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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기행 4. 김대건 신부 출생지 '솔뫼성지'

달처럼 2012. 6. 3. 16:37

 

송악IC를 지나 잘 뚫린 4차선도로를 달린다. 음섬포구와 맷돌포구를 지나 15분쯤을 달리면 왼쪽으로 삽교방조제로 이어진다.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인 솔뫼성지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34번 국도로 갈아 타고 가다가 622번 지방도와 만나는 지점에서 좌회전한다.

이곳에서부터 솔뫼성지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내포의 들판이 펼쳐진다. 내포 들녘은 어린 김대건 신부가 자신의 가족들과 더불어 고향을 등지며 걷던 들녘이다.

 

‘솔뫼’는 소나무가 우거진 산 이라는 뜻이다.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평야지대이기 때문에 이정도의 높이로도 산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솔뫼성지는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114번지 일대이다.

 

 

 

 

 

 

 

김대건(金大建1821~1846)신부는 이곳 솔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이며 세례명이 ‘안드레아’이다.

1836년 프랑스 출신 모방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예비 신학생으로 선발된다.

한양에서 역관인 유진길(劉進吉, 1791~1839)에게 중국어를 배운 후 모방 신부의 소개장을 가지고 16세의 나이로 중국으로 떠난다. 유진길은 엥베르 주교, 모방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1839년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한 순교자다.

 

 

김대건은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지부에서 서양의 학문과 프랑스어, 중국어, 라틴어를 배운다. 그의 스승이 칼레리 신부이다. 김대건은 이곳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1842년 수업을 마치고 고국에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한다. 당시 조선은 1839년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대단할 때다. 파리외방전교회가 아니었으면 당시 천주교의 선교는 불가능 하였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를 조명하기 위해서는 파리외방전교회란 단체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아시아의 선교를 목적으로 1653년 로마 교황청은 프랑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파리외방전교회를 설립한다. 이 본부를 프랑스 파리에 두었다. 가톨릭 선교를 위해 창설한 이 단체는 중국 일본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그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교회를 운영할 수 있는 선교방법을 취하게 하였다.

1831년 브뤼에르 주교가 처음으로 한국 선교를 위해 오던 중에 1831년 사망한 이후 앵베르, 샤스탕, 모방 신부 등이 파견되어 순교와 박해의 고난을 겪기도 한다. 이들의 헌신적인 선교와 순교의 피는 한국 가톨릭의 기반을 형성했다.

 

 

페레올 주교는 신학생 김대건에게 조선에 잠입하라고 분부한다. 1845년 1월 입국에 성공한 후 약화된 조선 교세 확장을 만회하려고 노력한다. 프랑스 외방전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쪽배를 이용하여 상해로 가야했다. 이배에는 사공을 포함하여 농사꾼과 목수로 구성된 11명이 타고 있었는데, 가마니로 만든 돛을 달고 가다 상해 인근에서 조난을 당하기도 한다. 배 바닥에 구멍이 뚫려서 물을 퍼내면서 항해를 계속하였다는 이 조각배의 이름은 ‘라파엘로호’다. 이런 배에서 극적으로 구조되어 상해에 도착한다. 예수 당시에 바울의 선교 활동 같은 항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이런 김대건 신부의 신앙심과 용기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는 비로소 중국 금가항신학교에서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신부가 된다. 같은 해 8월 페레올 주교, 다블뤼(1818~1866) 주교와 함께 상해를 떠나 충청남도 강경에 잠입한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선교사의 입국을 위한 비밀 항로의 개척을 위해 백령도 부근을 답사하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에게 보내는 유서를 쓴 후 순교 당한다. 그의 나이 불과 26세였다.

 

 

시신은 경기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미리내)에 안장되었다가 몇 곳으로 나누어 안치중이다. 그는 1984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위(聖人位)에 올렸다.

 

성지 깊숙이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다.

 

이 집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l816년 순교),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김대건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태어나고 자란 집이다.

김대건 신부는 이곳에서 태어나 7세 때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한다.

김대건 신부의 할아버지 김택현이 이곳을 떠날 결심을 한 것은 천주교 박해 때문이었다.

 

 

 

김대건신부 기념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1739~1814)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면천군수로 재직하면서 천주교를 믿었다. 그는 이존창李存昌, 1752~1801)에게 천주교의 복음을 듣고 벼슬을 버리고 교인이 된다. 이존창은 권철신의 제자로 이곳 내포지방의 사도로 불릴 정도로 전도를 많이한 사람이다. 1795년 체포되어 6년간 연금되었다가 공주에서 참수당한 순교자이다. 한편 김진후 역시 180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10년 이상의 옥살이를 하다가 1814년에 감옥에서 순교한다.

 

 

이때부터 솔뫼는 천주교 마을이 된다. 천주교의 박해는 진산사건으로 촉발한다. 천주교의 교리는 유교적인 제사문제를 심하게 건드렸다. 1791년 전라도 진산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살라버렸다. 이 사건은 조정에 알려지면서 크게 확산된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사형을 당한다. 그러나 조정은 이미 이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당파가 만들어 진다. 조정의 실권은 남인계열이 잡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신서파와 공서파로 나누어지면서 대립한다.

 

 

 

 

 

 

 

김대건 신부의 생가는 본래 대저택이었다고 하는데 안채만 복원한 상태다. 한옥이 정결하고 깔끔하다. ‘대건당’이라는 당호를 읽는다. 우물과 담 너머로 보이는 솔숲이 평화롭다. 솔뫼성지는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고 밝다. 그러나 이 평화롭고 밝음 속에 신앙의 자유를 위해 재산과 벼슬을 버리고 순교한 김대건 신부 조상들의 삶이 어른거려 감동이일렁인다.

 

 

 

김대건 할아버지 김태현은 김대건의 아버지 김제준, 손자 김대건을 비롯한 식솔들과 함께 이곳을 떠났던 1827년 무렵의 조선은 천주교인에게는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용인으로 이주한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 김제준(金濟俊, 1796~1839)은 선교에 열성을 보이며 아들을 사제로 만들 결심을 한다.

그 자신은 김대건 신부가 마카오에서 신부수업을 받고 있던 기간인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던 김대건은 1845년 8월17일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로 부터 사제로 서품되어 그해 10월 귀국한다. 용인 일대에서 사목을 하면서 모친을 잠시 만난 후에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순교를 당한다. 증조부에서 시작된 그의 집안의 순교는 김대건 신부를 포함하여 30년간 4대로 이어진다. 이것은 아마 세계에도 그 유례가 없는 순교의 역사다. 지금 솔뫼성지에는 김대건 신부의 조상들 때 이미 자라던 늙은 소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김대건 신부 기념비

 

 

글 자료 출처 : 김경식의 문학기행

 

 


 

 

 
 
 

솔뫼성지 안내

충청도 내포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솔뫼는 ‘소나무로 이루어진 산’, 곧 송산(松山)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내포를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 하였다. ‘내포’는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와 포구를 이루어 배들이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는 장소이다. 내포를 비롯하여 서해안 여러 지역에는 1784년 이승훈 세례 이전부터 중국으로부터 건네지는 서학 내지 천주교 문화와 신앙을 접하고 있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확산되었던 실학사상의 분파인 서학이 내포 선비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내포의 서학자들은 서울의 실학자들과 교류를 하면서 내포의 양반, 중인, 서민 등 모든 계층에서 천주교로 발전하였다.

김대건 신부님의 10대 선조인 김희현이 아산 현감을 역임하면서 가문이 내포와 인연을 갖게 되었다. 9대 선조인 김의직이 충청병마절도사를 지내며 임진왜란에서 전훈을 세우자 가문이 대대로 토지와 벼슬을 보유하게 되었다. 사헌부감찰과 통훈대부를 지낸 8대 선조인 김수완 때부터 가문은 솔뫼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1784년경 김대건 신부님의 백조부 김종현과 조부 김택현이 내포 사도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김범우의 집에서 교리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자 가장인 증조부 김진후(비오)도 입교하여 가문이 천주교 신앙으로 귀의, 솔뫼를 ‘내포 신앙의 못자리’로 만들었다. 김 신부님 가문은 천주교 신앙에 귀의한 후 잦은 박해로 가족들이 여러 차례 투옥되고 고문을 받다가 순교까지 하여 솔뫼를 ‘순교자의 고향’으로 만들었다.

1906년부터 합덕본당 주임 크렘프 신부님은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하여 인근의 토지매입을 시작하였고, 1945년에는 백 빌리버 신부님이 솔뫼에 김대건 신부 복자비(福者碑)를 설립하였다. 1973년부터 솔뫼 성역화 사업을 계획적으로 시작하여 1982년에 대전교구는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고, 국가와 지자체의 도움으로 2004년에는 김대건 신부님 생가를 복원, 2005년에는 김대건 신부님 기념관을 건립하여 이제 솔뫼성지는 ‘순교자 신앙과 문화의 전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Andrea, 1821-1846)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과 어머니 고 우술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대건은 10세 전후인 1830년경에 솔뫼를 떠나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용인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1836년에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와 만주에서 수학을 하였다.
1845년에 한국인 최초로 천주교 사제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국사범으로 체포되어 9월 16일에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순교자 김대건 신부님은 1925년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품에 올랐고,
1949년에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해졌으며,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솔뫼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가문이 정착한 것은 8대 선조(守完, 1643-1725) 때부터입니다. 김 신부님 가문이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큰할아버지 종현(淙鉉, 1764-1806)과 할아버지 택현(澤鉉, 1766-1830), 그리고 작은할아버지 한현(漢鉉, 1768-1815) 때부터입니다. 종현과 택현은 여사울 이존창의 권유로 서울 명례방(명동)의 김범우에게 교리를 배워 1784년경 한현과 함께 입교를 하였습니다. 그후 1788년경에 김 신부님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족보명은 運祚, 1735-1814)가 입교하자 전 가족인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김진후는 신해박해(1791년) 때 솔뫼에서 잡혀 문초를 당하였으나 순교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후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김진후와 종현과 택현도 함께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을 당하다 김진후는 배교 의사를 밝히고 죽음을 면하고 솔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1805년에 김진후는 다시 잡혀 순교를 결심하고 10년간 해미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76세로 옥사를 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아들들은 솔뫼를 떠나 종현은 전주로 한현은 안동으로 피신하였습니다.
한편 이곳 솔뫼에 남아있던 김 신부님의 할아버지 택현은 제봉(濟鳳, 1790-1821), 제인(濟麟, 1795-1839), 제철(濟哲, 1803-1855)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 아들 제인이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제준(濟俊)입니다. 김제준은 장홍 고씨를 아내로 맞아 1821년에 김대건 신부님을 솔뫼에서 낳았습니다. 본시 김대건 신부님의 아명(兒名)은 재복(再福)이고 족보명은 지식(芝植)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정해박해(1827년) 때 용인 골배마실로 피신할 때까지 이곳에서 성장하셨습니다.
솔뫼에서 태어나시거나 사신 분들 중에 순교가 확실한 분들은 김진후(증조부), 한현(증조부), 제준(아버지), 데레사(한현의 딸), 손연욱(데레사의 남편), 제항(증조부 회현의 아들), 제교(종증조부 귀조의 손자), 김대건 신부님, 진식·근식(숙부 제철의 아들들), 조씨(종조부 회현의 손자며느리) 등 11분이고, 그밖에도 순교하신 것으로 추정되는 분은 김택현(할아버지), 희현(막내 작은 할아버지), 선식(막내 작은 아버지 제철의 아들) 등 3분입니다. 이렇게 김 신부님의 가문은 시조 66世(증조 16世)부터 69世(증조 19世)까지 4대에 걸쳐 순교하셨습니다. 이분들 중 현재까지 성인품에 오르신 분은 김제준(이냐시오)과 데레사, 그리고 대건 신부님 등 3분입니다.

 

자료출처 : 솔뫼성지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