고/ 잎이 다 떨어진 뜰은 해 기울어 신시(申時)라네.”

 

“종일 닫힌 문 찾는 이 없고/ 은자의 삶은 시골 중과 같네./ 술잔 기울이고 시 읊으면 수심 없어지고/ 아플 때 차 마시면 잠마저 달아나네./ 봄비에 기왓골 울리는 소리/ 새벽바람은 힘없는 꽃을 떨어뜨리네./ 한가한 틈내서 벗을 찾지만/ 남은 쓸쓸함을 채우지 못하네.”

 

‘지봉유설’에는 ‘조완벽전’(趙完璧傳)이라는 개인의 전기가 실려 있다. 정유재란 때 일본에 끌려간 그는 노예생활을 하던 중 한문을 읽을 줄 안다는 이유로 일본인 무역 상인에게 팔려, 베트남 무역을 독점하던 주인의 배를 타고 조선인 최초로 베트남에 가게 된 인물이다. 그는 나중에 고국에 돌아오게 되는데 그를 통해 베트남에서 이수광의 시가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이야기인 즉 이수광은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안남(베트남) 사신 풍극관(馮克寬)을 만나 옥하관(조선 사신들의 숙소)에서 50여일간 함께 머물며 시를 주거니 받거니 했는데 이때 지은 시가 베트남에 소개되었던 것.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살았던 이수광은 조선인이 아니라 당시 세계인이었다. ‘지봉유설’에는 유럽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천주실의 이외에도 1602년에 마테오리치가 만든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가 이듬해 조선에 전해졌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있다. 둥근 구형의 지구에 5대륙을 그린 ‘곤여만국전도’는 동아시아의 세계관을 바꿔 놓은 세계지도였다.

 

조선의 선비들은 중국을 왕래하면서 서구의 문물을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나중에 실학으로 집대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비우당 뒤쪽에 있는  '자주동천(紫之洞泉)'

 

 

 단종대왕의 비(妃) 정순왕후(定純王后) 송(宋)씨가 폐서인이 되어

이 샘에서 시비(侍婢)들과 옷감에 물을 들여 그 삯으로 삶을 이어갔다.

 

 

곧 이 샘물로 빨면 옷감이 자주색으로 염색된다 하여 이 일대를 자줏골 또는 자주동이라 하였다.
  단종의 비 송씨(정순왕후)는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애절하게 기다리며

정업원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명주로 댕기․저고리 깃․옷고름․끝동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청룡사에서 300여 m 떨어진 화강암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명주를 빨았더니 자주색 물이 들었다는 것이다.
  당시 자줏물이 든 명주를 널어 말리던 바위에는 ‘紫芝洞泉’이라고 새겨져 있다.

자지(紫芝)란 자줏빛을 띄는 풀이름을 말한다.

 

 

비우당 옛터 표지석

 

  “나의 집은 흥인문 밖 낙봉(駱峰) 동쪽에 있다. 적산(啇山)의 한 자락이 남으로 뻗어 고개를 숙인 듯 지봉(芝峰)이 있고, 그 위에 수십명이 앉을 만한 넓은 바위와 10여 그루의 소나무가 비스듬이 있다. 누봉정(樓鳳亭) 아래 백여 묘의 동원(東園)이 그윽하게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 청백(淸白)으로 이름을 떨친 유관(柳寬) 정승이 초가삼간을 짓고 사셨다. 비가 오면 우산으로 빗물을 피하고 살았다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 온다. 이 분이 나의 외가 5대 할아버님이다. 아버님이 이 집을 조금 넓혔는데, 집이 소박하다고 누가 말하면 우산에 비하여 너무 사치스럽다고 대답하여 듣는 이들이 감복하였다.  나는 이 집을 보전하지 못하고 임진왜란에 없어진 이 집터에 조그만 집을 짓고 비우당(庇雨堂)이라고 하였다. 비바람을 겨우 막겠다는 뜻이다. 우산을 받고 살아오신 조상의 유풍(遺風)을 이어 간다는 뜻도 그 속에 담겨 있다.”

이수광, 「동원비우당기(東園庇雨堂記)」


 

 

비우당 옆에 단종의 넋을 기리는 ‘원각사’라는 절이 있다.

 

6. 청룡사, 정업원

 

 

청룡사

단종이 폐위 된 후 궁궐에서 나온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머무르던 절.

 

정순왕후 송씨는 15세 되던 1454년 1월 22일 한 살 나이 어린 단종과 혼인하였다.

자나 세손이 아닌 정식 왕과 결혼한 최초의 왕비인 것이다.

그 이듬해인 1455년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니 단종은 노산군으로,

왕비는 군부인(郡夫人: 종친의 처. 정1품 또는 종1품)으로 강등돼 궁궐을 떠났다.

그 후 그녀가 일생을 보낸 곳이 이곳 창신동 산골짜기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나자 정순왕후는 여기서 단종이 있는 동쪽을 바라보며 안녕을 빌었다.

단종이 죽은 후 정순왕후는 매일 조석으로 큰 바위에 올라 단종의 명복을 빌었는데,

1521년(중종 12)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변함없었다. 

훗날 영조는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를 써서 그곳 바위에 새기게 했는데,

그 바위는 일제 때 채석장으로 쓰이면서 없어졌다고 한다.

최근 서울시는 동망봉 남쪽에 '동망정'이라는 이름의 정자를 지었다.

 

 

청룡사는 비구니 사찰답게 단아하다.

 

 

 

연륜이 묻어나는 당우를 향나무가 살짝 가려 그윽하다.

 

 

우화루(雨花樓)

석가모니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꽃비가 내렸다고 하여

불가에서는 설법하는 곳에 이 이름을 쓴다

단종이 귀양길에 오르며 청룡사에 들러 우화루에서 왕비와 마지막 밤을 보냈다.

 

 

우화루 처마 아래에서 비구니 스님이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들려 준다.

두 분이 마지막 이별하는 그날도 꽃비가 내렸다고.

 

비 내리는 우화루를 바라보며 '雨花'를 나름대로 새겨본다.

'꽃비가 내리는 누각' 대신에

'비가 꽃처럼 내리는 누각'이라고.

 

여름 비가 차분하게 내려 꽃처럼 마음을 울린다.

 

 

심검당

 

 

정업원 옛터

정업원은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가 궁에서 물어난 뒤 평생을 살던 곳이다.

훗날 영조가 1771년(영조 47)에 절 내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비석을 세운다.

'정업원 옛터 신묘년 9월 6일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

이 때부터 절 이름을 정업원이라고 불렀다.

절 이름은 조선 후기에 다시 청룡사로 바뀌었다.

현판에 "前峰後巖於千萬年(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 글귀가 선명하다.

앞산 동망봉과 뒷바위 자주동샘에 얽힌 이야기는 두고 두고 전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