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16590C554D7C4FF105)
중요무형문화재 대금산조 예능 보유자 이생강 선생
국립고궁박물관 2층을 관람하고 1층으로 가려는데 국악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발길을 돌려 중앙홀로 향했다.
대금 연주자도 고수도 평상복이다.
얼핏 눈이 의심스러워 박물관 직원에게 물었다.
혹 저 분이?
바로 그 분이란다.
오후 4시에 열릴 공연을 위해 리허설 중이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243FF414D7F450807)
영추문
경복궁의 서문으로 일반 관원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43AB554D7C4FF62B)
![](https://t1.daumcdn.net/cfile/cafe/155910554D7C4FF805)
효자동 길에서 만난 봄
영추문에서 보안여관 가는 길가.
담장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꽃봉오리가 봉긋한 벽화에서 봄을 보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37FF554D7C4FFB38)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의 산실 '보안여관'
[테마 스토리 서울] (23) 통의동 보안여관
‘시인부락’의 고향·靑경호원 면회소… 이제 반짝이는 예술공간으로 재탄생
일제강점기인 1936년 서울 종로 통의동에 22살의 청년 서정주가 나타났다. 경복궁 근처 허름한 여관에 짐을 푼 서정주는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 동년배의 시인들과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었다. 통의(通義·의가 통하다)라는 동네 이름 때문이었을까. 뜻을 같이한 이들의 작업을 오늘날의 학자들은 한국 현대문학의 본격적인 등장이라고 평가한다.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젊음의 꿈과 희망,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론하던 곳. 1930년대 문을 연 통의동 2-1번지 보안여관은 처음 등장부터 일반 여관과는 달랐다.
|
▲ 투박한 외부 벽돌이 80년 가까운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서울 통의동 2의 1번지의 보안여관. |
청와대와 경복궁, 광화문, 영추문, 통인시장, 북악산, 인왕산으로 둘러싸인 통의동은 독특한 공간이다. 멀리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가 태어나 수많은 얘기를 남겼고 시인 이상은 ‘오감도’에서 통의동을 ‘막다른 골목’이라고 표현했다. 지금은 이웃한 인사동, 삼청동에 이어 카페 골목과 갤러리가 넘쳐나는 ‘新 문화의 거리’로 주목받고 있다. 골목 곳곳에 영화사가 자리잡고 있고 영화감독 허진호씨 등 문화예술인들이 삶을 향유하는 곳이기도 하다.
|
▲ 전시회를 준비 중인 보안여관 내부. 2010년에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롭게 자리잡게 된다.
|
보안여관은 80년 가까이 같은 자리를 지켜온 통의동 역사 그 자체다. 보안여관의 이름이 왜 보안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여관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 메타로그 측도 “정확한 유래를 아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와 인접해 있어 ‘보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보안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붉은색 벽돌이 가득한 적산가옥(광복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은 깨끗하게 정리된 주변 도로 및 화단과 대비되면서 낯선 풍경을 연출한다. 건물 외벽에 걸려 있는 ‘통의동 보안여관’이라는 흰색 바탕의 파란 글자를 보고 있으면 이곳만 세월이 멈춘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광복 이후 보안여관은 지방에서 올라온 젊은 시인과 작가, 예술인들이 자리를 잡기 전 장기투숙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들은 신문사 신춘문예를 준비하거나 출판사에 원고를 들고 기웃거렸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청와대 직원들이 주고객이었고 경호원 가족의 면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지금도 보안여관을 ‘청와대 기숙사’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모습은 그대로지만 더 이상 여관은 없다. 수많은 호텔과 모텔, 오피스텔의 등장으로 허름한 여관은 설 자리가 없어졌고 결국 2006년 문을 닫았다. 여관건물을 인수한 일맥문화재단과 메타로그는 예술가들이 숨쉬던 공간의 가치를 유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건물 외벽의 모양은 그대로이지만 내부는 실험적이고 반짝거리는 예술인들의 공간으로 제공된다. 2007년 ‘통의동 경수필전’을 시작으로 올해에는 벌써 3차례 사진전과 기획전이 열렸다. 오는 19일부터는 젊은 예술인들의 퍼포먼스 전시가 예정돼 있다. 메타로그 측은 이 공간을 내년 중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킬 예정이다. 일맥문화재단 최성우 대표는 “옛 건물을 무작정 개발하거나 보존하는 것보다는 ‘창의적 복원’이라는 컨셉트를 도입하고 싶다.”면서 “불특정 다수가 머물렀다 떠나가는 여관이라는 공간에 담겨진 이야기를 문화예술 작가들과 만나게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글 사진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출처/ 서울신문 2009-12-04 28면
![](https://t1.daumcdn.net/cfile/cafe/173BF0554D7C4FFC35)
![](https://t1.daumcdn.net/cfile/cafe/164181554D7C4FFE2F)
보안여관 창문 전시 작품
복합문화예술공간 통의동 보안여관은 '창문전시’에 참여할 작가를 모집한다. 창문전시는 '재생’이라는 키워드를 포함하면서 보안여관이라는 정체성과 연계되는 작품으로 구성한다.
통의동 보안여관의 창문 사이즈는 가로 123cm x 세로 110cm x 깊이 100cm, 내부 공간 사이즈는 가로 175cm x 세로 195cm x 깊이 160cm로 이 공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대상으로 한다.
<시인부락>
1936년 11월 14일 창간, 1937년 12월 1일 통권 5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은 서정주徐廷柱)였고, 제2호는 오장환(吳章煥)이 맡았다. 국판 30~50쪽으로 시인부락사에서 펴냈다. 동인으로 제1호 때는 서정주·김달진·김동리·여상현·오장환·함형수·김광균 등, 제2호 때는 오화룡·이시복 등이 참여했다. 창간호 편집후기에서 "우리는 우리 부락에 되도록이면 여러 가지의 과실과 꽃과 이를 즐기는 여러 식구들이 모여서 살기를 희망한다"고 한 점과 이 잡지에 실린 시들의 경향으로 보아 특정한 사조나 경향을 내세우지 않고 순수문학을 심화시켜 인간 생명의 고귀함을 노래했다. 그래서 이 동인들을 '생명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서정주의 〈문둥이〉·〈화사 花蛇〉,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오장환의 〈성벽 城壁〉·〈정문 旌門〉 등이 실려 있다. / 출처 Daum 백과
화 사 (花蛇)
- 서 정 주
사향(麝香) 박하(薄荷)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얼마나 커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꽃대님 같다.
너의 할아버지가 이브를 꼬여내던 달변(達辯)의 혓바닥이
소리 잃은 채 날름거리는 붉은 아가리로
푸른 하늘이다…… 물어 뜯어라, 원통히 물어 뜯어,
달아나거라, 저놈의 대가리!
돌팔매를 쏘면서, 쏘면서, 사향 방초(芳草)길
저놈의 뒤를 따르는 것은
우리 할아버지의 아내가 이브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석유 먹은 듯…… 석유 먹은 듯…… 가쁜 숨결이야.
바늘에 꼬여 두를까보다. 꽃대님보다도 아름다운 빛……
클레오파트라의 피 먹은 양 붉게 타오르는
고운 입술이다……스며라! 배암.
우리 순네는 스물 난 색시, 고양이같이 고운 입술……
스며라! 배암.
({시인부락} 2호, 1936.12)
해바라기의 碑名
---청년화가 L을 위하여---
- 함 형 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마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 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시인부락} 창간호, 1936.11)
![](https://t1.daumcdn.net/cfile/cafe/157C4A524D7C500034)
![](https://t1.daumcdn.net/cfile/cafe/200CD6524D7C50021E)
경복궁과 광화문 복원 도편수인 신응수 대목장의 건축연구소
![](https://t1.daumcdn.net/cfile/cafe/160E2A524D7C50051C)
옛 진명여고 터
진명여고가 1989년 목동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청와대를 수호하는 기동경찰대 건물이 들어섰다.
진명여고는 1906년 엄순헌 귀비와 엄준원 선생이 설립했다.
엄순헌(1854~1911)은 고종의 계비이다. 아관파천 때에 고종을 모시며 후궁이 된다.
1897년에 영친왕 이은(李垠)을 낳고 귀인이 된다. 1903년에는 황비에 책봉된다.
그녀는 서울의 명문학교 3곳을 세웠다. 진명여고, 양정고보, 숙명여고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1BDE524D7C500806)
진명여고 출신 박은정 간사님은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https://t1.daumcdn.net/cfile/cafe/127ECE524D7C500A33)
해공 신익희 선생 옛집을 찾아 가는 길
이 자리에 효자동 지명의 유래가 된 쌍홍문이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7EE1524D7C500B32)
![](https://t1.daumcdn.net/cfile/cafe/177BE3524D7C500D34)
해공 신익희가옥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164-2
이 집은 해공 신익희 선생(1894-1956)이 살던 곳이다. 그는 국회의장에서 물러난 1954년 8월부터, 민주당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선거 유세도중에 갑자기 숨진 1956년 5월까지 약 1년 9개월 동안 이 집에서 살았다.
이 집은 1930년대에 지어진 도시형 한옥으로 넓지 않은 땅에 소박한 구성을 보여 준다.
이 집은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건물은 최근에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된 후 그 자리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라 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6CE6534D7C500F06)
![](https://t1.daumcdn.net/cfile/cafe/19596E534D7C50113E)
![](https://t1.daumcdn.net/cfile/cafe/155EA2534D7C501331)
![](https://t1.daumcdn.net/cfile/blog/113953414D7F450B16)
![](https://t1.daumcdn.net/cfile/cafe/166DE8534D7C501503)
해공 신익희 기념사업회 상임부회장
해공 선생의 생애와 기념사업회의 고택 매입 과정, 기념관 건립 계획에 대해 열강하셨다.
지팡이에 의지할 만큼 보행이 부자유하지만 매일 한 차례씩 고택에 들러 보살피고 가신단다.
회원 한 분이 '비내리는 호남선'을 부를 때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다.
답사 모임의 고문이신 이상보 교수님은 기념사업회에 힘을 보태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셨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6D1A534D7C501806)
![](https://t1.daumcdn.net/cfile/cafe/146C39534D7C501A0A)
![](https://t1.daumcdn.net/cfile/cafe/185A9E534D7C501E3C)
![](https://t1.daumcdn.net/cfile/cafe/1461E6544D7C50241D)
![](https://t1.daumcdn.net/cfile/cafe/145B48544D7C502626)
해공 신익희 선생 기념사업회 홈페이지 http://www.haegong.co.kr/ 에 많은 자료가 있으니 방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