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문학의 산실을 찾아

청도 문학기행 1.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先生과 자계서원(紫溪書院)

달처럼 2010. 5. 9. 00:49

 자계서원을 찾기 위해서는 청도읍에서 풍각면사무소 방향의 20번 국도를 타고 가야한다. 칠성리에 소재한 신흥주유소가 보이면 이내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이서면 방향으로 우회전한 후에 다리 건너 바로 좌회전하면 서원리다. 이 마을이 탁영 김일손 선생의 고향이다. 자계서원은 이 마을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앞을 흘러 청도 방향으로 가는 개울이 서원천이다. 

동네는 작지만 서원은 오랜 풍상에서도 그 품격을 잃지 않고 있다.

 

 

 자계서원

 

 

탁영(濯纓)은 김일손의 호이다. 탁영(濯纓)이란 “갓끈을 씻는다”란 뜻을 가진다.

그러나 이 호는 3세기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어부가’를 연상하고 지었을 것이다.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滄浪之水濯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네

 

결국 김일손의 호 탁영(濯纓)에는 그의 삶에 관한 의지가 담겨 있다.

조선 조정이 제대로 된 정치를 펼치면 머리를 감고 갓끈을 씻고 의관을 정제하여 벼슬하고,

정치판이 혼탁하면 발이나 씻고 초야에서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그의 호에 살아서 꿈틀거린다.

언관(言官)으로 근무하던 김일손에게 중앙 정치판은 모순의 장소였다.

특히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 같은 훈구파들에게 날을 세웠다.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으로 근무할 때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조에 실었다.

조의제문은 세조찬위(世祖簒位)의 부당성을 풍자하여 스승 김종직이 지은 글이다.

김일손(1464~1498)의 본관은 김해이고 자는 계운(季雲)이다.

 

김일손은 그의 나이 22세 때인 1486년(성종17)에 생원(生員)이 되고,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다.

예문관에 등용된 후에 1491년 사가독서(賜暇讀書)와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니 그의 실력을 알만하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근무하면서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기록하고 성준(成俊)과 함께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한다. 이극돈의 원한을 사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그는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조의제문을 게재한 것을 이극돈이 연산군에 밀고한다.

결국 그는 권오복, 권경유 등과 함께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고 정여창 김굉필등 많은 사림들은 유배를 당한다.

 

1498년이 무오년이기 때문에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 부른다.

무오사화로 성종 때 등장한 대부준의 신진 사림들은 집권층인 훈구파에게 거세된다.

정치는 이렇듯 예나 지금이나 목숨을 거는 일이다. 김일손은 중종반정(1506) 후에 신원(伸寃)되어 도승지에 추증되고 시호 문민(文愍)을 얻는다.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과 이곳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에 배향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는 문장에도 탁월하여 ‘탁영문집’이 전한다.

 

 

운계정사 

 

 

 김일손 문학비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소리 부드러워

소매에 찬 맑은 바람 가을인 양 서늘하다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워

흰 구름 자취 없이 두류산을 넘어가네

 

-- 김일손의 문학비에서 옮김

 

이 시는 그가 26세 때 지리산을 탐방하면서 썼다. 이 문학비는 이상보 교수님이 회장으로 있는 한국문학비건립회에서 세웠다.

 

 

 

 자계서원과 은행나무

 

김일손이 심었다고 전하는 500년 된 은행나무 아래서 역사의 아련한 숨소리를 듣는다.

수식목(手植木) 표석까지 은행나무 앞에 세워놓았으니 그가 심은 것은 믿겠지만

서원은 그의 사후에 세워졌으니 의문은 남는다. 서원이 세워지기 전에 이곳에 미리 김일손이 심었거나 그의 집터가 되어야 할 것인데 그 기록을 아직 찾을 수 없다.

다만 감동적인 것은 자계서원이란 이름이다.

 

김일손의 참사(慘死)를 당하였다는 소식에 그의 고향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에는 피물이 3일간 흘렀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이때부터 붉은 시내물이 흘렀다란 뜻을 가진 ‘자계(紫溪)’라 불렀다. 서원 이름도 운계서원(雲溪書院)에서 자계서원( 紫溪書院)으로 바뀐다.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 85번지에 있는 자계서원은 1518년(중종13) 건축되었다. 처음에는 그의 학문과 덕행을 선양하기 위해 위패를 모신 자계사(紫溪祠) 였다. 1576년(선조9) 서원으로 승격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15년(광해군7) 중건된다. 이후 그의 조부 김극일(金克一) 후손인 김대유(金大有)를 추가로 배향한다. 1661년(현종2) ‘자계’라는 사액을 받고 사액서원이 되지만 1871년(고종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84년 복원되었다.

 

 

 

 

결국 자계서원은 역사적인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다만 김일손의 삶과 학문의 흐름이 전할 따름이다. 그러나 강당, 동재와 서재, 영귀루(詠歸樓)로 이어진 서당의 전형성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어둠이 내린 청도를 떠난다. 역사와 문학에 스며든 우리 국토를 답사하며, 실천적인 삶을 살았던 조상들의 행적을 찾는 일에 가슴이 뿌듯하다.

 

이 시대의 문학은 무엇인가. 일찍이 릴케는 자신의 시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 가난한 이의  빵조각 보다 못하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까뮈는 자신이 주장하던 실존주의가 몽마르트 언덕에서 추위에 죽어가는 노숙자의 담요 한 장 만도 못함을 탄식했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론의 회색에서 벗어나 자연과 역사와 문학을 찾아 떠나는 길에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 격려하며 이 길을 걸어왔다.

이번 청도 기행은 역사와 문학과 자연이 어우러진 장엄한 길이었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했던가.

우리국토는 가는 곳 마다 사연 많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청도는 원광법사, 일연, 이규보가 삶터로 삼았으며 서성거렸던 곳이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야만적인 통치에 환멸을 느낀 민중들의 봉기가 운문사를 중심으로 발발하였다는 것은 내게 매우 의미있는 기행의 토대가 되어 주었다.

 

글 : 시인 김경식

사진 : 문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