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서울시는 '근현대 유산의 미래 유산화 기본 구상'을 발표했다. 20세기 서양 문물 유입 시기부터 2000년까지 서울의 역사, 문화, 생활, 경제 성장과 연관 있는 근현대 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 활용하겠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구로공단과 창신동의 봉제공장, 백사마을, 장수마을, 구룡마을 등이 포함되었다.
종로구 창신동은 동대문 의류시장의 배후 생산기지로 3,000여 개의 봉제공장이 밀집된 노동자들의 삶의 현장이다. 창신동 달동네에 미로 같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작은 집들이 바로 동대문의 의류 산업을 지탱하는 산실이다.
원래 창신동은 복숭아와 앵두나무가 우거진 과수원이 많던 지역이다. 붉은 열매가 많아 '홍숫골'이라고 불리던 이곳은 1914년 한성부의 관청이던 인창방과 숭신방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창신동이라 명명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역과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한 채석장으로 사용되면서 산이 깎여 가파른 경사길과 절벽이 생겨났다. 거기에 화려한 서울의 꿈을 좇아 모여든 직공들이 모여들었고, 근처에 동대문버스터미널이 생기자 이 언덕 동네에는 하룻밤을 지낼 사람들을 위한 쪽방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1980년대 초반부터 평화시장의 봉제공장들은 극단적인 저임금 장시간 노동체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임대료가 저렴한 창신동으로 후퇴했다.
창신동에는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수광이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 '지봉유설'을 집필한 '비우당' 터가 있으며,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가 염색일을 하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던 '자주동천', 왕비가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영월을 향해 단종의 명복을 빌던 '동망봉' 터, 왕비가 머물던 '청룡사'가 있어 지나간 역사를 전한다.
1. 창신동 봉제 공장
동묘역 9번 출구로 나와 '낙산냉면' 길로 접어들어 아파트 단지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봉제 공장이 밀집된 골목이 나타난다.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옷을 만드는 과정은 과히 속도전이다.
아침에 동대문시장에서 재단 공장으로 디자인과 주문서를 보내면
재단 공장에서 마름질된 원단이 오토바이에 실려 봉제공장으로 이동해 옷의 형태를 갖추고,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단추나 지퍼 등 부속을 전문으로 하는 공장으로 가서 저녁이면 완제품이 나온다.
"미싱"은 영어 "소잉 머신"에서 온 말로 일본사람들이 소잉을 떼어버린 후
"머신" 발음이 안되다보니 "미싱"이라 한 것을
우리가 들여다가 "재봉틀"의 뜻으로 쓰고 있는 말이다.
점포마다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다.
좁고 가파른 골목에 오토바이만한 기동성이 또 있겠는가?
안양암
1889년 성월대사(性月大師)가 창건하였으며, 조선시대 후기의 전각과 불화, 불상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2004년 5월 3일 사찰 전체가 한국불교미술박물관 별관 사찰박물관으로 서울시에 등록되었다.
안양암 마애관음보살좌상(安養庵 磨崖觀音菩薩像), 아미타괘불도(阿彌陀掛佛圖), 안양암 지장시왕괘불도(安養庵 地藏十王掛佛圖)등
서울특별시 지정 유형문화재 7점과 문화재자료12점을 소장하고 있다.
'왁끼'는 '겨드랑이 두 줄 박음질'을 가리키는 용어
어느 작은 건물의 쪽문에 붙은 '객공' '하청' 등의 문구에서 이곳의 열악한 현실을 짐작한다.
가내수공업 규모의 작은 작업장에서 또 하청을 주다니...
'객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옷 한장을 마무리하고 한 장당 얼마씩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곳곳에 붙어 있는 간판마다 생소한 단어들이 가득하다.
'기계일, 또또, 큐큐, 고인찌, 시야게, 왁끼, 구찌 ......'
모두 봉제 공정에서 사용하는 용어란다.
시장에 붙은 현수막에서 봉제공장 지역임을 실감한다.
고된 봉제 작업에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종사한다고 한다.
전태일재단 사무실 앞에 있는 국제교회
전태일 재단
청년 전태일이 청계천 평화시장 피복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환경을 개선해 달라고 희생한 지가 30년이 넘었다.
창신동 봉제골목을 안내하러 나온 김정호 청계피복노조위원장
젊을 때부터 봉제일을 해오면서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앞장서는 인물이다.
봉제 용어, 작업 환경,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노력 등에 대해 들려 주었다.
창신동에 있는 민주화유가족들의 생활공동체인 '한울삶'
한울삶 내부에는 희생자들의 영정이 빼곡하다.
마침 한울삶에는 1987년 민주화 시위 도중 사망한 이한열 군의 어머니 배은심 씨가 계셨다.
창신동 봉제골목에서 이따금 오래된 건물을 만난다.
굳게 닫힌 철문 너머로 오래된 가옥이 보인다.
창신동 일대는 한때 사대부의 별장지였다고 한다.
낙산공원 올라가는 길에 매미가 귀청이 떨어져라 울어댄다.
나무에 매미가 다닥다닥
2. 이화동 벽화마을
서울 내사산 중의 하나인 낙산 아래 이화동에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적산가옥이 많다.
이 가옥들은 대한주택공사(현 LH공사)의 전신인 조선주택영단이 1940~1950년대 지은 집들이다.
자그마한 18평 남짓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삼각형 지붕을 가진 2층은 일본식 다다미방 형태로 지어졌다.
당시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조선주택영단 건물은 이제 다 헐리고 창신동과 문래동 일대에 일부만 남아있다.
이곳의 2층 창문으로 서울의 낙조와 푸른 산의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어서,
일부러 조선주택영단 가옥을 사서 개조해 사는 건축가들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 2006년 화가 한젬마 등 68명의 예술가가 참여한 '낙산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추진되면서 동네 곳곳이 벽화로 채워졌다.
주민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주기 위해 힘을 모아 채워 나간 벽화들로 인해 관광 명소가 되었다.
지금도 건재한 적산가옥들
서울성곽 안쪽 마을에 텃밭이 있는 쉼터가 보인다.
벽화들
나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지?
성곽 밖으로 나선다.
성벽을 쌓은 돌 모양이 다양하다.
3. 삼선동 장수마을
서울 성곽 바깥 삼선동에는 장수마을이 있다. 마을 주민 평균 연령이 70대라서 장수마을이다.
서울 성곽 안쪽 이화동에 1957년 무렵 신축 주택이 지어졌다면
이화동에 터를 잡지 못한 이들이 60~70년대에 성 밖에 주거를 마련한 곳이 장수마을이다.
처음에는 지붕에 루핑 씌운 움막 형태였다가 68년 무허가 주택 양성화 시책에 의해 시멘트 블럭 집으로 고쳤다.
주민들은 성곽 때문에 규제가 심하다고 서울 성곽을 '원수 같은 성'으로 여겨왔으나
최근에는 마을 가꾸기 사업을 통해 마을에 애착을 갖게 되면서
"저것 때문에 우리가 버티고 살았어. 저것이 바람도 막아주고, 우리를 먹여 살렸지."
라고 말할 정도로 인식이 개선되었다.
그동안 재개발 계획이 추진되었으나, 올해 재개발 구역이 해제되고 ‘주민참여형 재생사업’으로 전환되었다.
지난해 5월부터 주민과 마을활동가, 전문가들이 함께 수립해온 장수마을 주민참여형 재생사업 계획안을 서울시가 받아들인 것이다.
장수마을 주민참여형 재생사업 계획안은 ‘주민공동이용시설 조성’, ‘기반시설 설치 및 가로환경개선’, ‘마을 풍경 만들기’,
‘노후․불량 주택 정비 지원’, ‘CCTV 설치 등 안전 및 방재환경 조성’ 등이 주요 골자다.
이곳은 구릉지형으로 문화재보존영향 검토대상구역 지정돼 높은 국․공유지 비율 때문에 주택개량이 어려웠다.
이 때문에 25년 이상된 노후주택이 95% 이상을 차지하며 근현대 저층주거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지역으로 꼽힌다.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카페'
마을기업 '동네목수'가 운영하는 카페 겸 마을 사랑방이다.
(주)동네목수는 건축일을 하던 동네 주민들이 참여하여 만든 마을 기업으로
마을에 있는 낡은 집을 리모델링하여 순환임대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외지에 사는 집주인을 설득해 책임지고 세입자를 연결하는 조건으로 집을 개조하기로 하고 ,
입주자가 원하는 구조로 개조하는 사업이다.
작은 카페도 방 마루 부엌이 딸린 5칸 짜리 집을 개조한 그들의 작품이다.
카페 축대 벽에는 마을 지도가 그려져 있다.
물 뿌리개로 물을 주는 모습이 마을을 새롭게 가꿔나가려는 주민들의 의지를 담은 듯하다.
장수마을은 매월 '장수마을 이야기'라는 소식지를 발행하고
홈페이지도 운영한다.
(주)동네목수 대표
이 마을의 역사와 2008년부터 시작된 주민들의 인식 변화, 2011년 마을 기업 설립,
그리고 2012년 역사문화 보존 주거 환경 개선 지역으로 지정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장차 도시가스가 들어올 것에 대비해 미리 집 안에는 가스 배관을 연결할 수 있게 공사를 마친 집도 있다고 한다.
야생화 할아버지 집
집 주인 문씨 할아버지는 '야생화 할아버지'로 통한다. 지붕이며 집 안이 온통 야생화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댁의 지붕에 자리 잡은 각종 야생화 덕에 밋밋한 달동네 골목길 풍경에 생기가 돈다.
살아있는 종류가 무려 470종, 집 안에 있는 표본까지 합쳐서 4000종이란다.
취미 삼아 시작한 일이 벌써 20년이 넘었단다.
이 집에 있는 야생화는 대부분 산이나 들에 흔히 있는 식물이지만, 꼭 흔한 것만은 아니란다.
가령 엉겅퀴는 흔하디흔한 풀이지만, 할아버지가 키우는 엉겅퀴는 꽃이 하얀색이란다.
엉겅퀴 꽃은 원래 보라색인데 이건 하얀색이니 특별한 것이다.
산이나 들을 다니면서 이런 변종이나 희귀식물을 만나면
그때부터 그 씨가 익을 때까지 몇 번이고 찾아가 습성을 확인하고는 씨앗을 받아 와서 심는단다.
아무리 욕심이 나도 뿌리째 캐오는 법이 절대 없단다.
문씨 할아버지는 집 지붕에 야생화 화분을 가득 놓고 기른다.
4. 낙산공원
낙산공원
서울 동쪽의 낙산은 높이 약 125m의 야산이다.
낙타의 등을 닮았다 하여 낙타산으로 불리다가 낙산으로 지명 굳어졌다는 주장이 일반적이지만
지명의 유래를 두고 몇 가지 설이 있다.
'낙타를 닮아 낙타산이라고 불리다 낙산으로 굳어졌다는 주장이 일반적이지만, 조선시대 소의 젖을 짜서 신하들에게 나눠주던 타락색(駝酪色)이라는 목장이 있어 타락산이 됐다는 이야기도 그럴싸하다. 하지만 한양 도성의 우백호인 인왕산(仁旺山)은 부처의 수호신인데, 좌청룡은 낙타나 소젖이라니 싱겁다.
우연히 낙산 동남쪽 기슭 창신동의 안양암에서 화강암 절벽에 새긴 관음보살을 봤다. 불교에서는 관음보살이 인도 남쪽 바닷가의 포탈라카에 살고 있다고 가르친다. 포탈라카를 음역한 보타락가(補陀洛迦)를 흔히 보타산, 타락산, 낙가산, 낙산이라고 부른다. 1909년 조성한 안양암의 관음보살은 옛 사람들이 서울의 낙산 역시 양양 낙산사와 같은 관음의 상주처로 여겼음을 알려준다. 안양암은 지금 한국미술박물관의 사찰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안양암과 마애 관음보살의 상징성이 대표적 달동네의 하나인 창신동을 문화적으로 재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여름꽃이 한창이다.
꽃잎을 떨군 꽃자리조차 아름답다.
'서리서리 > 내셔널트러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의문, 윤동주문학관, 오진암, 현진건 집터, 안평대군 집터 (서울로 떠나는 휴가 #3 부암동) (0) | 2013.08.29 |
---|---|
비우당, 자주동샘, 청룡사, 정업원 (서울로 떠나는 휴가 #2 -2) (0) | 2013.08.12 |
문래동, 물레는 실을 잣고 사람은 역사를 낳고(서울로 떠나는 휴가 #1-2) (0) | 2013.08.04 |
문래동 - 철공소 거리에 녹아든 예술 (서울로 떠나는 휴가 #1-1) (0) | 2013.08.04 |
신두리 해안사구 - 바람과 모래가 만들어낸 생명의 땅 (0) | 2013.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