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서울역사문학기행

북촌 기행1-2 손병희 선생 집터, 락고재, 청원산방

달처럼 2010. 12. 12. 19:24

 

의암(義菴) 손병희(1861~1922)선생은 구한말의 천도교(天道敎)지도자이자 3·1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충북 청주(淸州)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최시형의 수제자가 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북접 소속으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다.

1897년에 동학의 제3대 교주가 되었으며, 1905년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다.

일찍이 독립협회 인물들과 교류하며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개화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3·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분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경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 받았으며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1922년 눈을 감았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소파 방정환 선생은 손병희의 사위이다.

 

 


  

 

손병희 선생 집터에 북촌미술관이 들어섰다.

 

 

樂古齋 (락고재)

130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 집은 예전에 진단학회가 사용하던 유서 깊은 집이다. 

옛 한옥을 인간문화재인 정영진 옹이 개조하여 한옥의 미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오밀조밀 배치된 건물이며 그 사이에 잘 가꾸어진 전통 정원을 돌아보노라니

이런 한옥에 살고 싶다는 소원이 다시금 간절해진다.

 

옛것을 누리는 맑고 편안한 마음이 절로 드는 곳’이라는 뜻의 락고재는

130년 역사를 가진 한옥을 인간문화재 정영진 옹이 개조한 한국 전통 문화 공간입니다.

전통 기와, 담장, 정자, 굴뚝, 장독대 등이 소나무와 함께 파란 하늘을 이고 한옥의 참 멋을 조화롭게 빚어내고 있습니다.
단아하게 자리 잡은 솟을대문을 지나면 소박한 장독대가 보이고 아담하지만 정결한 한옥이 드러납니다.

사이사이 곁들어진 소나무, 대나무가 자연미를 더하고 댓돌 위 정겨운 고무신은 아름아름 향긋한 추억을 되살립니다.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짜여진 락고재는 과거 양반들의 풍류가 곳곳에 녹아있습니다.

선비들이 즐겼던 정자, 연못, 대청마루 등을 세심하게 되살려 멋스러운 풍류를 자아냅니다.

특히 대청마루는 한옥이 품은 여백의 미를 더하며 청량감마저 들게 합니다.

옛 선비들이 그러했듯이 정자에 앉아 있으면 시간의 흐름도 더디고

수줍게 부딪히는 풍경소리와 함께 솟대 위로 스치는 바람 또한 특별합니다.

천천히 눈을 들어 하늘을 보노라면,

처마로 둘러싸인 각진 하늘이 보일 뿐, 현대의 복잡한 사념들은 저 멀리로 달아나는 듯합니다.
한국 문화의 본류라 할 수 있는 풍류를 즐기며 한국 전통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서 락고재는,

전통 한정식과 함께 다도, 찜질방, 궁중한복, 김치 담그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한국 전통의 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양반 가옥을 연상시키는 락고재의 숙박시설은

고급 호텔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갈하고 편안합니다.

천연 옥이 깔린 온돌방과 천기토로 만든 장작 찜질방은 많은 외국인들에게 건강한 여정을 선사합니다.

락고재에서의 하룻밤은 문틈으로 스미는 은은한 달빛과 함께 한국의 멋과 향기로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며, 특별한 감동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락고재 홈페이지에서 인용)

 

 

락고재 대문 풍경 

귤색 불빛이 환한 별채


 

 

 정자

 장독대와 굴뚝

 

 

 

 

답사에 동행한 이상보 교수님 말씀에 의하면 솟을대문에 걸린 락고재 현액은 우산(友山) 송하경의 글씨라고 한다.

友山은 중견 서예가이자 동양학자로 성균관대 유학과 교수이다.

 

 

기와장으로 벽을  쌓아꾸민 락고재 기와담장.  작은 문은 무슨 용도?

 

 

락고재 안채 대청에서 한옥의 아름다움에 젖어들어 강의를 듣는 표정도 꾸밈이 없다. 

 

 

 

마당 한쪽에는 불을 때며 밥을 지을 수 있는 아궁이가 있다.

부뚜막 앞에 가지런히 놓인 호리병과 소반이 정겹다.

 

 

사진 왼편은 락고재의 정자이다.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TV 프로그램 에서 개똥이 부부(환희, 화요비 커플)가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소로 촬영한 곳이라고 한다.

 

 

청원산방은 '꽃살문 창호 제작의 귀재'라 불리는 서울시 무형문화재인 심용식 소목장의 전통창호박물관이다.

‘청원산방’이란 이름은 심용식 소목장의 호 ‘청원淸圓’에서 딴 것으로 ‘맑고 둥글다’는 뜻이다.

 

 

대청 추녀에는 초정(艸丁) 권창윤 선생이 쓴 현판 桂樹軒(계수헌)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선인들은 계수나무가 있다는 달나라를 이상향으로 여겼으니

낙원처럼 행복을 누리는 집이 되라는 의미가 아닐까?

 작은 정원을 품은 집의 모습은 정말 다른 세계에 온 착각을 일으킬 만했다. 

창호 박물관답게 모든 창호들이 제각각 다른 문양과 형태를 지니고 있다.

 서민의 집과 궁궐을 넘나드는 가지각색의 창호는 40년째 한길을 걸어 온 장인의 삶의 궤적이다.

 

 

회원들이 앉은곳은 청원산방의 안방이다.

쭈뼛쭈뼛 들어선 방 안에선 진한 나무향이 풍겼다. 
창은 얇게 삼중으로 만들어 단열이 되게 했다.

부엌으로 통하는 미닫이 문은 상을 들고 드나드는 사람을 배려해

한쪽을 열면 양쪽으로 함께 열리도록 만들었고,

오디오 스피커가 한옥에 거스르지 않도록 대청마루 창호가 스피커 구실을 하도록 고안했다.

창문에 얇은 비단을 바른 것은 방충을 위해 선조들이 사용하던 방식이란다. 

바닥은 얼핏 보아 합판처럼 보였으나 천에 옻칠을 한 신개발품이다.

한국 고유의 전통과 현대의 편리함이 어우러진 집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진정 '살고 싶은 집'이 아닐까.

 

 

심용식 소목장이 다른 손님을 맞고 있다면서 안주인이 먼저 들어와 일행을 환대하며

청원산방의 창호문양과 용도, 기능에 대해 설명한다.

 

 

곧 이어서 심용식 소목장이 들어와 40여년 창호 기능을 익히고 전수해 온 내력을 이야기한다.

이곳 '청원산방'은 기존의 한옥을 수리해서 만든 집인데  공사하며 나온 나무를 재활용했다.

예전 목재는 단단하여 비바람에 강하고 뒤틀림이 없어 건물 외부의 창호로 사용하고,

요즘 나온 목재는 약하고 뒤틀림이 우려되어 내부의 창호로만 사용했다고 한다.

외부 창은 낙선재의 것을 본 따 만든 난간을 제외하면 모두 기존에 있는 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저자인 임정진 아동문학가

한옥을 소재로 글을 쓰고 싶어서 우선 창호를 제작하는 과정을 체험하려고

청원산방 목수학교 1기생으로 이곳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졸업 작품을 준비하다가 공방에서 나와 전통 창호와 심용식 소목장을 소개한다.

임 작가도 김경식의 문학기행 카페 회원이다.


방안의 벽에 거북이가 붙어 있다.

"집안 기둥의 구석을 기어오르고 있는 거북이 두 마리가 보이시죠? 거북이는 장수를 상징합니다.

안방 난간의 박쥐와 마당벽의 십장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방 안의 창문들

 

 

꽃창살

민가의 꽃창살은 궁궐이나 사찰의 것보다 작게 만들었고

건물 뒤편 문에 사용하여 외부인이 위화감을 갖지 않게 배려했다.

 

 

십장생 벽화는 황토로 구운 것으로 경복궁 자경전의 벽화를 그대로 본 따 만들었다.

이곳에서 서민의 집과 궁궐을 모두 체험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완자살과 격자살이 어우러진 반쯤 열린 창호문으로 가장 먼저 보인 공간은, 그가 지금껏 사용한 공구를 모아놓은 곳이다.

수백개의 크고 작은 공구들은 쓰임에 따라 분류되어 빼곡이 나열돼 있었다.

 

 

공방 작업대엔 한창 제작 중인 꽃살문 창호가 비스듬히 서 있다.

 

 

청원산방 주인 심용식 소목장

 

 

청원산방 목수학교

 

 

청원산방 목수학교에서 실습 중인 계승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