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서울역사문학기행

북촌 기행 3-7 여운형 집터

달처럼 2011. 2. 28. 01:40

 

서울 종로구 계동 140-8번지는 몽양 여운형이 살던 집터다. 그의 집은 예전에 헐리고 그 터에는 안동손칼국수 집이 영업중이다. 경사진 언덕길에 있던 그의 집터를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무심히 그 길을 오고 간다. 국수집 건너편에 방치된 듯 서 있는 표지석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다.

이 집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항일운동 중심지였으며, 해방공간의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의 집무실이기도 했다.

역사의 현장인 그가 살았던 한옥은 헐리고 지금은 허름한 국수집이 되어 씁쓸한 역사의 무대로 변모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은 1933년부터 1947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던 공간이다. 

 

일제하에 그는 살림집이 없었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을 했는데도 거처할 곳이 없자 주주들이 사장주택으로 제공했다.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 우승할 때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된다. 대지 48평, 건평 38평의 한옥인 계동집 은 몽양 여운형 집의 소유가 된다. 세월이 흘러 그의 삶과 죽음이 희미해 갈 무렵인1989년 도로확장 공사로 헐리고 국수집이 들어섰다. 여운형의 죽음은 전설처럼 아득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진실은 아직도 선연하다.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 두발의 총성이 울린다.

 

트럭 한 대가 갑자기 여운형이 탄 차를 가로 막는다. 누군가 차 위로 올라와 선생을 향해 총알 발사한다. 총알은 심장과 복부를 관통하였다. 민족의 지도자는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극우 테러단체의 조종을 받던 한지근 이란 자의 범행이었다. 이전에도 여운형 선생은 열 번 정도의 테러를 당했다. 해방정국에서 그의 궤적은 그토록 위험했다.

1947년의 여름은 뜨거웠다. 몽양 여운형 선생의 장례식 때문이었다. 서울 시내가 애도의 분위기였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약 60 만 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김수환추기경,노무현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의 장례행렬을 비교할 수 있는 분위기였으리라.

 

당시 그는 민족의 지도자였다. 1945년 11월 서울 시민들에게 물은<누가 가장 뛰어난 지도자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그는 이승만을 제치고 1등을 한다. 여운형 33%, 이승만 21%였다. 당시 여운형은 이승만과 김구보다 더 역량 있는 지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살던 집도 보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역사의 뒤안길이 왜 이토록 그에게 불리하고 고독하게 되었던가? 그의 삶의 궤적을 찾아 떠나보자. 몽양의 독립투쟁과 인간적인 매력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몽양 여운형은 자신을 감시하던 일제의 형사나 자신을 죽이려고 덤비는 자객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인간작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의 본관은 함양이며, 호는 몽양(夢陽)이다. 경기도 양평에서 1886년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 한학을 공부한 후 고향집에 광동학교를 설립한다. 1907년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1908년 개신교의 교인이 되어 강릉에 초당의숙을 세워 민족의식을 학생들에게 습득시켰다. 그러나 1910년 강제합병으로 국권이 상실되어 학교가 폐쇄되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한다. 선교사 클라크와 함께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를 견학한 후에 해외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평양신학교를 중퇴하고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유다. 남경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기도 하면서 이론적인 학습을 익히다가 1918년 상해로 이주하여 신한청년당을 발기하고 김규식 선생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한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다.

 

이 무렵 일제정부는 여운형을 동경으로 초대하여 회유하고자 했다. 오히려 그는 장덕수를 통역관으로 대동하고 일제 조야에서 한국독립과 정당을 역설하여 일제 수뇌부의 가슴을 조이게 만들었다. 그의 연설은 일본과 서구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그의 담대한 언행에 일제의 거두들은 기가 질렸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오히려 굴속에서 사력을 다하는 모습에 조선의 민중들은 몽양을 큰 인물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1917년 러시아의 공산화는 피압박민족의 지도자들에게는 대사건이었다. 그가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1921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일제의 식민지가 된 한국의 절박한 독립호소를 세계에 호소한 이유다. 당시 그는 레닌과 트로츠키 등 러시아혁명 지도자도 면담하고, 중국의 마오쩌둥, 베트남의 호찌민 등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들과 동등한 지위로 독립의 필연성을

연설하기고 했다.

 

이때 레닌은 몽양에게 “조선은 아직은 농업국인 만큼 현 단계에서는 민족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라는 말을 하였다고 전한다. 여운형의 독립의지에 감동받은 레닌은 임정에 60만 루블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다.

1929년부터 3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조국 광복을 낙관하면서 독립을 위해 준비했다.

 

이때 그가 쓴 시 한편이 그의 당시 심정을 대변한다.

 

 

머리 들어 달빛을 보니 아름답구나 (擧頭望月色皎皎)

벽에 기대어 벌레소리 들으니 낭낭하네 (側倚聽蟲聲朗朗)

철창에 의지하여 왕성한 기운을 토했더니 (依鐵窓吐口鬱氣)

온몸에 끓는 피가 천길을 솟네 ( 滿腔血沸騰千丈)

 

 

   -- 몽양 여운형 선생 옥중시 김경식 번역

 

1929년 일제는 그를 체포하고 3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1933년 출옥한다.

몽양 여운형의 대자적인 민족성향과 대중적 영향력은 조선 총독이나 정무총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제의 패망과 국제정세의 상황인식도 빨랐던 그는 1944년에 이미 해방을 준비하는 건국동맹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당시 조국에는 약 80만 명의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무사 귀환과 10만의 일본군의 철수를 논의하기 위해 일제는 여운형을 적정한 인물로 선정한다. 이에 그는 조선총독부에게 정치범 석방, 식량 확보, 건국사업에 대한 불간섭 등을 요구한다. 일제는 몽양의 요구를 수용한다. 1945년 8.15 꿈에도 그리던 광복이 되었다. 안재홍(安在鴻)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한다. 이후 근로인민당을 조직하며 열정을 보였지만 극좌와 극우 모두에게 소외당하고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중에 암살을 당한 것이다.1947년 7월18일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의 가방에는 어떤 문서가 들어 있었을까?

 

가방에는 우리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문서가 들어 있었다. 여운형 자신이 펼친 정치적인 포부가 담긴 문서와 북한 관련 관계를 담은 서류였다. 이 서류는 누구에게 보여줄 문서였는가?. 미군정의 3인자이며, 미군정청의 최고책임자인 민정관 존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문서였다. 암살당하던 당일 오후, 존슨의 집에서 비밀회동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민정장관을 여운형에게 제의하는 자리였으리라 추정된다.

이것은 이정식 교수가 발굴한 존슨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확연하다.

 

 

“과도정부는 야심적인 한국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었는데, 어느새 극우세력이 경무국과 법무부의 모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안재홍은 공식적으로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정부 내 우익 인물들의 협력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또 좌익 쪽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들이 한국 사람들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좌익은 거의 모두 무시돼왔다. 정부의 주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우리들은 과도정부 내에서 날로 자라나고 있던 우익 쪽의 영향을 막는 동시에 자유주의적인(liberal) 세력과 중간좌파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무엇인가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수 있는 한국 사람들과 의논했는데, 그들은 유명한 중간좌파의 지도자 여운형에게 정부의 중요한 자리를 맡기는 것이 현명한 책략일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우리 집으로 초청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정식 저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 --서울대출판부, 2008년 인용

                                           

 

당시 민정관 존슨의 이 문서를 읽어보면,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한민당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부패 세력으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박헌영 등의 극좌와는 대화조차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여운형은 중도좌파로 대중적인 지지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그를 민정장관으로 임명하여 해방공간의 과도정부를 원만하게 운영하고 싶은 것이 당시 미국의 판단이었다.

 

역사에는 가정법 과거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여운형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미군정의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미국 정부는 3년 동안 한국에 총 5억4천만 달러 원조 안을 승인했다. 대단한 규모였다. 부패정부가 아니라면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한민당의 부패 매판 세력들은 이 자금을 거덜 내고 있었다. 토지개혁은 늦어지고 정치는 암살과 테러로 치달아 갔다. 이 틈을 비집고 일제 부역의 인사들이 대거 흡수되면서 반민특위도 무산된다. 여운형이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면 최소한 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다.

 

                                      계동 여운형 선생 집터 앞에 세워진 표지석

 

1936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아예 신문을 폐간 한다.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안재홍과 더불어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든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정국의 가장 힘이 있던 조직이었다. 이후 그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여 극좌와 극우를 배격하고 중도를 표방하며 하나의 조국을 부르짖었지만 극우 청년 한지근에게 암살되어 일생을 마감한다.

몽양이란 호는 어머니 꿈에 기인하다.

몽양의 어머니 경주이씨는 그가 태어나기 전날 꿈을 꾼다. 꿈속에 볕이 하도 좋아서 치마를 펼치고 햇살을 받았다고 한다. 여운형은 태몽을 자신의 아호로 삼는다. 몽양, 꿈 몽(夢)에 볕 양(陽)이 아닌가.

 

몽양은 4남3녀를 두었다. 두 아들은 광복전에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2남 3녀는 모두 월북했다. 그의 딸 여연구는 북한의 거물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몽양에게는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수유리 묘소에 잠들어 있다.북촌 길에 만나는 그의 집터와 수유리 묘소에서 나는 항상 그의 죽음이 없었다면 6,25 전쟁이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는 당시 민족적 분열과 대결을 막을 수 있는 방파제였다.  몽양 여운형의 죽음은 방파제의 붕괴를 상징한다.

그 방파제는 외세와 그를 믿고 설치던 자들의 욕망을 막고, 민족의 상생을 도모하던 평화의 둑이었기 때문이다.

 

해설 : 김경식 시인

 

 

 

“서울 지역 항일 유적지 83% 흔적없이 사라져”(세계일보 2008.01.15 11:42)


◇여운형 선생 집터는 종로구 계동 140-8번지로 확인됐는데 이곳은 서울시가 세운 기념표석의 맞은편 식당 자리이다.
서울 지역 독립운동 유적지가 대부분 사라지거나 변형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독립운동 및 국가수호 사적지 실태조사단'(단장 장규식 중앙대 교수)은 "독립운동 유적지 90건 중 83%인 75건이 아예 사라지거나 완전 변형됐다"고 14일 밝혔다.

조사단은 독립기념관의 발주로 지난해 8월부터 한국근대사와 독립운동사 개설서, 서울특별시사와 6·25전쟁사 등에서 역사적·교육적으로 비중있게 다뤄진 사건과 단체, 인물 관련 유적지 실태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미 파악된 123건 외에 155건을 추가로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독립운동 유적지는 도시개발 과정에서 대부분 흔적조차 찾을 수 없거나 완전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음을 확인했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은 본지가 2006년 8월14일부터 5회에 걸쳐 기획보도한 '방치된 독립운동 유적'을 계기로 국내 독립운동 유적지 종합실태조사를 약속한 바 있다(세계일보 2006년 8월31일자 26면 참조).

조사단이 사진자료와 관련자 증언 등을 통해 새롭게 고증한 독립운동 유적지에는 서울 시내 중등·전문 학교 학생 대표들이 1919년 3월4일 '제2차 독립만세 시위'를 준비한 배재학당 기숙사터(서울 중구 정동 34·배재정동빌딩 입구 표지판 주변)와 소파 방정환이 제1회 어린이날 행사를 열었던 '세계 어린이운동 발상지' 천도교소년회 회관터(종로구 경운동 88·수운회관 자리) 등이 포함돼 있다. 또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된 이시영 선생 집터(중구 을지로 2가 164)를 비롯해 대통령장이 추서된 오세창(종로구 돈의동 45)·김상옥(종로구 창신동 464-6) 집터, 독립장이 추서된 송진우(종로구 원서동 74)·조병옥(종로구 중림동 331-13) 등의 집터, 애국장이 추서된 나운규(서대문구 영천동 70-22)·방정환(종로구 소격동 85) 집터 등도 새롭게 발굴됐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태화빌딩.
하지만 독립운동 사적지 90건 중 '의친왕 저택터(종로구 관훈동 192)' 등 70건은 아예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고, 종로2가 YMCA회관 등 5건은 완전 변형돼 옛 모습을 잃었다. 국가나 서울시 등에서 기념표석을 잘못 설치해 재정비가 필요한 곳도 만해 한용운이 거처하며 불교잡지 '유심'을 발행했던 '유심사터'(계동 43) 등 10곳이나 됐다. 이와 관련, 서울시측은 "중앙사학연구소의 연구 용역이 완료되면 그 결과를 반영해 시내 사적지에 대한 기념표석 정비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멸실된 사적지 중에는 도로 확장 등으로 인한 멸실이 17곳으로 전체의 24%를 차지해 도시 개발 과정에서의 사적지 훼손이 심각한 것으로 확인됐다.

장규식 단장은 "유서 깊은 역사현장에 기념표석을 설치하는 것은 치하해야 마땅할 일이고 그 같은 의미 있는 작업이 이런 몇몇 사례 때문에 혹시 위축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오류는 바로 잡아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앙사학연구소는 항일운동 유적지 외에 한말 구국운동 및 일제하 문화운동 및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 6·25전쟁 관련 사적지 등 278곳에 대한 현황과 실태조사 결과를 15일 오후 2시 중앙대 법학관에서 개최하는 중간 보고회를 통해 발표한다.
송민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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