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살뜰/문화답사

후암동 답사후기

달처럼 2011. 11. 5. 19:37

2011.09.28 제4차 도시답사 후기 2011-10-20 10:47 
 

-역사도시 서울의 골목길-

■일본인 주거지 후암동과 갈월동■

긴 장마와 여름이 끝나고 9월에 새로 시작된 도시답사의 장소는 후암동과 갈월동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북촌과 동대문 밖이 조선인들의 주거지라면 남촌과 남대문 밖은 일본인의 주거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일본인 침략하기 전 남대문 밖은 성저십리에 속하였지만 사람들이 살지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강점이 시작되자 당시 통감부가 있던 남촌을 중심으로 일인의 주거지가 성장하게 되나 남촌은 남산 기슭에 위치하여 남쪽의 해를 받기 힘들어 살아가기에 좋은 여건은 아니었습니다. 일인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주거지를 모색하게 되었고, 용산에 위치한 일본헌병대와 경성역 사이에 위치한 현재의 후암동과 갈월동이 새로운 일본인의 주거지로 성장하였습니다.

(경성시가전도(부분) - 1910년
남대문정거장(現 서울역)과 헌병대를 잇는 길이 보인다. 아직 주거지가 형성되지 않았다.)

후암동과 갈월동은 남산의 능선을 가로질러 위치하는데 이것은 이 능선에는 남촌과 일본헌병대를 잇는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의 서울역인 경성역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일본인들의 선택을 받습니다. 헌병대와 경성역을 연결하는 길을 따라 일본인의 주거지가 들어서면서 점차 그 영역은 넓어지게 됩니다.
남촌에 비해 주변 환경이 좋은 후암동과 갈월동은 처음에는 상당한 고급주택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본래 비어있는 땅이기 때문에 크게 필지들이 분할되었고, 그 곳에는 관사를 비롯한 고급 일본 주택들이 들어섭니다.

(용산시가도(부분) - 1927년
서울역과 헌병대의 사이길 주변으로 주거지가 형성되었으며, 삼판소학교(현 삼광초등학교)의 모습도 보인다.)



저희가 답사를 시작한 곳은 후암동과 갈월동이 시작되는 서울역 앞 게이트타워 앞에서 출발하였습니다. 후암동과 갈월동 지역은 남산 자락을 가로질러 위치하기 때문에 중간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곳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집을 짓기 위해서는 견치석을 이용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집을 지은 곳이 많았습니다.


(견치석을 쌓은 축대)
견치석(犬齒石)은 한자 그대로 하자면 개 이빨이지만 사실은 송곳니를 나타내는 말로 견치석은 안쪽이 뾰족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견치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견치석 축대를 바탕으로 그 위에는 일본인들의 주거들이 다양한 크기의 필지에 다양한 모습으로 대형 주택에서 연립주택까지 건축되어졌습니다.




일본인들은 전통적인 주거지는 가장 높은 곳에 성을 중심으로 성과 멀어질수록 하층민이 사는 주거지가 형성이 됩니다. 남산기슭에 위치한 후암동과 갈월동 역시 높은 곳에 위치할수록 고급주거지가 위치합니다.




1927년과 현재의 비교 – 과거의 길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현재 대형 빌라들이 들어서 있다.

남산과 가까운 곳에는 조선은행의 사택이 위치하였습니다. 광복 후에 이 지역은 고급 주택지역이 되었으며, 이후 큰 빌라들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당시 지어진 사택들이 고급주택의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선은행 사택지역의 고급빌라(좌)와 당시의 지어진 사택<우> )

일본인의 주거지로 확장된 후암동과 갈월동을 이어서 남쪽으로 더욱 확장이 되기 시작합니다. 용산을 넘어 영등포가 서울로 편입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의 기억을 갖고 있는 남촌과 동대문 밖과 반대로 남촌과 후암동, 갈월동은 아직 일본인들의 기억을 갖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