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문학의 산실을 찾아

강화도 문학기행 7. 이건창 생가, 정제두 묘소

달처럼 2011. 2. 13. 19:18

 

■이건창의 삶과 문학

 

이건창은 병인양요(1866)때 순국한 이시원의 손자이다.

나는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 선생의 일대기를 읽는 중에 강화도가 고향인 이건창 선생의 이야기에 매료되기도 했다. 특히 이건창이 47세로 사망 했을 때 조사를 쓴 사람이 매천 황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현은 경술국치 때 절명시를 쓰고 순국한다. 이건창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12년 되어 그는 자결한 것이다. 우주보다 소중한 생명을 정의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쉽지 않다. 이런 순국자들과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이건창이란 인물의 삶이 더욱 궁금했다. 이후 그의 고향 마을 화도면 사기리를 찾아가던 강화도 탐방이 뻔질나게 이어졌다.

 

이건창 생가는 전등사에서 마니산 가는 오른편 길가에 앉아 있다. 생가는 초가집으로 새롭게 복원되었는데 찾는 사람은 드물다.  

 

개성을 6년 사이에 다섯 번 지났지만

부소산과 채하동도 들르지 못했네

자세히 헤아리니

일생동안 벼슬살이에

마음에 맞는 일 보다는 몸만 고달팠네

 

이 비는 1997년 이상보 박사가 회장인 한국문학비건립회원들이 회비를 모아 건립한 것이니 의미가 새롭다. 아는 지인들의 이름이 뒷면에 열거되어 있어 반갑다.

 

이건창(1852-1898)은 강화가 낳은 문인이며 철학자, 청백리(淸白吏)다. 본관은 전주, 호는 영재, 이조판서 이시원(李是遠,1790-1866)의 손자로 이조참판 '이상학'의 아들이다.

이건창은 선대부터 강화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토박이며 조부로 부터 나라사랑과 학문을 배운다. 이미 5세 때에 문장을 활용할줄 알던 신동이다. 14세에 별시문과에 급제한다. 조선시대 최연소 합격이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워 등용이 어려울 정도였다. 19세가 되어 홍문관 직의 벼슬살이를 시작하지만 결코 그에게 벼슬살이는 순탄치 않았다.

 

용모가 깨끗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고 청렴결백하여 그의 생활은 늘 가난했다. 매천 황현(黃玹1855-1910), 김택영(金澤榮1850-1927) 강위(姜瑋1820-1884)와 친분이 있었다. 조선 후기 4대 시인을 말 할 때 이 세 사람과 이건창을 칭한다.

 

이건창의 문장도 예사롭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황현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절명시란 시를 쓰고 순국하다. 그의 절명시 중에서 한 두 편만 읽어보라. 비애감과 더불어 마음이 비장해 진다.

 

절명시(絶命詩)

亂離袞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末然 난리곤도백두년 기합연생각말연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금일진성무가내 휘휘풍촉조창천

전쟁을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네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은 참으로 어찌할 수 없구나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에 어리네.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조수애명해악빈 근화세계이심륜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추등엄권회천고 난작인간식자인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은 이제는 망해 버렸네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지식인 노릇도 어렵구나.

 

김택영(金澤榮)이 편찬한 매천집(梅泉集) 전하는 이 절명시(絶命詩)는 매천 황현(黃玹)이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 1910년 8월 29일)직전에 쓴 시다.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시다. 이런 분들이 존재하였기에 그나마 조선 500년이 이어져 왔다. 바로 이것이 선비정신이 아니겠는가.

 

이건창의 친우 창강 김택영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나라의 미래를 한탄하며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한다. 중국 퉁저우(通州)에서 시름 많은 나날을 구국의 일념과 한시로 여생을 보냈다. 다만 ‘강위’는 삼정문란의 폐단에 공분을 느끼던 시인이었지만 강화도 연무당에서 1876년 일명 강화도조약 때 일제의 필담을 맡아야 했다.

이제 연무당은 그 터만 남아 있지만 이곳에서 강화도조약이 체결 된 역사의 현장이다. 개화파였던 ‘강위는 당시에 이 조약이 일제의 야욕의 시작이 될 것을 몰랐을 것이다. 만약 이건창이 경술국치를 보았다고 하면 자신의 스승인‘강위’를 원망하였을지 모른다. 이건창은 강위를 스승으로 정제두 선생의 양명학을 지행합일의 실천적인 학문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의 한 사람으로 이를 몸소 실천하며 살았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1852-1898)의 삶을 조명해 본다.

그의 나이 22세(1874년)때 기록하는 임무를 가진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를 기행하게 된다. 그곳에서 청나라의 서보,황각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인정받는다.

1875년 23세의 나이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리를 조사하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고 1년이 넘게 평안도 벽동에서 귀양살이를 한다.

 

그의 벼슬길은 늘 당대의 현실적인 상황과 어울리지 못하여 시련을 당하게 된다. 1880년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관리들의 비행을 조사하고 불쌍한 농민들을 직접 찾아가 도와줄 방법을 찾았다. 1890년 한성부 소윤이 되고 1891년 승지가 되지만 상소가 문제되어 전남 보성에서 유배를 당해야 했다. 벼슬을 단념하였지만 왕은 계속해서 그를 부르곤 하였다.

해주관찰사(1896)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였다. 군산의 고군산군도의 세 번째 귀양살이 후에 고향인 강화도 화도면 사기리로 귀향한다. 이후 한양에 발길을 끊고 살다가 1898년 그의 나이 47세에 한 많은 삶을 마감한다.

 

당시의 상황을 표현한 전가추석(田家秋夕)이란 제목의 시 한편 읽어본다.

 

한양의 부자들은 좋은 일들이 많지만

시골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추석의 명절도 없네.

 

이건창 선생의 시는 약 사백 수가 넘는다. 모두 한시들이지만 나라사랑과 민족 사랑이 숨어 있다. 선생의 시는 강화도라는 특수한 지형이 만들어 낸 것인지 모른다. 당시 외세의 침략을 어린 나이에 목도하고 고려 때 몽고침략의 이야기들을 수없이 듣고 자랐을 그에게 나라 사랑은 백성 사랑으로 나타났다. 정치적인 타락과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가져온 조선 말기 스러지던 조선의 운명적 상황은 그에게 고통이었으리라. 그는 백성 없이 나라가 없다는 역사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자신의 학문적 스승이기도 했던 조부 이시원이 병인양요(1866년)의 수치를 감내하지 못하고 자결하던 장면을 어린 이건창이 목격한 것이 삶을 좌우하였으리라.

 

이건창의 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은 아우와 함께 양잿물을 마시고 목숨을 끊는다.

철종때 그는 이조판서였다.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략하자 주변에서는 그에게 피난을 갈 것을 호소하였지만 관원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는데 무슨 피난이냐며 집에 그냥 머물렀다. 조상들의 산소에 참배하고 3통의 유서를 남겼다. 1통은 손자 이건창에게, 다른 1통은 가족들에게 마직막 1통은 막내아우에게 썼다.

 

이런 상황에서도 송나라 정자(程子)의 문장을 인용한 질명미진(質明美盡)이란 유서를 손자 이건창에게 남긴다. 이런 사연으로 이건창 시인의 생가 현판은 明美當이다. 이런 사연은 45년 후 벽초 홍명희의 부친 홍범식 선생이 1910년 경술국치의 치욕에 참을 수 없어 목을 매어 자결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죽을 지언정 친일은 하지 말거라"의 유서를 자신의 아들인 벽초 홍명희에게 남겼다. 벽초의 삶을 부친의 유언이 평생 결정하게 된다. 사람의 자존감은 그냥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이건창의 생가는 초라하다. 명미당(明美當)이란 현판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자신의 조부 유언을 가진 집 이름이 아닌가. 생가 마당을 서성이며 그의 삶과 문학을 생각한다.

 

신숙주를 비판한 이건창의 시 고령탄(高靈歎)을 읽으면 그의 역사관을 인식할 수 있다. 고령(高靈)은 신숙주의 호다.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이런 구절도 있다.

 

남쪽 마을에서는 하얀 술 거르고

북쪽 동네에서는 송아지 잡는데

서쪽 이웃집에서는 가난한 여인이

구슬프게 밤새워 우네.

 

이 시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울고 있는 과부를 보고 지었다고 전한다. 가난으로 남편은 죽고 유복자를 보며 참담했을 한 과부의 상황을 시로 쓴 것이다. 그는 늘 가난한 백성의 편이었다.

당시 충청감사 조병식은 악랄한 수탈을 일삼았다. 1877년 고종은 청렴결백하던 선생을 충청도 암행어사로 발탁한다. 조병식은 선생이 왕에게 보낸 장계를 가로채어 자신을 포상하는 글로 교체한다.

 

선생이 분개하여 이것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고종의 판단은 한심했다. 조병식을 시기하는 부덕한 인물이라며 선생을 평안도 벽동으로 귀양을 보낸다. 이래도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기적이다. 조선 왕조는 이미 그 기력을 다했던 것이다. 생가와 비석도 없는 그의 묘지를 돌아보면, 그가 얼마나 청백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조선 후기 철학사를 빛낸 강화학파의 한 사람이었으며 위대한 시인이 아닌가. 다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답답하다.

 

이미 김택영은 그를 고려와 조선의 천년의 문인 중에서 9명의 문장가에 포함시켰다. 이건창은 47세의 단명이었지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다가 이곳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난다. 10년이 지나 그의 묘소를 찾아 천리길을 걸어 온 매천 황현은 "그대여 홀로 누워 있는 것 서러워 마시게, 살아서도 그대는 혼자가 아니었던가."(無庸悲獨臥 在日已離群)라는 감회를 적은 시가 가슴을 적신다.

 

그는 정제두가 양명학의 지행합일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의 학문태도를 교훈 받고 실천하였다.

 

그가 쓴 당의통략(黨議通略)은 파당과 족친을 초월하여 평등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서술한 명저다. 조선당쟁사를 이렇듯 객관적으로 쓴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의 이런 삶을 지배하였던 사상적 스승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하곡 정제두(鄭齊斗 1649-1736) 선생이다. 그는 본관이 연일(延日)이며 포은 정몽주의 11대손으로 한양에서 태어나 5세때 부친을 여의었다. 우의정을 지낸 조부 정유성(鄭維城1596-1664)이 부친을 대신해 키웠다.

 

선생의 묘소는 화도면 하일리(霞日里)에 자리잡고 있다. 풀이하면 저녁노을이란 이름이니 제격이다. 또한 선생의 운둔지의 지명으로도 적합하다. 이곳은 강화도의 서쪽 끝이다. 선생은 당쟁의 소용돌이 더 이상 볼 수 없어 숙종 말년에 한양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다.

 

 

■ 정제두의 삶과 철학

  

정제두(1649~1736) 선생은 강화 학파의 창시자이다.

그는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의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론적으로 확립한 경세론을 전개했다. 본관은 영일이며, 호가 하곡(霞谷)이다. 하곡은 강화도 북서쪽의 바닷가 마을이다. 하곡이란 이름은 ‘노을이 아름다운 골짜기’란 뜻이다. 해질녘 이곳 바닷가에 서면 노을이 이름처럼 아름답다. 1709년 그의 나이 60세에 모든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 하곡에 거처를 정하고 학문에 전념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우의정 유성(維城)이고, 아버지는 진사 상징(尙徵)이다. 박세채(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윤증(尹拯)에게도 배워 1668년 19세에 이미 초시에 급제했다. 그의 집안과 학문을 깊이를 알만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철학인 주자학에 반대하고 양명학에 심취한다. 이미 양명학 상당한 이해가 있었다.

 

정제두 학문과 덕행은 유명세를 타고 퍼진다. 1688년 평택현감을 비롯한 많은 벼슬자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한다. 40세 때인 1689년 안산(安山)에 옮겨 살면서 양명학에 몰두한다. 이 시기에 저술된 저서가 학변(學辨)과 존언(存言)이다. 이 저서들은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심성학(心性學)이 담겨 있다. 이제 그는 결단을 해야 했다. 세상과 은둔하여 양명학의 토대를 구축할 결심을 하고 장소를 물색한다. 강화도 하곡이다. 그의 나이 60세 1709년 드디어 그는 강화도 하곡으로 이주한다. 양명학에 대해 배척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숙종 때 호조참의, 한성부윤, 경종 때 대사헌에 임명되기도 한다. 그는 장수 했다. 87세로 세상을 떠나 강화도 하곡에 묻혀 있다.

 

양명학의 핵심사상은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이다.

심즉리(心卽理)는 양명학의 윤리학적인 측면을 표현한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순수하고 착하다는 성설설과 이후에 새로 생겨나는 감정이 있다. 이 둘을 합친 것이 理<리>라는 사상이다.

 

치양지(致良知)는 양명학의 창시자인 명나라 왕수인1472~1529)이 독자적으로 만든 말이다.

그의 호가 양명이다. 치양지는 착한 것을 알고 이해하면 그 행동은 선이 되는 것이다. 이때 그 행동은 외적인 규범에 속박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사상은 맹자의 성선설의 영향을 받았다. 착함에 이르는 길은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결국 왕수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 ‘선은 가지고 태어난다’는 주장과 ‘선악을 제거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누어 분파가 형성된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은 말과 실천이 동일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나는 양명학의 이 지행합일을 좋아한다. 양명학 전래 시기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임진왜란 전이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조선 유학계에서 양명학의 찬반논쟁이 빈번했다. 그러나 양명학 배척론이 압도적이었다. 양명학 찬성론자들은 규탄의 대상자가 되어야 했다. 퇴계 이황은 불교의 선학(禪學)과 일치한다며, 양명학의 지행합일설을 비판했다. 조선에서 죽어가던 양명학을 발전시킨 이가 정제두 선생이다. 이광사. 이건창. 김택영을 거쳐 정인보, 박은식까지 그 학풍이 산맥을 이룬다. 이 철학의 봉우리가 강화학파이다.

 

 

양명학은 혁신사상을 가지고 있기에 혁명가들에게 관심이 많다. 이 사상을 받아들인 곳이 일

본이다. 일본의 학자 ‘나카에 도주’. ‘구마자와 반장’은 양명학을 일본식으로 연구한다. 메이지유신에 사상적인 영향력을 준다. 일본에서는 양명학의 책이나 잡지가 수없이 출판된다.

나는 정제두의 묘소에서 항상 그가 꿈꾸던 세상을 그려보곤 한다. 그가 벼슬을 단념하고

바닷가 마을에서 백성을 사랑하며, 조선의 사상을 정립하던 모습에 감동을 받곤 한다.

그는 조선 후기의 진정한 처사였다.

강화도에는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과 철학의 숨결이 담겨 있는 곳이다.                                                 <출처 : 김경식의 문학기행>

 

이건창 생가 명미당(明美堂)

 

 

 

 

 

강화학파 창시자 정제두 선생 묘소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추운 날씨 때문인지 배터리가 일찍 소진되어 부득이하게

사진을 빌려 왔다.

명미당 사진은 문학기행 박문호님의 사진이고,

정제두 선생 묘소 사진은 하곡학연구소 카페에서 인용했다.

 

 

돌아오는 길에 초지진에 들러 병인양요 당시를 떠올리며 강화 바다를 바라보았다.

 

 

포탄 맞은 나무

 

 

 

 

유빙이 떠다니는 강화 바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문학 기행에 길벗이 되어 준 친구, 이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