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서울역사문학기행

북촌 기행 1-1 광혜원 터, 재동 백송

달처럼 2010. 12. 12. 18:44

■ 제2회 서울역사문학기행 일정표

 

■ 일시: 2010년 12월 11일 오후2시 ~오후 8시

 

■ 만남장소: 안국역(3호선) 1번출구 -- 스타벅스

 

 ■ 기행 장소

 

  1) 재동백송(600년 천연기념물)  2) 박규수집터  3)광혜원터

 

  4) 손병희집터  5) 락고재  6) 청원산방   7) 만해당  8) 민형기 고택

 

 

 □ 북촌(北村)의 유래


북촌지역은 예로부터 경복궁과 창덕궁, 종묘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울 600년 역사와 함께 해온 우리의 전통 거주 지역이다. 이 지역은 뛰어난 자연경치를 배경으로 거대한 두 궁궐 사이에 밀접하여 전통 한옥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수많은 가지모양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600년 역사도시의 풍경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원서동, 재동, 계동, 가회동, 인사동으로 구성된 이 지역은 청계천과 종로의 윗동네라는 이름에서‘북촌(north villag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며, 당시로서는 왕실의 고위관직에 있거나 왕족이 거주하는 고급 주거지구로 유명하였다. 

 조선말기에 이르러 이 지역은 사회, 경제상의 이유로 대규모의 토지가 잘게 나뉘어 소규모의 택지로 분할되었으며, 지금 볼 수 있는 어깨를 맞댄 도심주거형 한옥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개량된 것으로 추정된다.

북촌지역을 걷다보면 이어진 처마선의 아름다움 만큼이나 골목길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서구의 네모 반듯한 도로가 아니라 마치 물이 흘러 내려가듯 가지에 가지를 치는 도로체계는 이 지역의 오랜 특성 중의 하나이다. 인사동길은 원래 청계천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형성되었으며, 삼청동과 가회동의 길 또한 북한산의 지류를 따라 형성되었다. 때론 지나는 이웃의 어깨가 닿을 듯한 폭에서 옛 우마가 지날 듯한 골목은 미로처럼 연결되어있으며, 좁아졌다 넓어지고 다시 좁아지곤 하는 골목의 연결을 따라 옛 한옥들이 맞닿아 있는 풍경은 이 지역의 맛을 더해주는 요소이다.

 황현(黃炫)의 『매천야록(梅泉野錄)』권1 상은 고종 원년(1864)에서 동 24년(1887)의 일을 두루 적었는데 ‘서울의 대로인 종각 이북을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老論)이 살고 있고, 종각 남쪽을 남촌이라 하는데 소론(少論) 이하 삼색(三色)이 섞여서 살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북촌에서는 떡을 만들어 먹고, 남촌에서는 술을 빚는다는 뜻으로서 북병남주(北餠南酒) 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래서 낙원동에 떡집이 많은 이유고, 인사동에 서화, 골동품 가게가 많은 것도 근대에 들어와서 북촌의 몰락하는 양반들이 소장하였던 골동품, 서화 등을 가까운 인사동 에서 팔았기 때문에 시장이 형성되었다 한다.


 □ 북촌의 한옥소개


조선시대 조성된 상류층 주거지로서 1920년대까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던 북촌은 1930년대에 서울의 행정경계가 확장되고, 도시구조도 근대적으로 변형되게 된다. 주택경영회사들은 북촌의 대형 필지와 임야를 매입하여, 그 자리에 중소규모의 한옥들을 집단적으로 건설하였는데, 현재 한옥들이 밀집되어있는 가회동 11번지와 31,33번지, 삼청동35번지, 계동135번지의 한옥주거지들은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대청에 유리문을 달고, 처마에 잇대어 함석 챙을 다는 등, 새로운 재료를 사용한 북촌의 한옥은 전통적인 한옥이 갖고 있는 유형적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 근대적인 도시조직에 적응하여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진화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북촌의 한옥은 한옥을 대량으로 건설해야 하기 때문에 목재소에서 공급되는 표준화된 목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전통한옥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며 새로운 도시주택유형으로 정착되었다.

북촌 한옥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데, '진화된 구법'과 '장식화 경향'이 그것이다. 낮은 지붕물매, 굴도리, 겹처마, 좁은 주간에 많은 칸수 등 전통한옥과 비교할 때 비록 온전히 품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북촌한옥에는 한옥의 구성과 아름다움이 응축되어 있다.

 

□ 북촌의 문화 유산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조선시대 양반들의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던 유서 깊은 지역이다.
북촌지역의 역사적 자료는 사적5곳, 서울시 민속자료 4곳, 유형문화재 3곳, 문화재자료 1곳 이외에 계동길, 석정보름우물과 광혜원터 등이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목욕탕인 중앙탕 등 흥미로운 장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형성되었던 옛길과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고, 1900년 이후부터 급속하게 형성된 한옥군 등 많은 자원들이 분포되어 있다.
1750년 도성도, 1892년 수전전도, 1927년 경성시가도, 그리고 2000년 이후인 현재 지도까지를 살펴보면 계동길, 가회로, 삼청동길, 창덕궁길 등이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많은 역사유적들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자원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에도 경복궁과 마주하고 있는 삼청동길 주변에는 많은 갤러리가 늘어서 있고, 화동길과 더불어 각종 먹거리 자원과 특색 있는 까페가 자리잡고 있으며, 원서동에는 전통 기능의 보유자 및 예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최근에는 건축가, 미술가들이 북촌의 역사성 속에 함께 하고자 북촌 내부에 작업실과 사무실 등을 개설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들은 북촌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와 내용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현상이기도 하다.


 

2010년 12월 둘째 주.  

서울역사문학기행 북촌 답사는 안국역 1번 출구 앞에서 시작하여 별궁길을 걸어 헌법재판소로 향했다.

헌법재판소는 조선시대에는 북촌으로 불렸던 종로구 재동에 있으며, 천연기념물 제8호인 재동 백송이 담장 안에 있고,

개화운동의 선구자인 환재 박규수 집터와 홍영식 집터,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이었던 광혜원이 있었던 유서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헌법재판소 주 출입구 맞은편 화단에 세워진 '광혜원 터' 표지석

 

환재(瓛齋) 박규수(1807-1877)는 20세 무렵, 효명세자와 친분을 나누며 개화를 논하였고, 친구 이상의 관계로 학문과 미래를 토론하였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자 충격을 받아 20여 년간 칩거하며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848(헌종 14년)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1862(철종 13년) 진주민란이 일어나자 안핵사로 파견되어 사태 수습에 힘썼다.

우의정으로 은퇴한 박규수는 그의 사랑에서 후학들에게 할아버지인 연암 박지원의 문집에 대해 강의하였고, 중국을 왕래한 사신들이 전한 신사상을 논하기도 하였다. 이 중에는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 갑신정변을 일으킨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홍영식(1855~1884)은 박규수의 문하생으로 우정총국을 창설하여 서울과 인천에 근대식 우편 제도를 도입한 인물이다.

1884년 12월4일 개화파는 혁명을 도모하나 3일 만에 실패한다.

홍영식이 청군에 의해 살해되자 그의 가족은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의해  일가족 20여명이 모두 음독자살한다.

그 피로 얼룩진 집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 시작되었다.

 

이 때 상황을 '김경식의 문학기행' 답사기에서 옮겨 본다.

 

1884년 12월 4일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쿠데타의 주역들은 이 날을 정권 쟁취의 날로 잡았다.

일본군의 후원을 받았지만 준비가 미약하고, 백성들의 지지가 없었다.

이런 것들이 주역들 스스로도 불안했으리라.

 

안동별궁(현 풍문여고 자리)에서 불길이 솟기 시작하자, 수구파의 지도자인 민영익이 먼저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

갑신정변의 주역중에 지금의 덕성여고터에 살았던 사람이 서광범이다. 그는 이곳이 담을 넘기가 쉽고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이곳에 불을 지르면 이곳으로 시선이 집중될 것을 알고 있었다.

불이나서 풍문여고 방향으로 가던 민영익은 자객을 만난다.

서재필이 보낸 자객이 민영익을 죽이기 위해 여러 군데 칼로 찔렀다.

당시 한국 정부의 세관 고문이었던 독일 출신 묄렌도르프에 의해 민영익은 간신히 피신한다.

세관본부로 사용하던 자신의 집으로 민영익을 옮기고 알렌 의사를 부른다.

한의사들은 민영익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칼에 찔려 끊어진 혈관은 동양의학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왕진을 온 한의사 약 14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모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알렌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중상자 민영익은 이미 출혈이 심하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사망 직전이었다.

오른쪽 귀부분의 두개골 동맥에서 오른쪽 눈두덩까지 칼자국이 있었다.

다행히 목 옆쪽 경정맥도 세로로 상처가 나 있었지만, 정맥이 잘리거나 호흡기관이 절단된 것은 아니었다.

상처는 등 뒤로 크게 나 있었는데, 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 표피가 잘리며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알렌은 자신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그에게 바쳤다. 알렌의 치료 후에 민영익은 치유되기 시작했다.

죽음 직전에 살아난 민영익은 알렌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알렌에게 현금 10만 냥을 제공하고, 고종의 재가를 얻어 참판 벼슬까지 하사한다.

민영익의 괘유는 조선에 서양 의학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서양병원 건립이 과제였던 알렌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병원이 건립된다.

1885년 봄 조선 정부는 병원설립을 허락한다. 광혜원이 개설되었다.

40 침대를 갖춘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이었다.

 

 

두 개의 표지석 - 과거와 현재

 

 

광혜원 터에서 회원 한 분이 미리 준비해 온  광혜원 그림을 선보이고 있다.

 

 

광혜원 초기 세브란스병원 1885~1887년까지 (  혜촌 김학수 화가가1970년5월 그린 광혜원 모습)

 

 

재동 백송(천연기념물 제8호)

 

백송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빛이 되므로 백송 또는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 서북부가 원산지로서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재동 백송의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7m, 뿌리부분 둘레 3.82m이다. 다른 백송에 비해 큰 편이며, 줄기가 아랫부분에서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있다.

재동 백송 있는 자리는 예전에는 창덕여자고등학교 교정이었으나, 현재는 헌법재판소가 들어섰다.


 

역사의 물결을 지켜 보며 묵묵히 한 자리를 지킨 백송을 에워싸고 서서 갑신정변과 그 전후 역사를 듣는다.

  

 

 

답사에 동행한 박문호 선생님이 촬영한 백송 사진은 가히 작품이다.

http://blog.naver.com/munhopark

 

 

 희디 흰 줄기로 인해 더욱 고고해 보이는 백송은 600살의 나이에도 12월 찬바람에 독야청청하다.

 

 

회양목 위에 떨어진 백송 나무 껍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