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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낙화 / 조지훈

달처럼 2012. 3. 5. 12:34

낙화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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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詩 감상: 정끝별·시인]
  • 천지에 꽃 피는 소리 가득하다.
    등성이는 등성이대로 기슭은 기슭대로 봄꽃들 넘쳐난다.
    껍질만 살짝 문질러도 생강 냄새가 확 풍기는, 산수유꽃 닮은 생강나무꽃,
    사람 환장하게 하는, 산복사꽃, 개살구꽃, 제비꽃, 메꽃, 달맞이꽃, 애기똥풀꽃, 쑥부쟁이꽃 본 적 있다.
    이 꽃들의 소요!
    사람 홀린다는 흰 동백꽃, 바람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꿩의바람꽃,
    아침이면 수줍은 듯 고개 숙이고 있다.
    해가 나면 자줏빛 꽃잎을 활짝 연다는 바람난 처녀꽃,
    엘레지꽃, 홀아비바람꽃, 너도바람꽃, 며느리배꼽꽃은 아직 못 보았다.
    저 꽃들의 고요!
  • "어진 이는 만월(滿月)을 경계하고/
    시인은 낙화를 찬미하나니/
    그것은 모순의 모순이다"(한용운 〈모순〉)라고 했거늘,
    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세속의 분별과 속도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는 사람이리라.
    올해로 40주기를 맞는 조지훈(1920~1968) 시인은
    섭리로서의 소멸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보여준 시인이다.
    '지조(志操)'를 지킨 논객이자, '주정(酒酊)'의 교양과 '주격(酒格)'의 품계를 변별했던 풍류를 아는 학자였으며,
    무엇보다 낙화를 찬미할 줄 아는 시인이었다.
  • 이 시는 화두처럼 시작한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꽃은 바람에 지지 않는다.
    피면 지고, 차면 이울기 마련이라서, 꽃은 꽃의 시간이 다해서 지는 것이다.
    저 꽃을 지게 하는 건, 바람이 아니라 밤을 아침으로 바꾸는 시간인 것이다.
    시인은 촛불이 켜진 방안에서, 주렴 밖으로 꽃이 지는 것을 보고 있다.
    아니 꽃이 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리라.
    돋았던 별이 하나 둘 스러지는 새벽, 먼 산의 소쩍새가 울고, 뜰에는 꽃이 지고 있다.
    달빛이 고즈넉했던지 꽃 지는 그림자가 미닫이에 비친다.
    방 안의 촛불을 꺼야, 지는 꽃이 빛을 발한다.
    인간의 촛불을 꺼야, 어둠 속에서 목숨이 지는 자연의 꽃이 내는 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다.
  • 그는 범종소리를, 과실이 가지에서 떨어지는 소리에 비유한 적이 있다.
    "허공에서 떨어진다. 떨어진 그 자리에서/
    종소리는 터져서 빛이 되고 향기가 되고/
    다시 엉기고 맴돌아/
    귓가에 가슴 속에 메아리 치며 종소리는/
    웅 웅 웅 웅……/
    삼십삼천(三十三天)을 날아오른다 아득한 것"(〈범종(梵鐘)〉)이라고.
    그 새벽에도 꽃이 지는 소리 웅 웅 웅 웅…… 아득했으리라.
    흰 창호지문을 물들이는, '우련(보일 듯 말 듯 은은하게)' 붉은, 낙화의 그림자!
    지는 꽃의 그림자를 나는 이 시에서 처음 배웠다.
    꽃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 꽃이 다시 보인다는 것도.
    밤새 진 꽃들 한 치는 쌓이리라.
    꽃은, 진 후에 더욱 꽃이기에, 지는 꽃의 슬픔을 이리 높고 깊게 맞을 일이다.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이 과묵한 슬픔 앞에 목이 멘다.

     
출처 : 그대와 함께하는 세상
글쓴이 : 석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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