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의 한국 명단편 100선](6)
이태준 '달밤'
작가 황석영이 뽑은 한국의 명단편 100선은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mhdn 와 경향신문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기획물입니다. 명단편 선정은 황석영 작가와 문학평론가 신수정 교수(명지대 문예창작과_문학동네 편집위원)가 함께 했습니다. 황석영 작가는 단편을 읽음으로써 역사서나 경제·사회학 전문서적보다 훨씬 우리의 삶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친년과 바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을까?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부분
전쟁과 남북의 분단은 우리 문학사를 두 동강이로 잘라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인들의 인생과 문학을 ‘실종’시켰다. 남북 양측의 독재체제에서 내쫓겼던 그들의 문학과 삶은 다행이도 남한의 민주화 과정이 진전되면서 복원할 수 있었고, 이는 북측에 대한 직·간접적인 압력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예로서 분단의 극복이란 ‘좌빨 타령’이나 ‘북에 가서 살라’는 폭언과 편향된 생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한의 올바른 민주주의의 실현에 의해서 획득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태준에 대하여 쓰면서 서두에 백석의 ‘마지막 시’를 인용한 것은, 이 시가 어쩌면 월북한 이태준의 말년을 빛바랜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춰주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해방되던 무렵 신의주에 홀로 살던 백석의 흔적이 나중에 알려진 이 시로 남아 있다. 시 쓰기를 집어치우고 생계를 위하여 측량기사가 되었던 백석의 이 시에는, 시를 쓰지 않는 기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냉혹한 현실이 드러나 있다. 이후 월북이 아니라 재북하고 있던 초기에 그가 행사시나 선동시 몇 편을 남겼다고 하여, 백석이 시인으로 되돌아갔다고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그의 마지막 간절한 시인의 노래였던 셈이다. 해방 이후 소설가 이태준의 급진적인 변화와 월북한 뒤의 처절한 몰락은 ‘인생파’로서의 그의 소설보다 더욱 소설적인 것이었다.
-中 略-
달밤’과 ‘밤길’의 제목도 서로 뒤집어놓은 것 같은 두 작품을 놓고 며칠 동안이나 저울질하다가 ‘밤길’이 매끈하게 군더더기 없이 잘 빠지기는 하였으나 어딘가 시궁창을 수채화로 ‘쌈박하게’ 그려낸 것처럼 작자의 관조가 믿기질 않아서 내려놓기로 한다. 역시 ‘달밤’을 남겨놓고 보니 그 어느 땜장이의 말처럼 소시민적이고 뭔가 약한 느낌이 전해지는 이 작품은 어울리지 않게 힘이 들어간 것보다는 문인화의 붓자국처럼 유연하지만 기개도 있어 보인다.
‘달밤’에서 성북동으로 이사 간 ‘나’는 바보 신문배달부 황수건을 만나고 그곳이 시골이라고 느낀다. 이태준 당대에조차 도시에서는 사라진 바보와 대화하면서 화자는 순수한 인간의 정을 느낀다. 우리 어릴 적에 어느 동네에나 있었던 ‘미친년’이나 ‘바보’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그것들은 추억과 그리움같이 근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버렸던 것일까?
나는 전집에 실린, 1943년 무렵 이태준이 성북동 자택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차녀 소남, 장녀 소명, 부인 이순옥, 차남 유진, 이태준, 안고 있는 막내딸 소현, 장남 유백이라고 사진설명이 되어있는데 온 식구가 어린 막내만 빼고는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다음은 이태준의 단편소설 ‘달밤’ 전문입니다.]
달밤 / 이태준
성북동(城北洞)으로 이사 나와서 한 대엿새 되었을까, 그날 밤 나는 보던 신문을 머리맡에 밀어 던지고 누워 새삼스럽게, “여기도 정말 시골이로군!” 하였다. 무어 바깥이 컴컴한 걸 처음 보고 시냇물 소리와 쏴― 하는 솔바람 소리를 처음 들어서가 아니라 황수건이라는 사람을 이날 저녁에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 몇 마디 사귀지 않아서 곧 못난이란 것이 드러났다. 이 못난이는 성북동의 산들보다 물들보다, 조그만 지름길들보다 더 나에게 성북동이 시골이란 느낌을 풍겨 주었다. 서울이라고 못난이가 없을 리야 없겠지만 대처에서는 못난이들이 거리에 나와 행세를 하지 못하고, 시골에선 아무리 못난이라도 마음놓고 나와 다니는 때문인지, 못난이는 시골에만 있는 것처럼 흔히 시골에서 잘 눈에 뜨인다. 그리고 또 흔히 그는 태고 때 사람처럼 그 우둔하면서도 천진스런 눈을 가지고, 자기 동리에 처음 들어서는 손에게 가장 순박한 시골의 정취를 돋워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황수건이는 열시나 되어서 우리집을 찾아왔다. 그는 어두운 마당에서 꽥 지르는 소리로, “아, 이 댁이 문안서…….” 하면서 들어섰다. 잡담 제하고 큰일이나 난 사람처럼 건넌방 문 앞으로 달려들더니, “저, 저 문안 서대문 거리라나요, 어디선가 나오신 댁입쇼?” 한다. 보니 합비는 안 입었으되 신문을 들고 온 것이 신문 배달부다. “그렇소, 신문이오?” “아, 그런 걸 사흘이나 저, 저 건너쪽에만 가 찾었습죠. 제기…….” 하더니 신문을 방에 들이뜨리며, “그런뎁쇼, 왜 이렇게 죄꼬만 집을 사구 와 곕쇼. 아, 내가 알었더면 이 아래 큰 개와집도 많은걸입쇼…….” 한다. 하 말이 황당스러워 유심히 그의 생김을 내다보니 눈에 얼른 두드러지는 것이 빡빡 깎은 머리로되 보통 크다는 정도 이상으로 골이 크다. 그런데다 옆으로 보니 장구 대가리다. “그렇소? 아무튼 집 찾느라고 수고했소.” 하니 그는 큰 눈과 큰 입이 일시에 히죽거리며, “뭘입쇼, 이게 제 업인뎁쇼.” 하고 날래 물러서지 않고 목을 길게 빼어 방 안을 살핀다. 그러더니 묻지도 않는데, “저는입쇼, 이 동네 사는 황수건이라 합니다…….” 하고 인사를 붙인다. 나도 깍듯이 내 성명을 대었다. 그는 또 싱글벙글하면서, “댁엔 개가 없구먼입쇼.” 한다. “아직 없소.” 하니, “개 그까짓 거 두지 마십쇼.” 한다. “왜 그렇소?” 물으니, 그는 얼른 대답하는 말이, “신문 보는 집엔입쇼, 개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한다. 이것 재미있는 말이다 하고 나는, “왜 그렇소?” 하고 또 물었다. “아, 이 뒷동네 은행소에 댕기는 집엔입쇼, 망아지만한 개가 있는뎁쇼, 아, 신문을 배달할 수가 있어얍죠.” “왜?” “막 깨물랴고 덤비는걸입쇼.” 한다. 말 같지 않아서 나는 웃기만 하니 그는 더욱 신을 낸다. “그눔의 개 그저, 한번, 양떡을 멕여 대야 할 텐데…….” 하면서 주먹을 부르대는데 보니, 손과 팔목은 머리에 비기어 반비례로 작고 가느다랗다. “어서 곤할 텐데 가 자시오.” 하니 그는 마지못해 물러서며, “선생님, 참 이선생님 편안히 주믑쇼. 저이 집은 여기서 얼마 안 되는 걸입쇼.” 하더니 돌아갔다. 그는 이튿날 저녁, 집을 알고 오는데도 아홉시가 지나서야, “신문 배달해 왔습니다.” 하고 소리를 치며 들어섰다. “오늘은 왜 늦었소?” 물으니, “자연 그럽죠.” 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는 워낙 이 아래 있는 삼산학교에서 일을 보다 어떤 선생하고 뜻이 덜 맞아 나왔다는 것, 지금은 신문 배달을 하나 원배달이 아니라 보조배달이라는 것, 저희 집엔 양친과 형님 내외와 조카 하나와 저희 내외까지 식구가 일곱이라는 것, 저희 아버지와 저희 형님의 이름은 무엇무엇이며, 자기 이름은 황가인데다가 목숨수(壽)자하고 세울건(建)자로 황수건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노랑수건이라고 놀리어서 성북동에서는 가가호호에서 노랑수건 하면, 다 자긴 줄 알리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다가 이날도, “어서 그만 다른 집에도 신문을 갖다 줘야 하지 않소?” 하니까 그때서야 마지못해 나갔다. 우리집에서는 그까짓 반편과 무얼 대꾸를 해가지고 그러느냐 하되, 나는 그와 지껄이기가 좋았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열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고, 그와는 아무리 오래 지껄이어도 힘이 들지 않고, 또 아무리 오래 지껄이고 나도 웃음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 기분이 거뜬해지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중만 아니면 한참씩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어떤 날은 서로 말이 막히기도 했다. 대답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막히었다. 그러나 그는 늘 나보다 빠르게 이야깃거리를 잘 찾아냈다. 오뉴월인데도 ‘꿩고기를 잘 먹느냐?’고도 묻고, ‘양복은 저고리를 먼저 입느냐 바지를 먼저 입느냐?’고도 묻고 ‘소와 말과 싸움을 붙이면 어느 것이 이기겠느냐?’는 둥, 아무튼 그가 얘깃거리를 취재하는 방면은 기상천외로 여간 범위가 넓지 않은 데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나는 ‘평생 소원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그까짓 것쯤 얼른 대답하기는 누워서 떡먹기’라고 하면서 평생 소원은 자기도 원배달이 한번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남이 혼자 배달하기 힘들어서 한 이십 부 떼어 주는 것을 배달하고, 월급이라고 원배달에게서 한 삼 원 받는 터이라 월급을 이십여 원을 받고, 신문사 옷을 입고, 방울을 차고 다니는 원배달이 제일 부럽노라 하였다. 그리고 방울만 차면 자기도 뛰어다니며 빨리 돌 뿐 아니라 그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겠노라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럴 것 없이 아주 신문사 사장쯤 되었으면 원배달도 바랄 것 없고 그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상관할 바 없지 않겠느냐?’ 한즉 그는 뚱그래지는 눈알을 한참 굴리며 생각하더니 ‘딴은 그렇겠다’고 하면서, 자기는 경난이 없어 거기까지는 바랄 생각도 못 하였다고 무릎을 치듯 가슴을 쳤다. 그러나 신문 사장은 이내 잊어버리고 원배달만 마음에 박혔던 듯, 하루는 바깥마당에서부터 무어라고 떠들어 대며 들어왔다. “이선생님? 이선생님 곕쇼? 아, 저도 내일부턴 원배달이올시다. 오늘 밤만 자면입쇼…….” 한다. 자세히 물어 보니 성북동이 따로 한 구역이 되었는데, 자기가 맡게 되었으니까 내일은 배달복을 입고 방울을 막 떨렁거리면서 올 테니 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이란 게 그러게 무어든지 끝을 바라고 붙들어야 한다’고 나에게 일러주면서 신이 나서 돌아갔다. 우리도 그가 원배달이 된 것이 좋은 친구가 큰 출세나 하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진실로 즐거웠다. 어서 내일 저녁에 그가 배달복을 입고 방울을 차고 와서 쭐럭거리는 것을 보리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그는 오지 않았다. 밤이 늦도록 신문도 그도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신문도 그도 오지 않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야, 이날은 해도 지기 전인데 방울 소리가 요란스럽게 우리집으로 뛰어들었다. ‘어디 보자!’ 하고 나는 방에서 뛰어나갔다. 그러나 웬일일까, 정말 배달복에 방울을 차고 신문을 들고 들어서는 사람은 황수건이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다. “왜 전엣사람은 어디 가고 당신이오?” 물으니 그는, “제가 성북동을 맡았습니다.” 한다. “그럼, 전엣사람은 어디를 맡았소?” 하니 그는 픽 웃으며, “그까짓 반편을 어딜 맡깁니까? 배달부로 쓸랴다가 똑똑지가 못하니까 안 쓰고 말었나 봅니다.” 한다. “그럼 보조배달도 떨어졌소?” 하니, “그럼요, 여기가 따루 한 구역이 된걸이오.” 하면서 방울을 울리며 나갔다. 이렇게 되었으니 황수건이가 우리집에 올 길은 없어지고 말았다. 나도 가끔 문안엔 다니지만 그의 집은 내가 다니는 길 옆은 아닌 듯 길가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까운 친구를 먼 곳에 보낸 것처럼, 아니 친구가 큰 사업에나 실패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못 만나는 섭섭뿐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기도 하였다. 그 당자와 함께 세상의 야박함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한데 황수건은 그의 말대로 노랑수건이라면 온 동네에서 유명은 하였다. 노랑수건 하면 누구나 성북동에서 오래 산 사람이면 먼저 웃고 대답하는 것을 나는 차츰 알았다. 내가 잠깐씩 며칠 보기에도 그랬거니와 그에겐 우스운 일화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삼산학교에 급사로 있을 시대에 삼산학교에다 남겨 놓고 나온 일화도 여러 가지라는데, 그 중에 두어 가지를 동네 사람들의 말대로 옮겨 보면, 역시 그때부터도 이야기하기를 대단 즐기어 선생들이 교실에 들어간 새 손님이 오면 으레 손님을 앉히고는 자기도 걸상을 갖다 떡 마주 놓고 앉는 것은 무론, 마주 앉아서는 곧 자기류의 만담 삼매로 빠지는 것인데, 한번은 도 학무국에서 시학관이 나온 것을 이 따위로 대접하였다. 일본말을 못 하니까 만담은 할 수 없고 마주 앉아서 자꾸 일본말을 연습하였다. “센세이 히, 오하요 고자이마스카(선생님, 안녕하세요)?…… 히히 아메가 후리마스(비가 옵니다). 유키가 후리마스카(눈이 옵니까)? 히히…….” 시학관도 인정이라 처음엔 웃었다. 그러나 열 번 스무 번을 되풀이하는 데는 성이 나고 말았다. 선생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종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한 선생이 나와 보니 종 칠 것도 잊어버리고 손님과 마주 앉아서 ‘오하요 유키가 후리마스카……’ 하는 판이다. 그날 수건이는 선생들에게 단단히 몰리고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고 했으나,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그예 쫓겨 나오고 만 것이다. 그는, “너의 색시 달아난다.” 하는 말을 제일 무서워했다 한다. 한번은 어느 선생이 장난엣말로, “요즘 같은 따뜻한 봄날엔 옛날부터 색시들이 달아나기를 좋아하는데 어제도 저 아랫말에서 둘이나 달아났다니까 오늘은 이 동리에서 꼭 달아나는 색시가 있을걸…….” 했더니 수건이는 점심을 먹다 말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는 어서 바삐 하학을 시키고 집으로 갈 양으로 오십 분 만에 치는 종을 이십 분 만에, 삼십 분 만에 함부로 다가서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루는 나는 거의 그를 잊어버리고 있을 때, “이선생님 곕쇼?” 하고 수건이가 찾아왔다. 반가웠다. “선생님, 요즘 신문이 걸르지 않고 잘 옵쇼?” 하고 그는 배달 감독이나 되어 온 듯이 묻는다. “잘 오, 왜 그류?” 한즉 또, “늦지도 않굽쇼, 일쯕이 제때마다 꼭꼭 옵쇼?” 한다. “당신이 돌을 때보다 세 시간은 일쯕이 오고 날마다 꼭꼭 잘 오.” 하니 그는 머리를 벅적벅적 긁으면서, “하루라도 걸르기만 해라. 신문사에 가서 대뜸 일러바치지…….” 하고 그 빈약한 주먹을 부르댄다. “그런뎁쇼, 선생님?” “왜 그류?” “삼산학교에 말씀예요, 그 제 대신 들어온 급사가 저보다 근력이 세게 생겼습죠?” “나는 그 사람을 보지 못해서 모르겠소.” 하니 그는 은근한 말소리로 히죽거리며, “제가 거길 또 들어가 볼랴굽쇼, 운동을 합죠.” 한다. “어떻게 운동을 하오?” “그까짓 거 날마당 사무실로 갑죠. 다시 써달라고 졸라 댑죠. 아, 그랬더니 새 급사란 녀석이 저보다 크기도 무척 큰뎁쇼, 이 녀석이 막 불근댑니다그려. 그래 한번 쌈을 해야 할 턴뎁쇼, 그 녀석이 근력이 얼마나 센지 알아야 뎀벼들 턴뎁쇼…… 허.” “그렇지, 멋모르고 대들었다 매만 맞지.” 하니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또 은근한 말을 한다. “그래섭쇼, 엊저녁엔 큰 돌멩이 하나를 굴려다 삼산학교 대문에다 놨습죠. 그리구 오늘 아침에 가보니깐 없어졌는뎁쇼. 이 녀석이 나처럼 억지루 굴려다 버렸는지, 뻔쩍 들어다 버렸는지 그만 못 봤거든입쇼, 제―길…….” 하고 머리를 긁는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얼 생각한 듯 손뼉을 탁 치더니, “그런뎁쇼, 제가 온 건입쇼, 댁에선 우두를 넣지 마시라구 왔습죠.” 한다. “우두를 왜 넣지 말란 말이오?” 한즉, “요즘 마마가 다닌다구 모두 우두들을 넣는뎁쇼, 우두를 넣으면 사람이 근력이 없어지는 법인뎁쇼.” 하고 자기 팔을 걷어 올려 우두 자리를 보이면서, “이걸 봅쇼. 저두 우두를 이렇게 넣기 때문에 근력이 줄었습죠.” 한다. “우두를 넣으면 근력이 준다고 누가 그립디까?” 물으니 그는 싱글거리며, “아, 제가 생각해 냈습죠.” 한다. “왜 그렇소?” 하고 캐니, “뭘…… 저 아래 윤금보라고 있는데 기운이 장산뎁쇼. 아 삼산학교 그 녀석두 우두만 넣었다면 그까짓 것 무서울 것 없는뎁쇼, 그걸 모르겠거든입쇼…….” 한다. 나는, “그렇게 용한 생각을 하고 일러주러 왔으니 아주 고맙소.” 하였다. 그는 좋아서 벙긋거리며 머리를 긁었다. “그래 삼산학교에 다시 들기만 기다리고 있소?” 물으니 그는, “돈만 있으면 그까짓 거 누가 고스카이(용인) 노릇을 합쇼. 밑천만 있으면 삼산학교 앞에 가서 뻐젓이 장사를 할 턴뎁쇼.” 한다. “무슨 장사?” “아, 방학될 때까지 차미 장사도 하굽쇼, 가을부턴 군밤 장사, 왜떡 장사, 습자지, 도화지 장사 막 합죠. 삼산학교 학생들이 저를 어떻게 좋아하겝쇼. 저를 선생들보다 낫게 치는뎁쇼.” 한다. 나는 그날 그에게 돈 삼 원을 주었다. 그의 말대로 삼산학교 앞에 가서 뻐젓이 참외 장사라도 해보라고. 그리고 돈은 남지 못하면 돌려오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그는 삼 원 돈에 덩실덩실 춤을 추다시피 뛰어나갔다. 그리고 그 이튿날, “선생님 잡수시라굽쇼.” 하고 나 없는 때 참외 세 개를 갖다 두고 갔다. 그리고는 온 여름 동안 그는 우리집에 얼른하지 않았다. 들으니 참외 장사를 해보긴 했는데 이내 장마가 들어 밑천만 까먹었고, 또 그까짓 것보다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은 그의 아내가 달아났단 것이다. 저희끼리 금실은 괜찮았건만 동서가 못 견디게 굴어 달아난 것이라 한다. 남편만 남 같으면 따로 살림나는 날이나 기다리고 살 것이나 평생 동서 밑에 살아야 할 신세를 생각하고 달아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요 며칠 전이었다. 밤인데 달포 만에 수건이가 우리집을 찾아왔다. 웬 포도를 큰 것으로 대여섯 송이를 종이에 싸지도 않고 맨손에 들고 들어왔다. 그는 벙긋거리며, “선생님 잡수라고 사왔습죠.” 하는 때였다. 웬 사람 하나가 날쌔게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더니 다짜고짜로 수건이의 멱살을 움켜쥐고 끌고 나갔다. 수건이는 그 우둔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꼼짝 못 하고 끌려 나갔다. 나는 수건이가 포도원에서 포도를 훔쳐 온 것을 직각하였다. 쫓아나가 매를 말리고 포돗값을 물어 주었다. 포돗값을 물어 주고 보니 수건이는 어느 틈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다섯 송이의 포도를 탁자 위에 얹어 놓고 오래 바라보며 아껴 먹었다. 그의 은근한 순정의 열매를 먹듯 한 알을 가지고도 오래 입 안에 굴려 보며 먹었다.
어제다. 문안에 들어갔다 늦어서 나오는데 불빛 없는 성북동 길 위에는 밝은 달빛이 깁을 깐 듯하였다. 그런데 포도원께를 올라오노라니까 누가 맑지도 못한 목청으로, “사…… 케…… 와 나…… 미다카 다메이…… 키…… 카…….” 를 부르며 큰길이 좁다는 듯이 휘적거리며 내려왔다. 보니까 수건이 같았다. 나는, “수건인가?” 하고 아는 체하려다 그가 나를 보면 무안해할 일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휙 길 아래로 내려서 나무 그늘에 몸을 감추었다. 그는 길은 보지도 않고 달만 쳐다보며, 노래는 그 이상은 외우지도 못하는 듯 첫 줄 한 줄만 되풀이하면서 전에는 본 적이 없었는데 담배를 다 퍽퍽 빨면서 지나갔다.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
출전:중앙1(19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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