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淸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사시집(陸史詩集), 서울출판사, 1946>
제1, 2연에서 시인은 청포도가 풍성하게 익어 가는 고향의 7월을 생각하고 있다. 탐스럽게 열린 포도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이 마을 전설'이 그처럼 풍성하게 열린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예전부터 이 마을에서 가꾸어져 왔으며, 그래서 오래도록 이어져 온 평화로운 삶과 푸근한 옛 이야기들이 포도의 풍성함에 어울려 떠오른다는 의미이다. 또한 포도는 마치 먼 하늘이 영롱한 빛깔의 꿈을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힌 듯이 싱싱한 모습을 띠고 있다.
이처럼 아름답게 펼쳐진 모습에서 갑자기 눈을 들어 시인은 지금 그의 곁에 없는 그리운 이를 생각한다. 그는 이 아름다운 곳에 있지 않고 어딘가 먼 곳에서 괴로운 방랑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노래된다. 그러나 언젠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는 날 그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찾아올 것이다. 이 부분의 아름다운 색채 감각이 암시하듯이 그 날은 억눌린 소망이 밝은 빛 아래 펼쳐지는 때이며, `내 고장 7월'의 참다운 평화가 살아나는 때이다. 그 때 찾아오리라는 `청포를 입은 손님'은 어두운 역사 가운데 괴로운 삶을 겪고 있는 이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미래의 어느 때 그를 맞아 누리고 싶은 삶을 제5연에서 그려본다. 간절히 그리워하던 삶의 꿈이 이루어질 때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다. 이 구절은 단순하면서도 함축성이 깊다. 두 손을 포도의 물로 적신다는 것은 풍성한 식욕과 건강을 암시하면서, 마음을 탁 터놓은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긴장된 갈등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 화해로운 미래의 삶을 향한 순결한 소망을 `은쟁반'과 `모시 수건'이라는 사물로 구체화한다. 은쟁반과 모시 수건의 희디 흰 빛깔에서 티없이 깨끗한 기다림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해설: 김흥규]
이번 답사에서 얻은 수확의 하나는 이육사의 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위에 인용한 해설은 '청포도'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이육사문학관에서 들은 안동의 연구자(이육사문학관 사무국장 이위발 시인)의 해석은 무릎을 치게 할 만큼 새롭다.
이 시에 나오는 '청포도'는 오늘날 우리가 대하는 포도의 한 품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육사가 어려서 소 풀을 뜯기러 다니던 '말 맨데'(지금의 이육사문학관이 있는 자리의 옛 지명)에 자라던
아직 익지 않아 푸른 산머루를 일컫는 것이고, '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의 '먼 데'는 막연히 '어딘가 먼 곳'이 아니라
육사의 고향 원촌리(遠村里)의 순우리말 지명이었던 것이다.
'하늘 밑 푸른 바다', '흰 돛단배'는 소를 풀 뜯기러 가서 동산에 누워
산머루 덩굴 사이로 바라 본 하늘과 구름의 이미지이고,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은
봉제사 접빈객(奉祭祀 接賓客)의 안동 문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시인은 아름다운 고향의 모습을 묘사하며
동시에 광복에 대한 염원을 형상화했던 것이다.
시인의 고향은 퇴계의 묘소에서 그리 멀지 않다.
퇴계의 후손들이 사는 하계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원촌리인데,
낙동강이 청량산을 돌아 이 부근에 이르러 제법 강의 모습을 갖추고
넓은 들판 너머로 공민왕이 몽진 왔다는 왕모산이 보인다.
이육사 문학관에서 바라본 풍경
마주 보이는 산이 왕모산이고, 그 아래 들판 끝 자락과 만나는 곳에 낙동강이 흐른다.
여기는 안동댐 건설 당시 수몰 예정 지역이어서 가옥과 농경지를 수자원공사에서 수용하고,
주민을 이주시켰다.
그러나 토목공학상의 착오인지 물이 차지 않았고,
안타깝게도 이 마을 원주민들은 고향을 잃어버렸다.
이육사의 생가 마을은 풍수상으로 오지탄금형(五指彈琴型)이다.
마을 뒤로 뻗어 내려온 다섯 산줄기와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물이 다섯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는 형국이라고 한다.
큰 인물이 나올 명당 터이고, 이육사 같은 인물이 나온 연유가 거기 있다는 것이다.
이육사의 생가인 육우당(六友堂)이 있던 자리에 '청포도' 시비가 대신하고 있다.
시비를 떠 받치고 있는 둥근 바위는 포도를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광야'도 이번에 새로운 사실을 접한 시이다.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바다를 향해 산맥들이 형성될 때도 오직 이 광야는 침범하지 못했다.
'광야'는 우리 나라의 공간성과 신성성을 상징하는 이 구절은
육사의 고향 마을 산줄기의 형세를 그린 것이다.
백두대간이 흘러 내려 오다 낙동강과 만나는 이 마을 앞 들판에서 산맥은 잠시 주춤한다.
'다시 천고의 뒤에'
이 구절은 막연히 '미래의 어느 날'이라고 해석해 왔으나
왕모산에 피신했던 고려 유민의 설화를 들으니 이제야 시원하게 풀이되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토룡(지렁이) 장군이 천 년 후에 고려 왕조의 유민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왔고,
고려 시대로부터 천 년이 되는 시점이 거의 다 되었으므로
일제의 차디찬 감방에서도 시인은 조국의 독립이 멀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독립을 위해 희생적인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이번 답사길의 길벗 홍 교수님과 함께
이육사문학관 뒤편에 복원한 생가 '육우당(六友堂)'
여섯 형제의 우애를 강조하셨던 모친의 의지가 들어있는 당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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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요, 외조부는 의병장 왕산 허위의 종형이다.
애국 시인이 나오는 데에는 그럴 만한 가문의 내력이 있었던 것이다.
육사의 형제들은 그 우애(友愛)가 대단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전한다.
장진홍 의거로 감옥에 갇혔을 때 서로 책임을 떠맡으려 했고,
서울에서 시회를 열 때도 육사는 동생 원일, 원조와 함께 어울렸다.
이러한 형제애를 만들어 낸 바탕에는 어머니 허길의 가르침이 컸다고 한다.
喬木 (교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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