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살뜰/문화답사

물 한 굽이 음률 되고 고개 한 넘이 시가 되어 - 충북 영동, 옥천

달처럼 2011. 9. 20. 12:52

 

추석을 지났건만 여름보다 더 뜨거운 폭염이 예보된 날
조선 초기의 악성 박연과
1930년대 현대시의 새로운 장을 연 시인 정지용을 기리며
9월의 '길 위의 인문학'은 시 따라 음악 따라 충북으로 달렸다.
 

  

처음 조착한 곳은 박연의 고향 지프내(영동군 심천면)에 있는 난계 국악기 체험 전수관이다.
난계 박연(1378~1458)은 조선 초기 문신이자 음악가로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서 태어났다.  

국악 이론을 정립하고 악기를 제작하고 정비했으며 아악 및 향악 등 음악 전반의 법도를 바로잡았다.   

 국악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워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3대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국악인 차복순 명창이 모시 한복을 곱게 입고 판소리 '흥보가' 한 대목을 구성지게 부르고 있다.

 

박연의 음악이 정악이라면 판소리는 평민의 민속악이지만 민족의 혼을 담아 내는 국악은 하나로 통하는 것이리라.
차 명창은 탐방객에게 진도 아리랑 몇 대목을 맛깔나게 가르쳐 주었다.
  

 

 

2층의 체험 전수실에서는 탐방객 모두가 장구와 북 앞에 앉아 전수관 팀장의 악기 연주를 배웠다. 

 전수관 팀장의 지도로 궁글채와 채편을 잡는 법부터 구음, 기본적인 연주법까지 실제로 체험했다.

휘모리 장단까지 연주하면서 내 나라 악기를 처음 연주하는 뿌듯함을 넘어 잠자던 흥이 용솟음치는 경험을 했다.

 

 

길 건너에 난계 국악 박물관이 있다. 70여종의 전통 악기가 전시되어 있고 난계의 업적을 영상으로 상연한다.

 

 

편종이다. 고려시대부터 내려 오던 것을 난계가 정밀하게 조율하여 재정비한 악기이다.

 

 

 

난계가 개조한 편경이다. 세종 7년 해주의 거서와 남양의 경석이 발견되어 완전히 조율된 악기를 제작하여 조화로운 음악을 갖출 수 있었다.

 

 

 

난계사로 가는 길에 난계의 동상이 있다.

그는 음률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세종의 든든한 후원과 악기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의 발견이 있었기에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난계의 사당인 난계사(蘭溪祠). 난계라는 호는 그의 정원에 난초가 많았기에 붙여졌다고 한다. 난계의 향기는 아직도 은근하다. 

 

 

탐방객을 실은 버스는 옥천으로 향했다. 넓은 벌 동쪽 끝 실개천가의 정지용 생가는 허물어졌다가 1996년에 복원되었다.

 

 

 

 

 

정호승 시인이 정지용의 현대시적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상에 대한 객관적 묘사, 현대적 시어의 탁월한 선택으로 정지용을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 일컫는다.

 

정호승 시인은 '하늘의 그물'로 2000년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했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 정호승, '하늘의 그물' 전문

 

이 시는 노자의 '도덕경' 제73장에 나오는 구절을 읽다가 쓰게 되었다고 한다.

 

天網恢恢 ( 천망회회 )    하늘의 그물은 광대하여

疏而不失 (소이불실 )     엉성한 것 같지만 놓치는 일이 없습니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일 수는 있지만 결국 하늘을 속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하늘의 그물을 빠져 나갈 수 없는 삶을 지향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늘의 그물'은 진실과 양심, 본질을 말하는 셈이다.

정호승 시인은 인간은 아무도 빠져 나갈 수 없다 하더라도

누군가 빠져 나갈 존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보름달을 비껴가며 밤하늘을날아가던 기러기떼를 생각해 냈다.

    새끼들을 데리고 가는 기러기 어미의 힘, 즉 모성의 힘이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하늘의 그물을 빠져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이 시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생가의 방안에 보이는 것이 질화로인가 보다. 흔히 보았던 청동화로나 놋화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푸른 잉크님도 보이는군요.

 

 

생가 돌담 안에 있는 나무다. 명자나무라는 팻말이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봄에 붉은 꽃이 피었을 때만 겨우 알아본다.

 

 

생가 옆에는 정지용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의 삶과 문학, 현대시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으며,

정지용의 추천으로 등당한 문인,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한 문인들의 면면이 소개되고 있다.

 

 

정지용의 시 '호수' 

 

 

청록파 시인들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를 통해 등단했다고 설명하는 정호승 시인

 

 

 

 

 

 

생가 옆 그 옛날의 실개천에서는 중장비로 공사가 한창이다.

시인의 고향은 이미 옛날의 고향이 아니지만 

그의 시를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그가 그리워 하던 모습으로 살아 있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멋진 신세계' . 시비공원이다.

정지용 생가에서 보은 방향 장계리에 이르는 길을 '향수 30리'라고 한다.

이미 오래되고 방치되어 사람들에게 잊혀진 장계관광지에

정지용 시인의 감각적 詩작품과 금강을 주제로

건축가, 디자이너, 아티스트, 문학인등 100여명이 참여하여

관광지의 기존 건물과 시설들을 재활용해서

2년여의 시간을 함께한 결과로 “멋진신세계”를 열었다.

대청호의 자연을 배경으로 주옥같은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신세계이다.

 

 

 

 

주차장을 개조해 시인의 원고지를 연상케 만든 모단광장 무대에서

충북대 정세근 교수가 철학에서 본 음악과 시를 열강하고 있다.

미학이란 감동이고 , 예술은 감동의 크기를 담아내는 것이다.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고 이데올로기보다 위대하다.

정지용의 생애와 시가 그 증거이다.

  

 

 

 

 

 

 

  

 

 

 

 

 

장계유원지 내 사용성이 낮고 버려진 건물을 프로그래밍한 ‘카페 프란스', 정지용의 시 제목이기도 하다.

 
 
돌아오는 길 푸른 하늘의 뭉게구름을 보며 '향수'를 읊조린다.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길다는 말을 실감한 하루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