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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달처럼 2012. 1. 15. 14:29

               너를 사랑한다

 

                                       강 은 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제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들이 제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사별한 남편에게 전하는 추모의 시로 고백의 태도를 보여 주는 시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상실 또는 부재로 말미암은 공백을 애닯아 한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상실 또는 부재로 말미암은 하나의 깨달음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 깨달음은, 뺨이 빨간 사과의 성숙 뒤에는 “바람”같은 자연의 힘, 또는 한송이 꽃을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도록 보살피는, “꽃”같은 생성의 힘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 깨달음의 내용을 “꽃 속에 피는 꽃‘이라는 매우 아름다운 표현으로써 명명하였다. 그 깨달음은 시인에게 ”의자“의 공백으로 아리게, 따갑게 소용돌이 치는 ”너“의 부재로부터 출발한다.

 

-시집 “초록거미의 사랑”에서 시인은 남편을 “L.J.N."으로 호칭했다.

그 호칭으로 불린 인물은 아내 강은교와 ”70년대“동인을 결성하여 시작의 길을 나섰던 임정남이다. 젊은 시절의 그는 아내와 같은 길에 섰었던 만큼, 아내의 시에 자주 쓴소리를 쏟아놓기도 했었다.

 

             그 점은 남편-아내 같은 가까운 사이에서도 극히 경계해야할 태도이다.

대학 동기이기도 한 그들은 같은 문학, 시인의 길을 걸었던 동지였으면서 연인이었고 동반자였다.

그들은 결혼 이후 아내의 생명을 건 긴 투병의 시간을 함께 겪어야 했고, 이른바 이상주의자였던 남편의 고초를 함께 겪기도 했다.

 

위와 같은 시인의 애정 곡선을 보면 ”초록거미의 사랑“은 시인 강은교가 망부에게 보내는 추모시 몇 편을 담아낸, 곡진한 사랑을 그려낸 시집이다.

 

시 ”너를 사랑한다“는 아마도 강은교의 시작 생애가 빚어낸 가장 큰 성과물의 하나로 평가하여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처럼 상찬의 뜻을 표하는 것은 그 시가 시인의 남편을 잃은 특수한 경우을 애닯게 그려낸 시이면서도, 또한 모든 사람, 목숨을 가진 모든 생물,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사에 두루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일반적 진실을 깊이 있게 그려낸 것으로도 부각된다는 점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시 “너를 사랑한다”는 시인 개인이 평생의 반려를 잃은, 특수한 아픔을 흐느낀 격조 높은 연가, 애가에 해당한다.

그러면서 또한 그 시는, 모든 인간과 자연이 이룩한 성취에는 그 성취를 이루도록 보살핀 어떤 도움의 힘이 존재한다는 삶의 일반적 진실을 토로한

증도가(證道歌)라고 이해할 수 있다.

 

 

 

권오만(문학평론가. 서울시립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