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서울역사문학기행

서촌 기행 1-2 청와대 사랑채, 궁정동 안가 터, 청음 김상헌 집터

달처럼 2011. 3. 15. 09:38

 

 

 

 

 

 

 

 

 

 

 

 

 

 

 

 

 

 

 

 

 

 

 

김상헌 집터

 

궁정동 안가 터의 무궁화동산에서 경복고등학교 쪽으로 길 건너편이 병자호란 때의 문신 청음 김상헌의 집터이다.

지금은 그 자리에 2층의 흰색 건물과 다세대 주택이 서 있다.

 

 

김상헌 집터 표석

 

김상헌 집터 표석은 통행에 방해가 된다 하여 그 자리에 세우지 못하고 비껴 서 있다.

 

'김상헌의 집은 육상궁과 담벼락과 이웃한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 강점기 궁정동 1번지는 창덕궁 소유, 2번지는 박제순 소유, 3번지는 이항구(이완용의 둘째 아들) 소유, 그리고 4번지와 5번지는 국유였다고 한다.

김상헌 집터 표석에는 김상헌 집터가 궁정동 2번지라고 하였으나 '경성부시가지도'와 '경성부지형명세도'를 비교해 보면 3번지까지 포함해야 맞을 것 같다.' 출처 http://blog.daum.net/aroma-may/11796222

 

궁정동 2번지는 김상헌(金尙憲 1570년~1652년)이 살았던 집터이다.

무궁화동산의 길 건너편이다.

김상헌 선생은 병자호란 당시 끝까지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예조판서로서 인조를 모시고 간 남한산성에서 죽음을 불사하며, 최명길이 만든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한 것도 그였다. 광해군 때에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 출세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붕당과 파벌을 타파하기 위한 상소를 인조에게 제안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결국 인조반정의 주체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벼슬을 포기하기도 했다.

  

 

 

 

1639년 청나라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출병을 요구한다. 김상헌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청나라는 김상헌을 잡아 오라고 조선에 명령한다.

이때 청나라로 압송되어 가면서  그는 자신의  심정을 시조로 남겼다.

조국의 산천을 그리워하는 불후의 명시조이다.

청구영언에 전하는 ‘ 가노라 삼각산’ 이란 제목의 이 시조를 읽으면 가슴이 울렁인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 김상헌의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청구영언

  

출처 / 김경식의 문학기행

 

 

김상헌과 관련된 자료를 검색하다가 두 편을 골라 덧붙인다.

인물을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조용헌 살롱] [776] 論 명문가

 

탑골공원의 석판에 새겨져 있던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1927~2007)의 독립선언서 글씨가 오자투성이의 컴퓨터글씨로 바뀌었다는 조선일보 보도가 있었다. 일세를 풍미한 여초의 글씨를 내리고, 족보 없는 글씨로 바꾼 것을 보고 여초 집안이 생각났다.

여초의 친형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1921~2006)도 대단한 서예가였고, 여초의 바로 위 형인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1922~1991)도 한학과 조선 사대부문화에 정통했던 학자였다. 이 3형제는 모두 서울을 대표했던 노론 명문가 집안의 후손이었다. 바로 장동(壯洞)김씨 집안이었다.

'장김(壯金)'은 족보상에는 안동김씨이지만, 16세기 중반부터 서울
경복궁 서북쪽에 위치한 장동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기 때문에 보통 장동김씨라고 부른다. 조선후기 300년 동안 '기호 노론당'의 중심이었고, 한국 최고의 명문가이자 학문과 예술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집안이다. 말하자면 '조선 럭셔리'의 정화(精華)가 이 집안이었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을 보면 장동 일대에 있었던 이 집안의 저택들이 그려져 있다. 바위와 계곡 속에 자리 잡은 이런 집들이 지금 남아 있었으면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고급문화를 내놓고 자랑할 만한 집들이다.

'장김'은 세도가(勢道家)라는 부정적인 측면과,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 문한가(文翰家)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세도와 거리를 두었던 문한가의 계보는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증손자대에 '6창(昌)'이 나왔다. 창집(昌集),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즙(昌緝), 창립(昌立)이 그 6형제이다. 여섯 번째 창립의 11대손이 바로 일중, 백아, 여초이다.

말년에 서울 창문여고 교장을 지냈던 백아 김창현으로부터 한학과 사대부 문화를 배웠던 제자가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이다. 그래서 최완수는 '내가 마지막 노론학자'라고 자처하는 것이다. 일중의 제자는 일사(一史) 구자무(具滋武)이다.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일가를 이루었고, 평소에 보내는 편지도 한자 붓글씨로 써서 보내는 양반이다. 필자는 요즘 구자무 선생으로부터 당신의 시문서화집인 '연북청화(硯北淸話)'를 받고서 '열공' 중이다.

출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3/06/2011030601429.html

 

 김극효의 넷째아들이 청음 김상헌(1570~1652)입니다. 선원 김상용보다는 9살 어린 동생이지요. 김극효는 형 김대효가 후사없이 죽자 김상헌을 형의 양자로 세웁니다. 예조판서였던 김상헌은 청에 대한 척화파(斥和派)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장의동 청풍계 건너편에 김상헌의 집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청운동 경복고등학교 입구에 해당하는 장소죠.

  1636년, 예조판서였던 김상용은 청이 조선을 침입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과의 항전을 끝까지 주장합니다. 그러나 항복하여 성을 나오기 전 청음은 가족이 피난 간 춘천으로 갔다가 안동으로 갔습니다. 인조가 항복한 뒤 두 왕자는 청의 인질로 잡혀갔지만 김상용은 인질이 되지 않았습니다. 김상헌 같은 척화파의 중심 인물은 살고 젊디젊은 삼학사만 대신 죽었습니다. 몇 년 후, 청이 명을 치기 위해 조선군 파병을 요구할 때 끝까지 반대하다 청으로 압송당합니다.

 

  청에서 풀려난 후 석실에서 여생을 보내다 죽어 석실에 묻힙니다. 호적상 큰아들인 선원 김상용은 석실의 옆 능선에 묻어두고 친아버지인 김극효의 무덤 아래 묻힙니다. 죽어서도 청에 속하가 싫었던지 묘비도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시작합니다. '명에 속한 조선'이란 뜻이죠. 17세기 반청 이데올로기는 20세기 반공이데올로기를 낳습니다. 어떻든 반청이데올로기는 조선 후기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됩니다. 여기에 따르지않으면 이 시대의 '국가보안법'으로 시련을 당했습니다. 노론의 대부 송시열, 그 위에 청음 김상헌이 있었습니다.

 

  청음이 죽은 후 한강가 양주 수석동에 석실서원이 들어섭니다. 배향 인물은 김상용, 김상헌 등 안동김문들이지요. 노론이 지배하던 시절에 석실서원은 최고의 권력이었답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은 이런 석실서원을 노림이었습니다.

 

출처 http://blog.daum.net/gbbae56/118065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