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서울역사문학기행

서촌 기행 1-3 어둠이 깔리는 인왕산, 신무문, 청와대, 광화문 야경

달처럼 2011. 3. 15. 09:39

 

 

 

신무문

 

신무문(神武門)의 역사성

                                                                                                                                                   김 경 식

 

 

신무문(神武門)은 경복궁의 북문이다.

이 문은 때로 시대의 반역자들이 출입하던 문이었다.

신무문은 주역과 풍수적으로 음기를 뿜는 북쪽방향이라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중략)

태조가 경복궁을 건축할 때 북쪽문은 이름도 없는 작은 문에 불과했다.

이 문을 크게 중축한 분이 세종대왕이며, 신무문이란 이름은 성종 때 대제학을 지낸 서거정 선생이 지었다.

지금 현판의 글씨는 이현직 선생이 썼다. 그는 구한말에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신무문은 조광조의 개혁사상을 파괴한 훈구세력들이 중종을 만나기 위해 몰래 숨어 들었던 문이다. 중종 14년 11월15일 저녁 7시에 그들은 조광조의 세력의 눈을 피해 중종을 만나 모략으로 꾸민 이야기를  전한다.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거짓 상소였다. 그들은 그날 밤 '주초위왕'(走肖爲王)이 쓰여진 낙엽을 들고 중종을 선동한다. 走와 肖를 합치면 조(趙)字는 조광조를 의미했다. 이에 놀라고 분노한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을 탄핵하기 시작한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아 죽고 그를 추종하던 많은 선비들이 죽거나 유배를 떠나야 했다.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를 중심으로 한 훈구세력들은 시대의 역행을 통해 기득권을 누렸다. 경복궁의 동문(건춘문), 서문(영추문), 남문(광화문)의 열쇠는 승정원에서 관리했다. 당시 담당 승지는 조광조의 신진세력이었다. 그러나 신무문의 키는 승정원이 관리하지 않고 있었다. 결국 신무문의 문지기를 매수하여 야밤에 중종을 알현할 수 있었다. 기묘사화를 <신무의 난>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신무문을 열고 몰래 중종을 만났기 때문에 불려 지던 별칭이다.

 

1895년 고종이 경복궁의 건청궁에 거처할 때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이 발생한다. 친일세력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매일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1896년 2월11일 새벽에 고종은 변장을 하고 황태자와 함께 엄상궁의 도움을 받아 여성용 가마를 타고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와신상담해 오던 고종은 파천 직후에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유길준등의 친일인사들을 대거 파직한다. 김홍집과 정병하 등은 백성들에게 살해된다. 김병시를 내각총리대신에 명하는 등 내각 인사를 친러 조직으로 재편한다.

 

신무문은 1980년 신군부 세력들의 문이었다.  청와대와 30경비단은 지척이다.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의 경비단장은 장세동 대령이었다.

일제하에서도 경복궁에는 군인들이 주둔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시대부터 경복궁에 군인이 주둔했던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들은 경복궁 내 신무문 앞 영역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시민들을 얼씬거릴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다. 이제 신무문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문이 되었다.

다시는 신무문이 음습한 기운을 얻은 음모의 세력들에 의해서 이용되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한다.

 

출처 / 김경식의 문학기행

 

신무문 神武門

위치와 연혁 :
경복궁의 북쪽 궁문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태조 때의 기록에는 궁성을 쌓고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을 만들었다고는 되어 있으나 신무문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원전 1> 이로 보아 광화문 등을 세운 이후 언젠가 세웠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문이 신무문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1475(성종 6)년이다. 궁의 북쪽이라서 인적이 드물었으나 왕과 공신들이 함께 회맹제(會盟祭)를 열 때에는 이 문으로 드나들었다.






 

뜻풀이 : ‘신무(神武)’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신묘하게 뛰어난 무용(武勇)’을 의미하며, 또한 신령스러운 현무(玄武)로도 이해할 수 있다. 오행에서 북쪽은 어둠, 죽음, 살상(殺傷) 등을 의미하며 이 방향을 상징하는 상상 속의 신수(神獸)가 현무다. 『주역』 「계사상전(繫辭上傳)」1)에 다음과 같은 용례가 보인다. “그러므로 시초(蓍草) 2)의 덕은 둥글면서 신묘(神妙)스럽고, 괘(卦)의 덕은 네모져 지혜로우며, 여섯 효[六爻]의 뜻은 변화하여 길흉을 알려 준다. 성인(聖人)이 이 괘와 효의 내용으로써 마음을 깨끗이 씻고 은밀한 데에 물러나 감추며, 길흉간(吉凶間)에 백성과 더불어 근심을 함께한다. 신령스러운 능력으로 미래를 알고 지혜로 과거의 일을 간직하니, 그 누가 이에 참여하겠는가. 옛날의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신묘한 무력[神武]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않은 자일 것이다.”<원전 2>

신무문의 성벽에는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온 세상이 태평스런 봄날과 같다’는 뜻이다. 온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리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제작 정보 : 현판은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현직(李顯稷)<원전 3>이 썼다. 이현직은 고종 때 어영대장 등의 관직을 지낸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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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사상전은 주역의 괘사나 효사를 설명한글이라는 뜻이지만, 단지 괘효사의 해석이 아니라 주역의 이론을 철학적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시초는 원래 풀의 이름인데, 고대에 중국에서 이 줄기를 잘라 주역점을 쳤다. 이후 대나무 산가지로 바뀌어 서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원전 1>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9월 20일(庚申, “是月, 太廟及新宮告成.…(중략)…後築宮城, 東門曰建春, 西曰迎秋, 南曰光化門. 樓三間有上下層, 樓上懸鍾鼓, 以限晨夕警中嚴. 門南左右, 分列議政府, 三軍府, 六曹, 司憲府等各司公?.”

<원전 2> 『주역』 「계사상전」, “是故, 蓍之德, 圓而神, 卦之德, 方以知(智). 六爻之義, 易以貢. 聖人, 以此洗心, 退藏於密, 吉凶, 與民同患, 神以知來, 知以藏往, 其孰能與於此哉. 古之聰明叡知神 武而不殺者夫.”

<원전 3> 『고종실록』 권2, 고종 2년 9월 17일(己卯). 이 책 28쪽의 원전 3을 참조하라. 

 

출처 / http://cafe.daum.net/gyoungbok2 [궁궐의 현판과 주련-경복궁_영추문, 신무문, 계무문, 광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