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한 팝아트의 제왕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
Andy Worhol, the Greatest
2009.12.12 ~ 2010.04.04
서울시립미술관
앤디 워홀(Andy Warhol,1928~1987)은 미국의 미술가이자, 출력물 제작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였다. 시각주의 예술 운동의 선구자로, 팝아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산업 일러스트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에 화가, 아방가르드 영화, 레코드 프로듀서, 작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이민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상업 예술을 전공한 그는 1949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으로 명성을 쌓았다. 1960년대부터 그는 캠벨 수프 깡통이나 코카콜라 병 등 유명한 상품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실크스크린으로 바꾸어, 대량생산된 상품의 그림을 그리는 것만 아니라 작품 자체를 대량생산하였다. 그는 "예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뉴욕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에서 판화, 신발, 영화, 책 등을 만들어내었다. 워홀의 작품에는 의뢰를 받아 제작한 초상화나 광고도 포함되어 있다.
워홀의 작품세계는 대부분 미국의 물질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돈, 달러 기호, 식품, 잡화, 여자 구두, 유명인, 신문 스크랩 등을 그렸다. 그에게 이런 주제들은 미국 문화의 가치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코카 콜라는 언제나 코카 콜라다. 대통령이 마시는 코카 콜라는 내가 마시는 코카 콜라와 같은 그 콜라다". 그는 대중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이미지를 이용해 20세기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라디오에서 앤디 워홀 전시회를 알리는 광고가 나올 때마다 꼭 한 번 들러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어찌하다 보니 전시회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미국 피츠버그에 있다는 앤디 워홀 미술관을 일부러 찾아갈 수는 없어도 서울에 온 앤디 워홀의 작품을 만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3월 21일 휴일인데도 오전 근무가 있어 출근했다가 시댁에 가는 길에 1시간의 말미를 얻어 시립미술관 앞에 내렸다. 그러나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선 인파에 질려 포기하고, 다른 전시장에 들렀다가 일 주일 후인 28일 개장 시간에 맞춰 다시 찾았다.
사실 앤디 워홀의 이름은 우리 세대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30여 년 전 학창 시절에는 못 들어 보았고, 교직 생활을 하며 통합교과형으로 출제되는 언어영역 예술 분야 지문에서 처음 접했다. 팝아트를 개념으로는 이해했지만 눈으로 직접 볼 기회가 없었고, 상업 미술 논란에 대해서도 명쾌한 해답을 스스로 얻지 못했기에 이번 전시회는 호기심이 컸다.
서울시립미술관 로비 맞은편 벽면의 앤디 워홀 전시회 포스터
앤디 워홀은 1960년대 미국 사회가 대량 생산과 소비의 시대, 언론과 필름, 텔레비전 등 매스미디어의 시대로 변화되었을 때, 상업디자인에서 순수 예술가로 전향한 인물이다.
전시는 10개의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1. 앤디 워홀, 현대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팝 아트를 통해 아름다운 것만이 미술이라는 전통미술의 개념을 무너뜨리고, 일상의 모든 것이 미술이며 누구나 미술가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여 현대 미술을 바꾸어 놓았다.
이 코너 맨 앞에는 '찌그러진 캠벨 수프 깡통(비프 누들)'이 있다. 그의 캠벨 수프 연작은 그의 예술적 신조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이중적 면모를 담고 있다. 이 깡통들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정물화이다. 이것은 워홀이 전통적 예술 장르에 대해 깊은 존경과 지식이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이 이미지들은 대량생산의 복제품과 작가에 의해 디자인 된 소비 제품들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개념, 즉 예술가가 손으로 제작한 예술작품의 원본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코카콜라[2]'는 추상표현주의에서 영향을 받아 검은 색과 흰색의 붓질로 그려졌다. 크레용으로 스케치를 하고 그 위에 다시 붓으로 칠하여 그의 그림이 회화에서 실크스크린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역시 관람객의 관심이 집중된 작품은 1967년의 '마릴린'이다. 머리카락, 입술, 눈꺼풀 등이 과장되어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는 사물을 추상화시키고자 했던 워홀의 성향을 반영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인상깊었던 작품 중 하나는 '꽃'(1970)이다. 선명한 색의 히비스커스 꽃과 풍성한 풀이 열 점의 프린트로 만들어졌다. 앤디 워홀의 색채감을 알 수 있는 작품으로, 꽃이 캔버스 위에 떠 있는 듯 강렬하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작품을 알리는 펼침막
앤디 워홀 전과 신소장작품전이 동시에 열림
이른 시간에 미술관을 찾는 발길들
개장 시간이라 매표소에 아직 줄이 짧아서 다행
2. 나의 자화상, 영원한 아름다움과 일시적 아름다움
스타가 되고 싶어했던 앤디 워홀.
그는 자신이 영화나 잡지에서 볼 수 있는 할리우드 스타와 같은 모습으로 보이기를 원했다고 한다.
이 코너에는 워홀이 학생 때 드로잉한 '코를 파고 있는 소년'처럼 엉뚱하고 유머 있는 작품부터 할리우드 스타처럼 선글라스를 착용한 '자화상'(1964),
이중 삼중의 이미지로 제작된 1070년대의 '자화상'이 있다. 후자들은 자신의 내면을 감추고자 하는 워홀의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리라.
자화상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워홀이 담낭 수술 이후 심장부정맥으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986년에 제작한 자화상이다. 주로 검은 색과 회색, 청색이 쓰여 음울한 느낌을 준다. 수척한 얼굴, 예리한 눈빛, 사방으로 뻗친 머리카락의 얼굴이 화면 중간에 떠 있는 듯 보여 기이하다.
워홀이 죽기 1년 전 제작한 '자화상'
3. 성공한 디자이너에서 팝 아트의 제왕으로
앤디 워홀은 대학 졸업 후 뉴욕에서 <보그>, <하퍼스 바자>와 같은 유명 패션 잡지와 음반 표지 등의 상업 디자인으로 광고계에서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순수 예술가로 안정받는 것이었다. 워홀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미술과 문화 사업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미국인의 풍요로운 삶을 상징하는 일상용품이나 대중스타라는 소재는 그가 팝 아트의 제왕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적절한 선택이었다.
"이 나라에서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국이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물건을 살 수빡에 없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구나 텔레비전을 졸 수 있고, 누구나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다. 대통령도, 리즈 테일러도 코카콜라를 마신다."
이 코너에 있는 제임스 딘이 주연한 영화 '이유 없는 반항' 포스터는 제임스 딘이 일본어에 둘러싸인 채 스스로를 광고하는 모습이다. 미국의 소비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평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한편 비잔틴 카톨릭 신자인 워홀은 '성모자상', '최후의 만찬'을 제작하였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변형한 네 개의 흑백작품으로 전통의 권위와 유일성의 의미를 바꾸어 놓는다. 여기에서 다양한 '캠벨 수프 깡통'이 전시되어 있고 '브릴로 상자', '하인즈 케첩 상자' 등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하여 수십 개를 나란히 배치한 작품을 만난다. 풍요로운 미국의 표준적인 삶과 연관되어 있다.
전시실이 있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는 앤디 워홀의 작품 캠벨 수프 캔을 응용하였다.
4. 타임 캡슐, 워홀의 시대를 비추는 거울
앤디 워홀은 무엇이든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의 타임 캡슐 상자는 600여 개가 넘었다. 삶의 단상, 영화 홍보 브로슈어, 유명인의 신발, 앨범, 저서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잡지 표지에 실은 '마이클 잭슨'(인터뷰, 1982년 10월호)은 젊은 시절의 자연스런 모습이 담겨 있어서 더 반가웠고,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 친숙한 여배우 '메릴 스트립'의 초상화를 보는 재미도 좋았다.
5. 슈퍼스타 아이콘, 나는 할리우드를 사랑한다
워홀은 어릴 때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잡지 등을 보며 스타를 동경했고, 예술가가 된 후에도 스스로 스타가 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실 '팩토리'에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헐리우드 스타를 초대하여 친분을 쌓았다. 스타 초상화를 제작할 때 모두에게 익숙한 사진 이미지를 구해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이미지를 반복해서 찍었다. '붉은색 재키', '은색 리즈', '실버스타 스탤론', '잉그리드 버그먼', '마이클 잭슨', '비틀즈'...
6. 죽음과 재난, 냉정한 관찰자의 시각
앤디 워홀은 1962년, 비행기 추락 장면을 다룬 '129명이 제트기에서 죽었다'라는 기사를 본 후 '전기 의자', '교통 사고' 등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연작으로 제작했다. 워홀은 끔찍한 장면이라도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보게 되면 감각이 둔화되어, 그 내용과 이미지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이게 되는 대중의 심리를 말하려고 했던 것이다.
"때로는 삶에서 비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그것은 마치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무감각하게 느껴지곤 한다."
'앰뷸런스 사고'는 는 같은 사고 현장에 다녀 오던 앰뷸런스 두 대가 추돌한 사고르 다룬 작품으로 자유와 여가의 상징인 자동차가 죽음과 파괴의 도구로 변모되었음을 상기시킨다. 1964년에 제작한 '재키'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그 사건에 대해 매스미디어가 쉴 새 없이 쏟아 내는 이미지 중에서 행복했던 시절의 재클린과 장례식장의 재클린을 반복 배치하여 매스미디어에 의한 반복이 타인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드는 현상을 포착했다. '전기 의자'는 교도소의 사형집행실에서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실크스크린으로 반복된 이미지는 화려한 색채와 어우러져 죽음의 공간이라는 현실성이 사라진다. 인간의 존재를 배제한 사형 집행실의 공간 속에 공허한 전기 의자만을 중심에 배치한 이 작품의 이미지는 앤디 워홀의 작품 중 가장 기념비적인 것으로 꼽힌다.
앤디 워홀의 작품 '바나나'가 전사된 2층 벽면은 기념 촬영 장소가 되었다.
7. 빛과 그림자, 또 다른 실험
추상 이미지를 반복하고 패턴화하여 다양한 연상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회상', '그림자' 연작은 빛과 어둠이 주는 매혹적 추상적 특징을 살렸고, '위장' 연작은 추상적이면서 추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느낌을 준다. '산화'는 물감에 금속 가루를 섞어 바른 캔버스에, 초대한 친구들이 오줌을 누게 하여 산화된 이미지를 만들었다. 메탈 재료와 소변 본 사람이 섭취한 음식에 따라 패턴과 색이 변화하는 것을 실험했다고 한다.
내 개인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은 '그림자 1', '그림자 2' 연작이다.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린 종이에 스크린 프린트한 제작 기법도 새로웠고, 조형에서 벗어나 단순하게 처리한 그림자에서 신비한 우아미를 느낄 수 있었다.
8. 워홀의 최후의 만찬
처음 이 방에 들어섰을 때, 워홀의 작품을 종합적으로 편집한 영상실로 잘못 알았다.
이것은 1986년 미술품 딜러인 알렉산더 이오라스가 의뢰한 작품이다. 뉴저지의 한 주유소에서 구입한 최후의 만찬 플라스틱 조각과 드로잉, 그리고 그의 스튜디오 근처의 한국인 종교용품점에서 구입한 복제 사진으로 작업했다. 불가시광선이 비춰질 때에만 보이는 도료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손으로 칠해 불가시광선 속에서 자외선 발광으로 특정물질을 드러나게 하고, 형광으로 보이는 효과를 낸다.
9. 워홀의 친구들, 팝아트는 모든 사람을 좋아한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워홀이 관심을 가졌던 정치가, 음악가, 과학자, 문인 등의 초상화로 구성한 공간이다.
레닌, 마오,장 미셸 바스키아, 요셉 보이스, 베토벤 등이 눈에 띈다. 워홀이 초상화 연작 시리즈로 레닌을 택한 것은 그가 1970년대에 미국을 위협하는 존재로 연일 뉴스에 등장하여, 마치 헐리우드 배우나 팝 스타처럼 매스미디어를 통해 유명해져 많은 사람의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라 한다.
전시회를 볼 때 내 나름의 방식이 있다.
처음에는 작품 위주로 훑어보고, 두 번째는 설명을 보거나 도슨트의 해설을 들으며 꼼꼼히 보고, 마지막으로 복습하듯 다시 본다.
그런데 이 날은 가족과 약속한 시간이 있어서 절반의 성공밖에 못 거두었다. 벽면에 게시된 내용까지 메모하며 여덟 번째 코너를 관람할 때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미술관 밖에 도착했다고.
서둘러 나오다가 전시장 한 쪽 벽에서 앤디 워홀의 예술관을 압축한 듯한 문구를 읽었다.
"I like boring things."(나는 평범한 것들을 좋아한다.)
"예술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만 창조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받으면 좋아할 것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골랐고, 실크스크린으로 대량 생산하는 방법을 택했지만, 그는 그 길에서 예술이 추구해야 할 인간성 성찰이라는 철학을 담았다는 점에서 현대 미술의 한 지평을 열은 예술가이다.
10. 餘跡
앤디 워홀 전의 열 번째 코너는 '워홀 라이브, 삶이 곧 예술이다'였지만, 시간 관계상 못 보고 나온 아쉬움을 이영훈 노래비 사진으로 대신한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이어지는 광장 모퉁이에는 대중음악 작곡가 이영훈의 노래비가 있다.
이문세가 부른 '광화문 연가'의 작곡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앤디 워홀 전 공식 사이트로 전시 작품 일부가 탑재되어 있다.
(2010.04.03. 문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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