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역사는 아득하다.
대구는 신라와 고려 때에도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때에는 경상도 관찰사가 근무하던 고읍이다. 대구지역에서 무문토기가 출토되었으니 청동기 시대 (대략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261년에 달벌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3세기 중엽에 신라에 병합되어 발전하기 시작한다.
신라 때에 위화군과 달구화현(達丘火縣)으로 분현된다. 757년(경덕왕16년)에 위화군은 수창군(壽昌郡)으로, 달구화현(달불성)은 대구현(大丘縣)이라는 지명으로 거듭난다. 신라 신문왕(689년)때에 경주에서 대구(달구벌)로 도읍지를 옮기려 했다. 신라는 5악 가운데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을 중시하면서 숭배했다. 927년(태조10년)에는 후백제군과 고려군의 공산전투가 있었다.
후삼국 시대 때 왕건은 대구를 자신을 살려준 동네로 생각했다. '반야월(半夜月)'이라는 지명은 하늘에 반달이 떠서 왕건의 도주로를 비춰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반야월로 인해 그가 생존할 수 있었다는 설이 있다. 왕건은 지금의 수성구 고모동을 지나 앞산 북쪽 산기슭을 따라 성주지역으로 도피할 수 있었으니 대구앞산의 어디쯤에는 아마도 왕건이 머물던 터가 있을 것이다. 이렇듯 대구지역은 후삼국 때에 후백제와 고려의 싸움터였다. 고려 초기에 대구는 수성군, 대구현, 해안현으로 나누어진다.
12세기 무신의 난 이후 대구는 군사도시로 거듭난다. 인근의 청도, 밀양, 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발생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민란으로는 1193년(명종 23년) 청도와 운문에서 일어난 '김사미의 난'이 대표적이다. 몽고 침입 때에는 공산성에서 항몽 투쟁을 전개한 것도 이 지역 백성들이었다. 1419년(세종1년) 대구현은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된다. 1466년(세조12년)에는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된다.
1601년(선조 34) 대구에 경상도감영(慶尙道監營)을 설치하였다.
경상감영은 1601에 안동에서 대구로 옮겨왔다. 경상도 관찰사는 대구부사(大丘府使)를 겸직하였다.
1639년(인조17년) 가산산성을 쌓았고, 1736년(영조12년)에 대구읍성이 축조되었다.
1780년부터 대구의 한자 표기가 ‘大丘’에서 ‘大邱’로 표기가 바뀐다. ‘丘’자는 공자(孔子)의 휘(諱)자이므로 개명해야 한다는 유생들이 상소를 올려 지명을 바꾼다.
대구의 경상감영은 1910년 일제가 침탈하기까지 300년 동안 존재했다. 영조 때(1736년) 둘레 2.65㎞에 이르는 석성을 쌓았다. 그러나 1906년 박중양 관찰사가 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허물었다. 왕의 허락도 없이 읍성을 허문 박중양은 대표적인 친일파로 당시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릴 정도였다. 1906년이면 우리 왕의 명령을 받아야 할 자가 그런 짓을 한 것이다. 경상감영 선화당 앞뜰엔 1770년에 제작한 측우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화강석 받침돌(보물 842호)만 남아 있다. 역시 박중양이가 당시 일본인 인천기상관측소장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전한다. 친일파를 처벌해야 하는 이유는 이런 자들의 행적 때문이리라.
이 무렵부터 해방 전까지 왜인들이 5만 명 이상이 벅적이는 곳이 대구였다. 해방 후부터 6,25 전쟁 피난시기를 거쳐 60~70년대까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던 '녹향'이란 다방은 사라졌다. 다만 팻말만 그 시대를 희미한 기억 속으로 휘몰아 갈 뿐이다. 6,25 피난 시절에는 양주동, 이중섭, 유치환, 정비석 등 예술가들이 녹향에 드나들었다. 시인 양명문은 녹향에서 가곡이 된 ‘명태’라는 시를 썼다.
대구는 경북 남부 중앙에 있는 7구 1군 3읍 6면 134동의 인구 25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는 광역시이다.
대구는 북으로 칠곡군, 군위군, 동으로 경산시, 청도군, 서쪽으로는 고령군, 성주군과 남으로 경남 창녕군과 접한다.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는 동쪽 금호강 연안에 대구분지가 위치한다.
대구광역시를 관광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특이하고 인상깊은 도시가 아니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대구는 경주나 부여, 공주 같은 역사적인 도시도 아니고 별난 음식이 있는 곳도 아니다.
그러나 대구는 많은 인물들이 나고 자란 곳이다. 고난의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들의 삶과 죽음의 현장을 찾아 떠나는 기행은 언제나 가슴이 숙연했다.
대구 계산동은 영남대로가 지나는 대구의 상징적인 길이었다. 대구의 부자들이 많이 살았던 이 동네는 유명 인물을 배출했다. 민족의 지도자들에게 배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찾아 오면서 학문과 문화의 동네가 되었다. 일제하 독립운동가와 예술가들이 태어나고 활동했다. 계산동은 최근에 이상화 시인과 독립운동가 서상돈 고택을 복원하면서 계산성당과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근대 문화유산의 보고가 되고 있다.
대구 근대화 문화유산 거리 표지판
계산오거리에서 이상화 시인 고택 가는 길
보도 블럭은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모자이크 되어 있다.
대구 근대화 문화유산 거리에 있는 이상화 시인과 서상돈 선생 타일 흉상
대구 근대화 문화유산 거리에 있는 계산동 성당 타일 벽화
계산오거리에서 이상화 고택 들어가는 골목 '뽕나무길'
담장에 설치된 만화경을 신기한 듯 들여다 보는 회원들
대구의 대표적인 근대 건축물은 '계산성당'과 '구제일교회', 동산에 있는 '선교사숙소'이다.
이들 건축물은 우리나라 근대의 역사적인 공간으로 손꼽히는 건축물이다. 계산성당은 프랑스 선교사가 설계했으며, 1902년에 서울 명동성당을 건축했던 중국인 기술자들이 대구까지 내려와서 지었다. 고딕 양식의 계산성당 건축물은 당시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졌다. 계산성당은 100년의 대구 역사를 증언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계산동 성당 정면
계산동 성당 측면
계산동 성당 내부
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12사도와 함께 서상돈, 김종학, 정규옥 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당시 대구의 초기 천주교 신자의 지도자들이다. 계산성당 마루돌은 허물어진 대구읍성의 돌을 깐 것이다. 이상화 시인의 시 ‘나의 침실로’는 그가 이 성당에서 영감을 얻어 지어진 시라고 전한다. 김수환 추기경이 이 성당에서 신부서품을 받은 것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한 장소이니 이 성당의 위상을 알 만하다.
일제하 천재화가 이인성이 그린 계산성당에는 감나무 그림이 보이는데 지금도 그 감나무는 살아있다.
이인성은 1912년 대구시 태평로 3가 56번지에서 태어났다. 11세 때에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3학년 때에 담임 이영희 선생에게 칭찬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6세 때에 서동진 선생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16세)하고는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못한다.
서동진이 운영하는 대구미술사에서 수채화를 배울 때인 <촌락의 풍경>이라는 제목의 수채화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한다. 이듬해 그는 제8회 조선민술전람회에서 대구 계성중학교 정문을 그린 '그늘'< 陰>을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한다. 나는 그가 계성중학교 정문을 배경으로 이 때 그린 것이 그가 입학하지 못한 학교를 그리워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31년 그는 자신의 후원자를 만난다. 고미술 수집 및 연구가였던 경북여고 교장 ‘시라가 주키치’이다.
그의 후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크레용회사에 근무하며 밤에 그림공부를 하다가 이듬해에 태평양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이 때 자신이 다니던 ‘오모사마’라는 크레용회사 사장이 마련해 준 <아틀리에>에서 석고 데생을 연마한다.
이후 그는 <성당의 아침>, <가을의 어느 날>을 그리면서 1930년대 화가로서 조선의 지보(至寶)', '양화계의 거벽'(巨擘)라는 명성을 얻는다.
그의 나이 불과 26세에 추천 작가였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10년 전에 이미 그는 우리나라 미술평론가들이 '한국근대유화베스트10'에 1위로 선정한 작가다. 이 때 주목을 받았던 그림이 <경주의 산곡에서>(1935)이다. 박수근과 이중섭은 우리 국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거의 없는 국민작가이다. 그러나 이인성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미술전문가들은 그의 천재적 재능과 조형적인 미적 감각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45년 그는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으로 이사를 하고 이화여고의 미술교사가 된다.
좌익계열의 덕수궁에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주관한 해방기념미술전에 <녹량>을 출품한다.
좌익적 성향을 가진 ‘자유신문’에 연재된 김남천의 소설 <1945년 8.15>의 삽화를 그려 보기도 한다. 1946년 조선미술가동맹(위원장 김주경)에 공동 부위원장에 선임된다. 그러나 1947년 조선미술가동맹을 탈퇴하고 김인승, 남관 등과 함께 우익적인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한다.
이런 그가 왜 우리에게 잊혀진 작가가 되었는가. 나는 1950년 6,25전쟁 때 당한 어이없는 죽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나는 망우리공원묘역에서 그의 묘소를 참배했다. 그때서야 나는 그가 6,25때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았다. 1950년 6,25 전쟁 중에 서울에서 그는 경찰에 의해 어이 없이 총살된다.
검문 중에 이인성은 큰 소리로“천하에 유명한 이인성을 몰라보느냐?”고 하여 검문을 피했다고 한다.
잠시 당황한 검문자는 그를 돌려보낸다. 그러나 그가 ‘환쟁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검문 경관은 그의 집을 수소문한다. 끝내 그를 찾아 총으로 살상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천재적인 화가를 잃었다.
대구 계산성당은 그의 삶과 그림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엄동설한에도 나는 계산성당에 있는 이인성나무를 몇 번이고 바라 보았다. 그의 삶과 죽음이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이인성 나무
제일교회는 대구 최초의 개신 교회다. 1994년에 이미 100주년을 맞았다. 선교사 베어드가 1893년 대구의 약령시 일대를 선교하며 세운 교회이다.
윌이엄 베어드(Baird, William Martyne, 1862-1931)는 미국 인디애나에서 출생하였다. 하노버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턴대학원, 시카고대학원, 펜실베이니아대학원에서 수학하고 하노버대학에서 철학박사(1903)와 신학박사(1913)학위를 받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대구의 명문 계성학당(계명대)을 설립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제일교회의 초창기 이름은 야소교회당(耶蘇敎會堂)이었고, 두 번째는 남성정교회(南城町敎會)였다. 약전 골목에 있는 구 제일교회 건축물은 1932년 한국의 전통 양식과 서구의 양식을 절충해 지었다. 담쟁이 덩굴이 인상적인 이 교회 건물은 지금은 예배를 드리지 않고 있다. 동산언덕으로 이전을 하였기 때문이다.
제일교회100년사를 읽어보면 이 교회가 대구에 얼마나 많은 헌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작곡가 박태준과 현제명도 이 교회 출신이다.
약전 골목에 위치한 舊 제일교회
대구의 상징은 약전골목인지 모른다. 한약방 거리는 800 미터쯤이다. 우리나라에서 한 지역에 한약방이 가장 많고 역사 깊은 한약 골목이다. 약전골목 복판 제일교회 옆에 약령시한의약전시관이 있다. 이런 약전골목을 걸어서 올라가면 장관동이다. 이곳에는 소설가 김원일의 피난시절 추억이 깃든 곳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6,25 피란 시절 경험을 담은 소설 '마당 깊은 집‘을 이 곳을 배경으로 썼다.
한의약문화관 내부 전시물
약령시 상징문
글 김경식 시인 제공
사진 문학기행 회원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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