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멋지게 살지게

2012 예장문학콘서트 '시간 혹은 홀림'

달처럼 2012. 7. 15. 14:49

 

 

 

 

 

 

 

장맛비가 내리는 7월 12일 저녁 7시.

진행자의 오프닝 멘트에 이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이생진 시인이 단상에 오르고 영상으로 약력이 소개된다.

 

1929년 출생, 1969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리운 바다 성산포』,『바다에 오는 이유』,『독도로 가는 길』,『서귀포 칠십리 길』등,

1996 윤동주 문학상 수상, 2002 이상화 시인상 수상

 

노 시인이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잔잔히, 그러나 힘있게 낭송한다.

스크린에는 검푸른 바다의 영상이 배경 음악과 어우러져 흐르고, 시인의 음성에는 성산포의 자연과 삶에 대한 시인의 애정이 녹아들어 강한 울림이 있다.

 

 

.......

살아서 고독했던 사람 그 사람 빈자리가 차갑다

아무리 동백꽃이 불을 피워도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그 사람 무덤이 차갑다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술에 취한 섬 물을 베고 잔다

파도가 흔들어도 그대로 잔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성산포에서는 바다를 그릇에 담을 순 없지만

뚫어진 구멍마다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뚫어진 그 사람의 허구에도 천연스럽게 바다가 생긴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은 슬픔을 만들고 바다는 슬픔을 삼킨다

성산포에서는 사람이 슬픔을 노래하고 바다가 그 슬픔을 듣는다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죽는 일을 못 보겠다

온 종일 바다를 바라보던 그 자세만이 아랫목에 눕고

성산포에서는 한 사람도 더 태어나는 일을 못 보겠다

있는 것으로 족한 존재 모두 바다를 보고 있는 고립

 

성산포에서는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 이외의 주인을 모르겠다

 

바다는 마을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한 나절을 정신없이 놀았다

아이들이 손을 놓고 돌아간 뒤 바다는 멍하니 마을을 보고 있었다

마을엔 빨래가 마르고 빈집 개는 하품이 잦았다

밀감나무엔 게으른 윤기가 흐르고 저기 여인과 함께 탄 버스엔 덜컹덜컹 세월이 흘렀다

 

살아서 무더웠던 사람 죽어서 시원하라고 산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술 좋아하던 사람 죽어서 바다에 취하라고 섬 꼭대기에 묻었다

살아서 가난했던 사람 죽어서 실컷 먹으라고 보리밭에 묻었다

살아서 그리웠던 사람 죽어서 찾아가라고 짚신 두 짝 놔두었다

삼백육십오일 두고두고 보아도 성산포 하나 다보지 못하는 눈

평생 두고두고 사랑해도 다 사랑하지 못하고 또 기다리는 사람

......

 

 

세월이 담긴 목소리, 긴 연작시 <그리운 바다 성산포>중에서 귀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었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 눈으로 살자  

 

이어서 김유진 작가의 소설 <숨은 밤>이 이어진다.

사춘기의 모호한 인생 찾기와 사랑이야기를 배우가 영상과 무대 사이를 오가며 연기한다.

 

여기, 희미한 아이들이 있다. 한 아이는 어느 날 헛간의 썩은 볏짚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그 소년의 이름은 ‘기(基)’이다. 다른 아이는 트럭을 끌고 장사를 하러 다니는 아버지가 여관에 맡겨두었다. 그 소녀는 기가 일하는 여관의 ‘404호’에 산다. 소년과 소녀가 어떤 계기로 인해서 서로를 의지하게 된다. 그들은 여름 휴양지로 반짝 성수기를 이루는 이 마을에서 거의 유일한 이방인들이다. 그들은 마을에 안착하지 못하고 불안해 하며, 이윽고 분노한다. 그리고 소년은 마을에 불을 지른다. 방화범 앞으로 현상금이 붙었다. 기는 존재감이 없었다. 기는 없는 사람처럼 지냈다.

 

이방인처럼 존재감 없는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는 암울하면서도 맑은 느낌이다.

작가는 "사랑의 전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채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사라지는, 혹은 사라질 미완의 감정에 대해 적었다"고 말한다.

 

너는 누굴 싫어해?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
그럼 누굴 좋아해?
나는 너를 좋아해.

 

우리는 여전히 미흡하고, 어쩔 수 없이 미완성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좋아’한다.

견딜 수 없는 세상을 견디고 극복하라는 작가의 해답이 아름답다.

낭독 도중 참신하고 명료한 문장이 귀에 들어온다. 젊은 작가가 가진 매력이다.

 

 

 <숨은 밤>의 한 장면. 왼쪽은 기 역의 김지안 배우, 오른쪽은 소녀1 역의 남수정 배우

 

 

소설 <숨은 밤>의 김유진 소설가가 무대에서 에필로그를 읽는다.

 

마지막 순서는 박범신의 소설 <은교>.

사춘기 소녀를 향한 노인의 이야기는 때론 음악처럼 감미롭고, 때론 현대 무용의 힘찬 도약처럼 격정적이다.

영상과 무대를 넘나드는 지독하도록 아름다운 낭독 무대다. 

<은교>에서  '이적요 교수' 역은 연극배우 남명렬이 열연했다.

동명의 영화를 본 이들은 영화의 배역보다 월등히 탁월한 캐스팅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남명렬은 1959년 생으로, 연극 <빈터>,<그리고, 또 하루>,<물의 정거장> 등에서 명연기를 선보였으며,

2002 제19회 영희연극상, 2009 대한민국 연극대상 남자연기상, 2009 제14회 하서연극상 올해의 연극인상을 받은 인물이다.

 

 

남명렬 배우가 박범신 소설 <은교>의 일부 내용을 낭독하고 있다.

 

 

이적요 역의 남명렬 배우

 

 

 서지우 역의 홍서준 배우

 

 

<은교> 낭독 공연 후의 무대 인사

무대 왼쪽 김지안, 남수정,  무대 중앙 남명렬, 정다운, 홍서준

 

 

왼쪽 사진 박범신 작가와 함께, 오른쪽 사진 남명렬 배우와 함께

이 날 우리 학교 국어과 교사들과 더블 조인이 아니었다면 황 샘, 여 샘과 한밤의 데이트로 이어졌으련만... 

 

 

 

공연을 마치고 남명렬 배우와 함께

 

 

공연장 좌석이 예약제가 아니고 공연 30분 전부터 선착순 입장이었다.

5시에 칼 퇴근하고 달려와 줄 서서 기다리며

샌드위치와 커피로 저녁 식사를 때웠건만

문학에 홀린 국어과 동료들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