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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가을을 걷다 2. 미술관 옆 찻집 - 성북구립미술관, 수연산방

달처럼 2011. 10. 29. 18:44

 

 

 

이왕 미술관을 찾아나선 길이니 북단장 간송미술관을 포기한 대신 성북구립미술관으로 향한다.

한국 근현대 문화사에 자취를 남긴 성북 지역의 문화예술가 16인의 이야기 '그 시간을 걷다' 展이 진행되고 있었다.

 

 

 

성북동에는 간송이 있다.

 

뜻밖의 소득은 간송 전형필의 사진과 북단장에 모인 당시 문화계 어른들의 사진은 물론이고, 간송 전형필의 글씨와 그림을 만난 것이다.

간송의 필치는 간략하면서도 힘이 있다.

 

아락서실(亞樂書室)_61x16.7cm_간송 전형필, 지본

 

 

다음은 김일주 사진가가 촬영한 김광섭 시인의 사진.

'성북동 비둘기'를 쓴 시인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鄕愁)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일부{월간 문학}, 1968.11)

 

 

김광섭_김일주 사진 작가 촬영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그린 만해 한용운의 캐리커쳐도 있다.

 

신천지 9-10호(1954. 10) 한용운 선생의 글_조지훈 글, 그림

 

구보 박태원의 결혼식 방명록도 눈길을 끈다.

이상, 김기림, 정지용 등 당대의 문화예술계 대가들의 축하글과 그림이 인상적이다.

 

 

소설가 구보 박태원 결혼방명록_1934 (구인회 동인 소설가 정지용 시인)

 

 

다음은 수화 김환기 화백이 후에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에게 보낸 엽서다.

 

수화 김환기 엽서_최순우에게

 

 

인터넷을 검색하니 우리가 다녀 온 날 올라온 기사가 있어서 스트랩하여 덧붙인다.

 

 

 

문학의  김광섭, 박태원, 이태준, 전광용, 조지훈, 한용운. 미술의 권진규, 김기창, 김용준, 김환기, 박래현, 변종하, 송영수, 전형필, 최순우. 그리고 음악의 윤이상.

  이는 근현대 문화와 역사가 깃들어 있는 성북 지역을 창작의 근원지로 삼아 활동했던 미술, 문학, 음악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가 16인이다. 

 이들은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한국 문화예술계를 선도했던 주요 예술가들로서 미술 분야의 화가이자 미술사학자인 근원 김용준, 추상 회화의 선구자 수화 김환기, 동양화가 운보 김기창, 여류화가 우향 박래현 등과 아울러 문학 분야의 이산 김광섭, 구보 박태원, 상허 이태준, 청록파 시인 조지훈,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한용운 등을 만나볼 수 있다.

또한 고려대 교가를 작곡하기도 한 현대음악의 거장 윤이상과 대 수장가 간송 전형필, 박물관인 혜곡 최순우와 같이 당시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며 우리나라 근현대 문화예술을 발전시킨 인물들도 지금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 각 분야 문화예술인들의 초상화 사진 16점을 비롯해 성북 지역의 관련 기록이 담긴 다양한 사진자료 100여 점을 통해 당시 작가들의 작품 활동 모습뿐만 아니라 서로 교류하며 지냈던 문화예술인들의 관계까지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문화예술인들의 직접적인 관계와 교류를 알 수 있는 예술 작품, 친필 자료, 관련 영상물 등이 함께 구성돼 그들의 삶을 좀 더 생생히 경험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성북 지역에 살던 예술가들의 자취와 교류 속에서 나타난 근현대 역사와 문화를 되짚어 보고 이를 통해 그들이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남긴 있는 의미와 그 가치를 현장에서 느낄 수 있다

 

2011년 10월 28일 (금) 15:22:00

[서울문화투데이 홍경찬 기자]

 

 

미술관 옆에 찻집이 있다.

4 년 전에 수연산방에 왔을 때는 미술관이 없었다.

세 갈래 길가에 차분하게 앉아 있는 한옥, 壽硯山房

담 옆에 높은 건물이 솟으니 '수연산방'이 위축되어 보인다.

 

일제 시대 조선의 문단을 가리켜 흔히 일컫는 말에 ‘詩에 지용, 文에 태준’이라는 말이 있다.

그 주인공 상허 이태준이 살았던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놓은 누마루가 보인다.

이곳에서 상허는 <달밤> <복덕방> <영월영감> <까마귀> 등을 집필했다.

그리고 이 집을 짓고 고치고 가꾸는 중에 겪은 일들을 《무서록》에 담았다.

無序錄에는 성북동 생활을 담은 글들이 많다.

 

 

 

 

 

누마루에는 이미 자리 잡은 사람이 있어 가마솥이 걸린 부엌방에서 차를 청한다.

맞은편 처마에 달린 풍경이 금방이라도 맑은 소리를 낼 것 같다.

 

 

 

이태준 부부와 그들의 2남 3녀

 

이태준의 성북동 시절은 1943년에 철원으로 귀향하면서 끝이 난다.

그리고 해방이 된 이듬해인 1946년 여름에 이태준은 온 가족을 데리고 월북한다.

이후 그는 북한에서 끊임없이 검증과 비판을 당한다.

해방 전, 일제강점 시절의 구인회 활동과 저작을 두고 감상적이고 복고적인 저술 활동을 했다는 비난이다. 

결국 이태준은 1956년 ‘평양시 관할 문학예술부 열성자 대회’에서 숙청당한다.

 

 

 

가옥등기대장에는 아직도 소유주가 이태준으로 남아 있다는 수연산방.

이태준이 10년 동안 가족과 단란한 행복을 누렸던 이 집에서 그를 기억한다.

 

 

 

성북동에 서로 이웃하여 살면서 창작활동을 하던 예술인들의 자취를 더듬고 온 날,

그들의 만남과 그 이후를 생각하다가 성북동 시인 김광섭의 '저녁에'를 떠올린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