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도 날 몯 보고 나도 고인 몯 뵈.
고인을 몯 뵈도 녀던 길 알픠 잇네.
녀던 길 알픠 잇거든 아니 녀고 엇뎔고.
( 李滉, '陶山十二曲' 言學4 )
'도산십이곡'은 퇴계 이황 선생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도산서원에서 학문을 하며 후진을 양성할 때 지은 시조이다.
언지 6곡과 언학 6곡으로 된 12수의 연시조이다.
퇴계 이황 선생은 '도산십이곡 발(跋)'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노인이 본디 음률을 잘 모르기는 하나, 오히려 세속적인 음악을 듣기에는 싫어하였으므로,
한가한 곳에서 병을 수양하는 나머지에 무릇 느낀 바 있으면 문득 시로써 표현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시는 옛날의 시와는 달라서 읊을 수는 있겠으나, 노래하기에는 어렵게 되었다.
이제 만일에 노래를 부른다면 반드시 이속(俚俗)의 말로써 지어야 할 것이니,
이는 대체로 우리 국속(國俗)의 음절이 그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일찍이 이별의 노래를 대략 모방하여 '도산육곡'을 지은 것이 둘이니,
기일(其日)에는 '지(志)'를 말하였고, '기이(其二)'에는 '학(學)'을 말하였다.
아이들로 하여금 조석(朝夕)으로 이를 연습하여 노래를 부르게 하고는 궤를 비겨 듣기도 하려니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노래를 부르게 하는 한편 스스로 무도(舞蹈)를 한다면
거의 비린(鄙吝)을 씻고 감발(感發)하고 융통(融通)할 바 있어서,
가자(歌者)와 청자(廳者)가 서로 자익(資益)이 없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 생각컨데, 나의 종적이 약간 이 세속과 맞지 않는 점이 있으므로
만일 이러한 한사(閑事)로 인하여 요단(鬧端)을 일으킬는지도 알 수 없거니와,
또 이것이 능히 강조(腔調)와 음절에 알맞을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일 건(一件)을 써서 서협(書莢) 속에 간직하였다가,
때때로 내어 완상(玩賞)하여 스스로 반성하고,
또 다른 날 이를 읽는 자의 거취(去取)의 여하(如何)를 기다리기도 한다."
여기서 이속의 말이란 우리말을 일컫는 것이고,
우리말로 된 노래를 아침 저녁으로 부르고 듣고 춤추면서 저절로 교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배려에서
여러 편의 시조를 지으신 것이다.
성리학의 최고 경지에 오른 大儒께서 우리말로 된 문학의 의의를 간파하신 것이라 더욱 뜻이 깊다.
물론 이 시조에 나오는 '녀던 길'은 '학문 수양의 길'을 의미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김경식의 문학기행' 안동편은 퇴계 선생이 '녀던 길'을 찾아
눈보라가 휘날리는 11월 마지막 주에 경북 안동군 도산면을 더듬었다.
이 날 답사는 장유유서의 순을 따르기로 하고 우선 퇴계 선생의 자취를 찾았다.
처음 들른 곳은 토계리에 있는 퇴계 종택이다.
대문 위에 횡으로
“열녀 통덕랑 행 사온서직장 이안도 처 공인 안동권씨지려(烈女通德郞 行司醞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
현판이 걸려 있다.
정려문을 그대로 이용하여 문을 세운 것이 특징이다.
지난 해에 유명을 달리한 종손의 상례를 치른 흔적이 아직 남아 있는 대청 앞 추녀 밑에 늘어서서
퇴계의 생애에 대해 조명하는 김 시인님의 강의를 경청한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안마당의 동쪽 편으로 쪽문이 열려 있는데, 쪽문 안으로 들어서면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이라는 현판이 정면 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인다.
추월한수정은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이 퇴계의 도학(道學)을 추모하여 창건한 정자로
추월한수란 말은 주자의 추월조한수(秋月照寒水)에서 온 말이다.
즉 천년을 내려온 마음이 가을 달빛에 비치는 한수와 같다는 의미로 옛 성인들의 마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고 이동흠의 글씨이다.
추월한수정 바깥 대문
추월한수정으로 들어가는 대문의 바깥쪽 처마 밑에는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해서체로 향산 이만도의 손자이며 근세 설암체로 필명이 높았던 이고(貳顧)
이동흠(李棟欽)의 글씨이다.
담장 밖 바깥마당의 남쪽은 퇴계공원이다. 퇴계 탄신 오백주년을 기념하여 조성한 것이다.
시비가 여러 개 그 속에 들어서 있다.
사진은 대문 맞은 편에 있는 돌비인데, 원문과 번역본이 나란히 있다.
퇴계종택을 나와 퇴계 묘소로 향했다. 종택 남쪽 1km 떨어진 건지산 자락에 위치한 묘소 초입에는 양진암 터가 있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먼저 퇴계의 며느리 봉화 금씨의 묘소가 나온다. 살아서 못다한 효도를 죽어서라도 하겠다고 시아버님 무덤 바로 아래에 묻어달라고 했단다. 길에서 며느리의 묘소까지 올라온 만큼을 더 올라가면 퇴계 이황 선생의 묘소가 있다.
퇴계 묘소
우선 퇴계 선생의 묘소에 묵념을 한다.
김 시인의 강의를 경청하는 회원들
묘비명을 살피는 전문가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
퇴계가 70세를 일기로 작고하던 해인 1570년 12월4일, 조카 영에게 받아쓰게 한 유언은 국장(國葬)을 치르지도 말고, 값비싼 유밀과(油蜜果)는 물론 비석도 쓰지 말고, 작은 돌에다 앞면에는 단지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퇴도 만은 진성이공지묘)라 쓰라는 내용이다. 묘비에는 선생의 자명과 기고봉의 묘갈문이 적혀 있다.
퇴계 선생의 무덤에서 내려 오는 길목에 있는 며느리 봉화 금씨의 묘소
묘소가 있는 건지산 언덕 아래에 있는 양진암 터
우리 나라의 참 학자요, 스승이었던 퇴계의 발자취를 더듬은 이번 답사길에서는
유독 선생의 인간적인 면이 가슴에 와 닿았다.
며느리를 맞이하는 과정에서 겪은 봉화 금씨 문중의 냉대에 개의치 않으시고
그 며느리에게 자상하게 대하신 시어른.
유핵으로 오래 고생하는 며느리의 병세까지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시던 시아버지.
그 은혜가 고마워 죽어서라도 아버님을 모시겠다고 아버님 묘소 발치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며느리.
퇴계 이황이 증손자를 보았을 때의 일이다.
손자 며느리가 이내 다시 임신하게 되어 젖이 젖이 나지 않아
아기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고 병치레를 하였다.
그래서 도산 본댁에 유모를 부탁했다.
본댁에 마침 아이를 낳은 여자 종이 있어 그 아이를 떼어 놓고 서울로 보내기로 했다.
퇴계가 그 일을 알아채고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남의 자식을 죽일 수는 없다.
몇 달만 참으면 두 아이를 다 구할 수 있으니 여기 아이가 좀 더 자랄 때까지 기다려라.'
별 수 없이 증손자는 밥물로 연명하다가 겨울과 봄을 어렵게 넘기고
결국 1570년 5월에 죽고 말았다.
퇴계는 아픈 마음을 여러 문인에게 토로했으나 가족에게는 내색하지 않았다.
퇴계는 신분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인간을 동등한 인격체로 여겼던 것이다.
자신보다 35세나 연하인 율곡 이이에게 말을 놓지 않은 일화도 같은 맥락이다.
학문이 높을 뿐더러 인간적인 선생의 고매한 인품에 새삼 머리가 숙여진다.
'서리서리 > 문학의 산실을 찾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는 -- 안동 기행 3. 농암종택 (0) | 2010.12.12 |
---|---|
먼 데 하늘이 알알이 들어와 박혀 - 안동기행 2. 저항시인 이육사 (0) | 2010.12.12 |
문학기행 - 매천 황현과 구례 3. 운조루 (0) | 2010.07.04 |
문학기행 - 매천 황현과 구례 2. 호양학교 (0) | 2010.07.04 |
문학기행 - 매천 황현과 구례 1. 매천사와 매천 고택 (0) | 2010.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