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요일 늦은 점심을 먹고 나서
남편이 갑자기 하는 말
"여행갈까?"
눈 덮인 덕유산 트레킹을 할까 하다가
얼마 전 모 회사 웹진에서 본 것이 생각나
이메일을 뒤져 그 기사를 골격으로 코스 선택
바로 정읍의 한 고택에 숙박 예약하고 출발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 있는 100년 된 전일희 고택에서 하룻밤
(어, 문선리가 은선리에?)
어둔 밤 도착하자 마자 주인 내외가 미소로 반기며 저녁은 먹었냐고 묻기에
오다가 휴게소에서 간단히 먹었다니까
낮에 호박죽 끓인 것이 있다고 가져오고
금방 호박고구마 쪄서 김이 모락모락나는 것을 가져온다.
고향집에 온 듯한 융숭한 대접이다.
왼쪽 끝 방이 우리가 묵은 방
이튿날(음력 동짓달 스무이레) 아침상
헛간 내부를 개조한 주인 내외의 처소에서 받은 내 생애 최고의 생일상
어찌 통했는지 미역국을 끓여주시고.
생일 아침에 남이 차려준 밥을 먹어 본 적이 있었던가?
반찬은 직접 재배한 것으로 조미료 없이 조리했으니 많이 먹으라고...
전봉준 유적지 인근에서 같은 성씨의 주인 내외와 상을 나란히 놓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꿀맛같은 식사
주인 아저씨에게 내가 여행하고 싶은 곳을 말하니
정읍과 부안 안내지도를 꺼내 친절하게 동선을 그려준다.
그가 알려준 대로 찾아간 첫 코스는
'은선리 삼층석탑'
백제시대 양식으로 만든 고려 석탑이다.
백제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닮았다는 이 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아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데
간결하고 소박한 멋이 있다.
이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찾아가자.
공교롭게도 월요일이라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휴관이고
경비 직원에게 리플렛만 얻어 나왔다.
기념관 앞 벌판은 동학농민군이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한 격전지 '황토현'이다.
녹두광장이라는 팻말에서 끝나지 않은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전봉준 장군 동상과 동학농민군의 부조물
영정 좌우에는 제폭구민, 보국안민이라는 동학혁명정신이 선명하다.
당시에는 척양척왜(斥洋斥矮)도 주장했고
결국 꿈은 일본군의 기관총에 가로막혔다.
이어 찾아간 곳은 이평면 장대리 조소마을에 있는
전봉준 선생 고택지
흙담 4칸의 초가 오두막
이 누옥에서 보국안민의 큰 이상을 품었다.
방명록에 서명하고
아줌마니까 어딜가든 부엌문은 잡아봐야지
이제 30번 국도를 타고 부안으로 향한다.
먼저 '촛불','슬픈 목가', '그 먼나라를 알으십니까' 등의
주옥같은 시를 남긴 우리 나라 대표적인 목가시인 신석정이 글을 쓰던 고택을 찾아갔으나
문학관 건립 공사중이라 핸들 잡은 사람이 내릴 틈도 주지 않고 차를 돌리고
그 다음에 부안읍내를 가로질러 매창공원을 찾았다.
부안 출신의 조선 선조 때의 여류시인 이매창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던 명기 이매창
시와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 유희경 허균 등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수백 편의 시를 남긴 여인
그가 죽자 거문고와 함께 이곳 봉덕리에 묻혔고
이곳은 수백 년 동안 매창이뜸이라 불려왔다.
반나마 눈 덮인 그녀의 묘소에 참배하고
내가 무지 좋아하는 '이화우 흩날릴 제" 시비 앞에 앉아 보고
하릴 없이 눈 덮인 쓸쓸한 공원을 거닐어 본다.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추모글도 읽고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절절한 추도사도 읽는다.
그녀의 情人이었다는 유희경의 글까지 읽고 공원을 나왔다.
이 다음 여행 땐 계랑 이매창과 쌍벽을 이룬 황진이를 생각하며
서도병마사가 되어 평양에 부임하는 도중에
송도에 있는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를 읊고
그 소식이 조정에 전해져 임지에 도착 전에 파면 당했다는
임제의 고택인 나주 임씨 종택 錦隱堂에서 묵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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