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문학의 산실을 찾아

문학기행 - 매천 황현과 구례 2. 호양학교

달처럼 2010. 7. 4. 20:29

매천은 54세(1908년)되던 해에 구례군 광의면 지천리에 주민들과 함께 호양학교를 설립한다. 이 학교는 애국정신과 신식학문을 지향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 학교를 그냥 두지 않고 일제초기에 폐교시킨다. 그 설립 취지만은 광의보통학교와 방광학교로 그 정신은 이어졌다. 방광학교도 1999년에 폐교되어 지금은 지리산수련원이 되어 있다.  

 옛 호양학교 터 뜰에 있는 매천 시비(詩碑)

 

 호양학교 한옥 교사

 

 호양학교라는 이름은 '방호산 남쪽 학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가장 큰 한옥건축물로 현재 전남교육청 직속 지리산수련원으로 사용한다.

 

 옛 호양학교 건물은 그 이름을 따서 '호양민속학습관'이라 하였다.

 

 호양민속학습관 안에 있는 '매천 황현 선생 한시 전시실'

 

 매천 황현

 

 '매천 황현 선생 한시 전시실' 내부

 

 

매천 황현은 조선 후기 3대 시인이다.

그가 47년간 쓴 일기 '매천야록'은 역사서이다.
1864년부터 1910년 8월 나라가 망할 때까지 쓴 이 기록문학은 그의 위대성이 번득인다.
1911년 발행된 '매천집'은 그의 시문과 산문집이다.
1984년 전주대학교 호남학연구소에서 정리 간행된 자료에 의하면, 매천은 1015수의 한시를 썼다.

절명시는 쉬운 시가 아니다. 은유가 강하고 몇 번을 읽어도 그 뜻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난리를 당하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고,
몇 번이나 자결하려다가 이루지 못했네.
오늘 진정으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데,
가물거리는 촛불은 창천(蒼天)에 비치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제성(帝星)은 이동하고,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네.
이제 조칙(詔勅)을 받을 수 없고,
아름다운 한 조서에 천가닥 눈물이 흐르네.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하기 어렵구나.

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으니,
단지 인을 이룰 뿐이요, 충은 아닌 것이로다.
겨우 송나라 윤곡의 길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인데,
진동의 행동을 따르지 못했음이 부끄럽네.


제1수에서는 이미 죽음에 대한 결심이 암시되어 있다.

제2수에는 망국에 대한 슬픔이 표현되어 있다. 비장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제3수에서는 지식인으로서의 울분과 절망을 탄식하고 있다.

제4수에는 충(忠)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것에 관한 한탄이 녹아 있다.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는 것은 절명시의 제3수다.

 매천 한시 전시실 바닥에 둘러 앉아 역사소설 '매천야록'의 저자 한승연 선생님의 역사관을 들었다.

한승연 선생님은 참가자 전원에게 '매천야록' 상권을 증정하시고 손수 정성껏 서명을 해 주셨다.

 

 

 옛 호양학교 정문

호양학교는 왕석보 선생의 후학들이 민족 자강과 신문화 교육을 위해 1908년에 설립한 학교로

매천 황현 선생이 모금 취지문을 쓰신 것으로 전한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2006년 옛 학교터에 복원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