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문학의 산실을 찾아

대구 문학기행 3 - 청라언덕 & 3.1 운동길

달처럼 2010. 3. 27. 23:27

대구에 개신교 성지같은 언덕이 있다. 동산(東山)이다.

달성공원에 있는 토성에서 보면 동쪽에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서문시장과 계산성당이 앉아 있는 읍성사이에 누워있는 모습이다.

 

동산 (청라언덕)

 

조선후기에 이미 동산은 헐벗은 산이었다. 애덤스와 존슨은 달성 서씨의 문중 땅이었던 이 산을 매입한다.
애덤스는 제일교회를 개척한 선교사이고, 존슨은 동산병원을 세운 분이다.
20세기 초에 이 언저리를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동산은 대구 시가지와 접해있는 고지대였다. 이 곳에 병원과 선교사 주택이 지어지고 정원이 조성되었다.
이 언덕 같은 산은 이제 각종 건축물로 빼곡하다.

 

 선교사 숙소의 공원 (청라언덕)

 

동산(東山)이란 언덕은 옛 대구읍성 남서쪽에 위치한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미국 선교사들은 이 언덕에 자신들이 살 집을 짓고 주변에 학교를 짓고 병원을 세웠다. 이 학교가 신명학교이다. 신명학교는 대구 최초의 여학교였다. 병원은 동산병원이다. 지명 그대로다. 지금도 언덕 위에는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이국적인 주택이 줄지어 앉아 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살았던 그 모양 그대로다. 다만 지금은 교육, 역사, 의료 박물관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구지역 결혼 부부들의 웨딩 촬영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영화에도 제법 등장한다. 이 언덕에는 예전에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져온 사과나무를 심었던 곳이다.

 

동산의 제일교회 옆에 지금도 자라고 있는 이팝나무는 ‘현제명 나무’라 부른다. 쌀밥 같다고 해서 이밥나무라 부르는 이팝나무에 꽃이 필 때 그의 가곡을 불러보면 의미 있을 것이다. 현재명(1903~1960)은 대구 남산동139번지에서 태어났다. 제일교회 현승환 장로의 동생으로 대구의 대남소학교, 계성중학, 평양숭실전문학교, 미국시카고GUN음악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가 음악가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선교사가 세운 제일교회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리 국민이라면 한 번은 불러보았을 가곡 <고향 생각>은 그가 작사 작곡했다.
이 노래를 부르면 식민지시절 우리 민족구성원들의 고단하고 슬픈 삶을 회상할 수 있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 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디 두고 /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고향 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거려
마음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하랴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 가건만
단 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찌해

 

--박태준 ‘고향생각’

 

 100년 된 사과나무 - 대구 사과의 원조

 

선교박물관 뜰에는 100년이나 되는 사과나무가 있었다. 지금 그 나무는 죽고 그 곳에서 새가지가 나와 위태하게 자라고 있다. 1900년대에 존슨 선교사가 심은 사과나무다.
과거에 사과하면 대구였다. 대구사과의 고향이 이 언덕이다. 존슨 선교사가 없었다면 대구는 사과의 명소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대구는 존슨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도시다.

동산의료원은 1899년 개원했다. 이미 110년의 역사를 가진 병원이다. 병원 관사로 사용하던 스윗즈(Switzer) 주택은 '선교박물관', 챔니스(Chamness) 주택은 '의료박물관', 블레어(Blair) 주택은 '교육,역사박물관'이 되어 사람들을 기다린다.

 

 선교박물관

 

 챔니스 주택 - 의료박물관

 

동산의 작은 영역은 청라언덕이라 부른다. 이 곳에는 작곡가 박태준의 가곡 ‘동무생각’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박태준(朴泰俊1901~1986)년 대구 동산동72번지에서 태어났다.
박태준은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제일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된다.

평양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1921~1923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한다. 이 무렵 그는 노산 이은상을 만난다. 노산 이은상은 이 학교의 설립자 이승규의 아들이었다. 훗날 노산은 이 학교에서 국어교사를 한다. 이런 인연으로 그들은 친밀한 관계로 발전한다.

 

어느날 박태준은 계성학교에 다닐 무렵 한 여학생을 사랑하였던 자신의 고민을 이은상에게 털어놓는다. 노산은 대구에서 있었던 박태준의 첫사랑이야기를 듣고 “ 박 선생이 잊지 못할 그 소녀를 노래로 승화시켜 그 곡에 담아 두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냐.”며 “노래 가사를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겠소?” 하고 시를 써서 박태준에게 건네준다. 이것이 가곡 ‘동무생각’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위에 백합필 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 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내가 네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 없이 오는 눈발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은상 작시  박태준 작곡 '동무생각'

 

 동무생각 노래비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의 한자음에서 따왔는데 ‘담쟁이덩굴이 많은 언덕’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제일교회 교인이었던 박태준은 유년시절에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학생을 바로 이곳에서 마주 친다. 이 여학생은 아마도 신명학교 학생이었을 것이다.
박태준은 이 소녀를 잊을 수 없어 번민한다.

 

지금도 동산의 선교사들의 주택과 담에는 담쟁이덩굴로 뒤덮였다. 아직도 청라언덕은 사연이 그대로인 이곳을 걸으며 그들의 숭고한 사랑을 밟는다.
이 시는 4연의 시이다. 1연은 봄을 노래한 대구 동산의 청라언덕이 작품의 무대이다. 2연은 노산의 고향 마산의 가포해변의 여름이 배경이다. 3연은 동산의 가을 분위기다. 4연은 서울의 겨울로 짐작된다. 가곡에는 4연이 3절로 불려지고 있다.
대구제일교회에서 신앙의 싹이 자란 박태준은 지금도 많이 부르는 찬송가 493장<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을 작곡한다.

 

 

 은혜정원 - 선교사 묘역

 

비록 작은 공간이지만 이 곳에 묘역이 있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 묘역에 최초로 묻힌이는 애덤스 목사의 아내 넬리 딕(1866~1909)이다. 만삭의 몸으로 대구에 온 그녀는 43세에 자신의 고국을 떠나와 헌신하다가 이 곳에 묻혀 있다. 그의 묘비에는 영어로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자고 있다”는 마태복은 9장24절의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어 감동을 준다. 나는 묘역의 다른 묘비명을 읽으면서도 감동을 받았다.

 

 넬리 딕 묘소

 

이 묘역에는 오래전부터 나의 관심을 끈 인물이 있었다. H. M. 브루엔(1874-1959) 부부 선교사의 삶과 선교였다.
헨리 M. 브루엔( Bruen, Henry Munro, 한국명: 부해리)은 1874년 10월 26일 미국 뉴저지에서 출생했다. 프린스톤 대학과 유니언신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1899년 미국 북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대구선교부에 부임한다. 선교사로 파송되기 직전에 마르다(Martha Scott)와 약혼하고,1902년에 결혼한다. 경북 서부지역은 브루엔( Bruen)의 선교지였다. 김천시의 21교회, 선산군 10교회, 상주군 5교회, 성주군 3교회, 고령군 3교회, 군위 봉황동교회를 설립하였으니 놀랍지 않은가.

 

애덤스 목사의 후임으로 대구제일교회 당회장을 역임하고, 경상노회(제7회) 노회장으로도 활동한 브루엔은 일제의 종교탄압 정책으로 버틸수 없어 1941년에 대구를 떠나야 했다. 그의 부인 마르다 S. 브루엔( Bruen, Martha Scott, 한국명: 부마태)은 1875년 펜실베니아(White Haven)에서 출생했다. 마르다 브루엔이 선교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고 신뢰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선교지 대구에서 안나(Anna,1905년생)와 해리에트(Harriette, 1910년생)를 낳는다.

 

그러나 ‘마르다 브루엔’은 1930년 유방암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신명학교는 1907년 부루엔이 대구 최초로 세운 여자학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7년후인 1937년 6월에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가 수행원과 함께 신명학교를 방문, 강연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때 헬렌 켈러는 “미래의 역사를 짊어질 신명의 딸들이여, 꿈을 가져라. 하나님이 택한 딸로서 재능을 살려 아름다운 작품이 되라”강조했다고 전한다. 오늘도 부루엔의 영혼은 대구 시내를 내려다 보며 침묵으로 대구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마르다 브루엔 묘소

 

청라 언덕 한 쪽에 신축한 대구제일교회 

 

계산성당에서 이 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90 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이 골목 계단의 역사성은 대단하다. 신축된 제일교회와 담을 경계하면서 오르다 보면, 옛 사진 몇 장이 걸려 있다. 이 사진 속에는 대구의 옛 모습이 살아 있다. 계산성당에서 동산병원으로 이어진 계단식 길은 ‘대구 3.1운동 길’이라 부른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이 길을 따라 행진했기 때문이다.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은 이 곳 동산의 소나무 숲에서 모임을 가진 후에 시내로 진입했다.

 

 3.1운동길

 

 3.1 운동길 벽면에 게시된 사진

 

 

그 날의 감격을 되새기며 3.1 운동길을 걸어 내려오는 일행

오른쪽 파란 점퍼 입은 이는 70대의 대구 출신 문인인데 이 길로 등하교했지만 

이 곳이 청라언덕인지 전혀 몰랐다고...

 

길 옆 주택 화단에서 본 남천

 

글 김경식 시인 제공

사진 문학기행 회원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