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 10월 셋째 주는 '신화의 섬, 상상의 섬 제주를 읽다'(*초빙강사 : 정재서 교수, 소설가 김인숙)라는 주제로 제주를 탐방한다기에 기대가 컸다. 당첨 확률을 높이기 위해 9월 옥천기행 후기도 올리고, 신청 공고가 나면 얼른 책을 읽으리라 벼르고 있었다.
조선일보에 10월 기행 신청 접수 공지가 난 것을 보자마자, 시립도서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관련 도서를 대출 받으려고 소장 도서 목록을 확인하고 청구기호도 메모했다. '이어도', '이야기 동양신화1,2',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는 대출 가능했고, 김인숙의 '미칠 수 있겠니'는 대출중이어서 대출 대기자로 입력했다.
책을 빌려 온 날, 우선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를 손에 들었다.
70년대 중반에 작품이 발표되면서부터 독자가 많았고, 그래서 대학 시절에 읽으며 그 때까지 가 본 적이 없는 섬 제주의 뱃사람에게 전해오는 이어도 이야기에 제주를 상상했던 적도 있었다.
파랑도와 이어도, 평생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야 하는 제주 사람들. 뱃사람인 아버지가 이어도를 봤다고 하고는 다음 뱃길에서 실종되고 간단없이 이어지던 어머니의 이어도 소리를 들으며 지낸 어린 시절 때문에 제주사람이 그리는 이어도 정서를 오롯이 담고 있던 천 기자. 파랑도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해군의 작전 취재차 군함에 동승했다가 그가 실종되자 그를 알던 인물들은 그가 이어도로 갔을 거라 생각한다. 해군은 이어도를 찾는 일에 실패했지만, 천 기자만이 이어도를 보았을 것이고, 이어도를 본 사람들은 이어도로 간다는 제주의 전설을 믿는 것이다.
이어도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섬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이어도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어도가 없이는 이 섬에서 삶을 계속할 수가 없다. 그러다 마침내 어느 날은 그 이어도를 만나 이어도로 떠나가는 것이 그들의 숙명이자 구원이다. 그 위험스런 바다에서의 삶을 이어도로 위로 받으며,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궁극에 가 닿을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으로 현실적인 삶의 의미를 찾는다.
현대 과학은 야속하게도 이어도의 정체를 발견하고 세상에 소개한다. 바다 위로 솟아오르지 못하고 바다 속에 잠겨있는 섬. 이제 많은 사람들은 해양 자원의 측면이나 영토의 개념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이어도의 진실은 이 땅의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 보이는 실체가 아닐까. 그것이 신화 속의 이어도일 것이다.
두 번째로 읽은 책은 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이다.
이 책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화두로 시작하였다. 인문학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신화 읽기가 다시 유행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신화라면 당연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렸다. '이야기 동양 신화'에서는 동양인의 존재의 근원이자 의식의 뿌리인 동양의 신들을 찾아간다.
서양의 동화책에서 보았던 인어아가씨에 익속해져서 동양의 저인이라는 이름의 인어 아저씨는 낯설기만 하다. 인어가 남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동양 신화에서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동물의 몸을 한 성스러운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된다. 먼 나라에서 온 인어 아가씨와 가깝게 지내다 보니 우리와 친하게 지냈을 인어 아저씨와 서먹해졌다.
서양의 미노타우로스는 소 머리를 한 괴물이다. 그러나 역시 소 머리를 한 동양의 미노타우로스는 염제 신농이다. 그는 괴물이 아니라 불의 신이자 농업을 발명한 신이다. 그 염제 신이 그려져 있는 무덤의 주인이 고구려 사람이다. 신화가 생겨나던 시절 중국 사람들과 고구려 사람들은 빈번이 왕래하면서 함께 동양의 신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동양 신화의 신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다만 서양 문화에 익숙해진 우리 눈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신화는 문화의 원형이다. 동양 신화를 읽으면 동양문화의 원형을 알게 된다. 문화의 원형을 알면 오늘의 문화 현상을 더 쉽게 잘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동양 신화를 읽는 것은 동양인 , 나아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 책은 1부에서는 하늘과 땅이 열리고 사람이 생긴 이야기, 즉 거인 반고가 등장하며 천지개벽에 대한 신화를 다루었고, 2부에서는 여신들이 등장하는데, 창조와 치유의 여신 여와, 죽음과 생명의 여신 서왕모, 사랑의 여신 무산신녀와 직녀이야기가 나온다. 3부에서는 신농, 태호, 소호, 전욱 등의 천상과 지상을 지배한 큰 신의 이야기가 나오고, 4부에는치우, 형천, 공공, 주목왕 등의 영웅 이야기가 있다. 5부에는 성군과 폭군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동양 신화를 읽고 나니 서양 신화에 경도된 사고가 비로소 뿌리를 찾고 균형감각을 갖는 기분이 들었다.
세 번째로 읽은 책은 '우리 신화의 수수께끼'(조현설, 한겨레출판)이다. '이야기 동양 신화'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동양 신화라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우리 신화를 싣고 있다. 정확히 언급하자면 우리 신화를 토대로 동아시아 신화와의 관계를 구축한 것이다. 저자는 신화를 읽는 일은 오래된 인류의 이야기이자 여전히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마음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신화를 입체적으로 소개한다. 가령 웅녀 이야기만 하더라도 단군신화에 나오는 웅녀와 충남 공주 곰사당에 얽힌 곰나루 전설의 웅녀, 북방 흥안령 일대에 거주하는 에벤키 족의 기원 신화에 나오는 웅녀 사이의 관계에 의문을 던지며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단군신화의 웅녀는 자궁을 빌려 준 대리모 같은 존재라면 에벤키 족의 웅녀는 주인공이다.
사냥꾼이 사냥하러 갔다가 암곰에게 잡혀 굴에서 동거한다. 함께 사는 동안 곰은 새끼 한 마리를 낳는다. 그 후 사냥꾼은 암곰이 굴을 비운 사이 강을 건너 도망한다. 화가 난 곰은 새끼를 두쪽으로 찢어 한쪽을 사냥꾼에게 던진다. 남은 쪽은 곰으로, 던져진 쪽은 에벤키인으로 자란다는 이야기이다. 곰나루 전설과 <세종실록>에 나오는 함경도 우지개라는 곳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이와 비슷하다.
이런 증거들을 통해 종족의 통합 과정에서 신화도 통합된 것으로 해석한다. 에벤키 신화와 같은 신화를 지닌 종족이 고조선에 통합되면서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했거나 고조선 해체 이후 그 잔류 집단이 북방의 유목민으로 되돌아갔을 때, 혹은 그 일부가 고조선의 유민으로 남하했을 때, 전승할 입을 잃은 웅녀 이야기는 어떤 운명을 맞게 될까? 창조와 재생의 능력을 잃은 여신 웅녀는 강물 앞에서 절망하고 자살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신화는 유적이다. 주의 깊이 연구하고 발굴해야 할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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