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서리/문학의 산실을 찾아

청도 문학기행 2. 오누이 시조 시인 이호우와 이영도

달처럼 2010. 5. 9. 01:13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 이호우 시인의 시조 ‘살구꽃 핀 마을’


 

시조 ‘살구꽃 핀 마을’의 작가 이호우 시인의 고향은 경북 청도이다.

소싸움으로 유명한 곳은 알아도 이호우 시인의 고향이 청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호우의 삶과 문학을 찾아 그의 고향 청도를 답사하는 시기는 아무래도 봄이 제격이다.

그것도 살구꽃이 피는 시기이면 더 좋으리라.

 

청도는 행정구역으로는 경북이지만 경남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지금은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접근성이 쉬어졌지만, 예전에는 찾아가기 쉽지 않았다.

청도군은 동쪽은 경주시, 서쪽은 대구광역시, 남쪽은 경남 창녕군, 밀양시와 울산광역시, 북쪽은 경산시· 대구광역시와 접한다.

감나무 고을답게 감나무가 지천이다. 청도는 집집마다 감나무 몇 그루는 울안에 키우고 있다. 감나무는 잎이 떨어지고 나면 줄기와 가지들이 검게 그을린 것처럼 칙칙하다. 그러나 청도 사람들은 옛날부터 감나무를 자식처럼 키웠다. 이제는 늙은 감나무들이 빈 동네를 지키고 있다. 그런 감나무들이 대견스럽고 정겹다. 청도는 산이 깊고 물이 맑다. 대구광역시의 식수를 위해 운문댐이 만들어진 것은 이곳이 물 맑은 청정지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지산(1,240m), 문복산(1,014m), 운문산(1,188m) 청도의 동쪽으로 솟아 있고, 서쪽에는 비슬산(1,084m), 남쪽에는 화악산(932m) 등이 청도군을 둘러싸고 있다. 산의 높이와 계곡의 깊이를 헤아리면 이곳이 강원도가 아닌가 하고, 착각을 할 정도이다.

 

동쪽에서 흘러내린 동창천(東倉川)과 서쪽의 청도천(淸道川)이 흘러 내려 청도의 중앙 남단부에서 합류한다. 이곳이 이호우, 이영도 시인의 고향마을 유호리이다. 결국 이호우 시인의 고향마을은 물이 만나는 합수머리이며, 밀양강의 시작점이다.

건너 마을은 경남 밀양시 상동마을이다.

  

 오누이 공원

 

‘오누이공원’은 청도읍 내호리이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대부분 유천이라 부른다. 강 건너는 경남 밀양 땅이다.

살구나무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는 이호우의 '살구꽃 핀 마을', 오른쪽에는 이영도의 '달무리' 시비가 나린히 있다.

살구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달이 뜬 날 밤에 이호우의 시조 ‘달밤’을 읽으면, 이 고장 옛 분위기가 살아올 것이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 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낯익은 풍경이되 달 아래 고쳐 보니

돌아올 기약 없는 먼 길이나 떠나온 듯

뒤지는 들과 산들이 돌아돌아 뵙니다.

 

아득히 그림 속에 정화된 초가집들

할머니趙雄傳(조웅전)에 잠들던 그날밤도

할버진 율(律) 지으시고 달이 밝았더니다.

 

미움도 더러움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온 세상 쉬는 숨결 한 갈래로 맑습니다.

차라리 외로울망정 이 밤 더디 새소서.

 

--이호우 시인의 시조 ‘달밤’ 전문

 

시조 ‘달밤’은 1940년 <문장>지 6월과 7월 합본 호에 게재된 등단작품이다.

국토의 아름다움과 민족정서에 바탕을 둔 이 작품은 당시 우리 농촌의 정경이 물씬 묻어 있는 4수 1편으로 구성된 연시조다.

가람 이병기는 이 시조를 추천하며 “ 새롭고 깨끗하며 아무 억지도 없고 꾸밈도 없고 구김도 없다”라로 평했다.

 

첫 수의 작품의 무대는 낙동강이다. 강이 달빛과 만나 애수와 조용한 공간을 조성한다.

자신을 금빛노을에 합일시키며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 했다.

 

둘째 수에는 우리의 국토와 고향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으며,

셋째 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생전의 모습을 회상하며 고향에서의 옛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다.

넷째 수는 현실적인 삶의 부조함에도 불구하고 고향의 달빛에 의지하며 아름다운 사랑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 시조는 1934년 그의 나이22세 때에 동네 친구들과 함께 기념 촬영한 사진 뒤에 친필로 남긴 시조의 완성편이라 해야 할 것이다.

 

비파수 정든 노래 달모래에 숨어들 적

말술 앞에 놋코 높은 마음 난우노니

봄이야 가든 오든 이 밤 더디 세어라

--이호우 육필 1934년 8월30

 

비파수는 그의 고향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이다. 동창천과 청도천이 합류하는 고향에서 만나는 물길은 아름다웠으리라.

결국 그의 시심은 시비에서 강둑에서 바라보는 고향의 자연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호우 시비 

 

 이영도 시비

 

이영도 시비(詩碑)의 조형물은 달무리의 형상을 원과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하였다.

‘달무리’는 그의 대표시 제목이기도 하다.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아 우주이던 가슴

 

그 자락 학같이 여시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랑이.

 

-- 이영도 시인의 시 ‘달무리’ 전문

 

어머니에 대한 크고 넓은 사랑을 표현한 ‘달무리’는 안타까움과 간절한 그리움이

너울거린다.

초장에는 자식을 향한 측은지심을 , 중장에는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종장에는 학처럼 곱고

고고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호우 시인의 생가는 지금은 문들 닫은 유천극장 앞이다,

이호우 생가는 닫혀 있었다. 담도 높고 대문도 큰 자물통으로 완전히 잠가 버렸다.

듣자하니 사람들의 방문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관리하는 자손들은 개방을 원치 않는 듯 보였다.

 

청도군에서는 이호우. 이영도 시인 생가를 군에서 매입할 자금까지 준비하였지만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대구로 가서 겨울을 나고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호우 시인과 이영도 시인의 약력을 알리는 생가의 표지석도 대문이 닫혀 있어 읽을 수가 없다.

자료집에서 그의 비문을 옮겨본다. 이미 13년 전에 표지석을 세웠지만 지금은 그 비문을 읽을 수도 없다. 

 

 

爾豪愚(이호우) 선생의 생가

이곳은 '開花(개화)' '살구꽃 피는 마을' '休火山(휴화산)' '달밤'등 서정을 바탕으로 주옥같은 현대 시조를 남김으로써 한국 현대 시조의격을 한차원 높인 李鎬雨(이호우,1912~1970) 시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으로 선생의 시혼이 감도는 유서깊은 생가이다.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선생의 업적과 격조높은 시정신을 기리고자 한국문인협회가 SBS 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현대문학 표장사업의 일환으로 이 글을 새긴다.

1997년 9월 10일

社團法人 韓國文協會 理事長 黃 命

 

 

李永道(이영도)선생의 생가

이곳은 '보리고개' '달무리'등 민족고유의 情恨(정한)으로 단아하고 섬세한 가락으로 승화시켜 빼어난 시조를 남김으로써 현대시조사를 한층 빛낸 丁芸 李永道(정운 이영도, 1916~1976)시인이 태어나고 성장한 자리로 선생의 시혼이 살아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선생의 격조 높은 시업(詩業)을 기리고자 한국문인협회가 SBS 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현대문학 표징사업의 일환으로 이 글을 새긴다.

1997년 9월 10일

社團法人 韓國文協會 理事長 黃 命

 

 

이호우의 작품 활동은 1939년 동아일보 '투고란'에 '낙엽'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가람 이병기의 추천으로 '달밤'이 1940년에 문장지에 게재되면서 문학 활동은 본격화된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 1941년부터 자신의 고향마을에서 해방 될 때까지 상점도 운영하고 재제소 사업도 한다. 지금은 퇴락한 이 마을이 당시에는 가장 번성했을 때였으리라.

1952년부터 대구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서울지사장을 역임한다. 1955년 시조<바람벌>을 <대구대학보>에 <현대문학>지 발표하였다가 반공법으로 기소되어 큰 고초를 당하기도 한다.

 

그 눈물 고인 눈으로 순아 보질 말라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살아 보자고 아아 살아 보자고.

 

욕이 조상에 이르러도 깨달을 줄 모르는 무리

차라리 남이었다면, 피로 이은 겨레여

오히려 돌아앉지 않은 강산이 눈물겹다.

 

벗아 너마자 미치고 외로 선 바람벌에

찢어진 꿈의 기폭(旗幅)인 양 날리는 옷자락

더불어 미쳐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섧구나.

 

단 하나인 목숨과 목숨 바쳤음도 남았음도

오직 조국의 밝음을 기약함에 아니던가

일찌기 믿음 아래 가신 이는 복되기도 했어라

 

이호우 시인의 시조‘ 바람벌’ 전문

 

<바람벌>은 4수 1편의 연시조이다.

4수의 각 수는 사건과 사연을 가지고 있다.

첫 수에는 <순>이라는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 <순>은 미움이 사랑을 앞선 당시의 각박한 거리에서 꽃같이 아름답게 살아 보려고 했던

아이다. 그러나 이제 그 아이에게 절망의 눈물이 보인다.

 

둘째 수는 6,25전쟁을 비판한 내용이다. 한 조상 한 핏줄을 가지고 때어난 형제들이 서로를 죽이겠다고 총질을 하는 현실에 시인은 강산을 보며 부끄러워한다.

셋째 수는 비정하고 모순덩어리인 현실에 저항하다가 미친 친구를 기억하며 자신의

허약한 삶을 비판하고 있다. 그 친구처럼 미칠 수 없는 것이 슬픔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넷째 수는 그의 역사의식이 잘 나타나 있다.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와 민족의 스승들은 “오직 조국의 밝음”을 기약하였기 때문에 경의를 표현한다.

영탄과 감상적이지만 생명의 소중한 자각을 현실감 있게 개관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바람벌’은 이호우 자신의 아호이다.

그의 삶은 ‘바람벌’처럼 당시 조국의 현실은 황량한 벌판이었다.

모순과 황당함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조국의 현실에서 그의 삶이 온전할 리 없었다.

오히려 그의 삶이 평화롭다면 그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이 시는 비정하고 살벌한 당시의 분위기를 비판한 작품이다.

 

민족이 처한 시대상황을 ‘미움이 사랑을 앞선 이 각박한 거리에서’ 그는 강한 분노를 느꼈으리라. 그러나, ’더불어 미쳐보지 못함이 내 도리어 섧구나‘의 표현처럼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자신의 심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일찍이 믿음 아래 가신 이는 복되기도 했어라’이다. 죽지 못하고 사는 삶이 부끄럽다는 표현이다.

 

1950년대는 제목처럼 ‘바람벌’ 같던 세월이었다. 해방은 되었지만 6,25전쟁과 정치적인 암흑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비정하고 긴박한 삶속에서도 그는 1955년 첫 시조집 '이호우시조집',과 68년에는 '休火山(휴화산)' 을 발간한다. 문학적인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평범한 소재를 선택하여 썼지만, '휴화산'에서는 인간 욕망을 승화시켰다.

55년 첫 시조집으로 출간하여 제1회 경북문화상을 받는다. 72년 대구 남산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편저로 '古今時調精解(고금시조정해)'와 1968년 누이동생 이영도 시인과 함께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도 출판한다.

 

이호우 시인은 부친이 군수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부유했다.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고, 의명의숙이라는 사립학교에서 공부하다가 밀양보통학교를

졸업한다. 경기중학교에 입학을 하였지만 신경쇠약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서 문학적인

정서를 함양한다. 몇 년 후에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예술대학에 입학하는 계기가 된다.

일본 유학을 하면서 발병한 신경쇠약증세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한다.

이호우 시인은 아버지가 일제하에서 군수로 근무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민족의식이 강했다는 증거이다.

 

또한 자신의 어머니를 두고 첩을 얻어서 사는 것도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이호우의 조부와 증조부는 일제에 저항했던 분들이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달랐다. 일제하에서 출세지향적이었기 때문이다. 지조있고 의협심이 많았던 이호우는 자신의 아버지의 삶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노려한다. 문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예술적인 취향에 문예적인 감각이 돋보였던 이호우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한다. 이무렵 그의 문학적인 재능 특히 시조 영역을 알아본 사람이 가람 이병기 선생이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추천으로 그는 화려하게 시조 시인이 된다.

해방 이후에는 그는 가족들과 함께 대구로 이사한다. 1949년 남로당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사형 직전에 살아 남는다. 그를 살려준 이는 김광섭 시인이었다.

 

김광섭 시인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시조 <초원>에는 남로당 간부라는 모함으로 사형선고까지 받고 죽음의 문턱에 있었던

시절에 갈망하던 자연의 그리움이 담겨 있다.

 

닫혀있는 생가 대문 옆에 붙어 있는 패찰

 

 

담장 너머로 찍은 생가 내부 

 

 닫힌 문 밖에서 기념 촬영을 찍을 수밖에...

 

상긋 풀 내음새

이슬에 젖은 초원.

 

종달새 노래 위로

흰구름 지나가고,

 

그 위엔 푸른 하늘이

높이 높이 열렸다.

 

-- 이호우 시인의 시조 ‘초원’ 전문

 

푸른 하늘과 종달새는 자유의 상징이다. 당시 그는 얼마나 높은 하늘을 보고 싶었을까.

풀 냄새와 이슬에 젖은 초원을 걷고 싶었으리라.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난의 시기였다.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 년 전에 사형선고를 받고 가까스로 풀려난 그는 이제 현실과 맞서는 사람이 되어갔다.

다른 사람 같으면 두려움으로 떨어야 했지만, 그는 부정과 부패 세력에 저항하며 민중의 권리를 찾아 주려고 노력한다.

고난의 시기에 그의 시조 문학은 그의 대표시 ‘개화’처럼 피어났다.

 

 

꽃이 피네, 한 잎 두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 이호우 시인의 시조 ‘개화’ 전문

 

꽃잎이 피는 것은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우주론적인 인생관을 담고 있는 이 시조는 초장에는 개화의 진행,

중장은 개화의 절정, 종장은 개화의 완성을 담고 있다.

시조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시처럼 보이는 이 시는, 꽃이 피는 순간의 극적인 상황을

기도하는 모습처럼 경건하게 표현하고 있다.

 

꽃이 피는 긴장의 절정은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라는 마지막 종장에 상징적으로 쓰고 있다.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고 나도 가만 눈을 감고“라는 표현에서 이호우 시인의 성격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현대 시조가 도달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이호우 시인의 시조 ‘개화’를 그의 고향 마을에서 가슴으로 읽는다.

 

 이호우 시인

 

 이영도 시인

 

이호우 시인은 이영도 시인의 친 오빠다.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를 연상케 한다.

우리 현대시조는 이들 오누이에 의해 큰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이영도 시인은 청마 유치환의 사랑의 편지 주인공으로 더 유명하다.

청마 유치환 시인과 이영도의 정신적인 사랑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유치환 시인은 丁芸(정운) 이영도 시인에게 사랑의 마음을 품으며 생의 후반기를 바쳤다.

21세에 남편과 사별한 이영도의 삶은 절망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딸을 키우면서 그는 문학의 길을 더듬거리며 걸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주친 사람이 유부남인 유치환 시인이다.

유치환 시인은 ‘행복’이란 시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라고 이영도 시인과의 관계를 시적으로 표현했다.

 

청마와 이영도가 처음 만난 것은 1945년 경남의 통영여중 교정이었다.

청마의 나이는 서른여덟 유부남이었고, 정운은 스물아홉의 청상 과부였다.

청마는 당시 사회의 윤리적인 정서를 거슬리면서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

이영도를 향해 몇 천 통의 사랑의 편지를 썼다.

20년 넘게 진행되던 편지는 1967년 2월. 청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침묵하던 이영도 시인은 청마를 위해 시조 한편을 쓴다.   ‘황혼에 서서’ 이다.

 

 

산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임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은 덧이 없어도

한결같은 나의 정

 

--이영도 시인의 시 ‘ 황혼에 서서’ 전문

 

이영도 시인은 청마 유치환의 정신적인 사랑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유명세를 탄다.

그녀는 청마가 세상을 떠난 후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단행본을 출간한다.

당시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말도 많았다.

 

 청마가 이영도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것이기에 화제의 책이 되었고, 독자들은 놀라움을 금 할 수 없었다.

불륜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들의 정신적인 사랑은 많은 이들에게 오히려 감동을 주었다.

이영도 시인은 이 책의 수익금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 '시조시인상' 기금으로 기증한 것이다.

청마가 이영도 시인을 위해서 써서 유명한 ‘행복’이란 시를 읽으면, 그들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비귀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유치환 시인의 시 ‘행복’ 부분

 

이영도 시인은 청마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이영도 시인은 1945년 죽순(竹筍) 동인으로 활동한다. 시조 제야(除夜)등을 발표하며 등단한다.

고등학교 교사와 부산여자대학에 출강하였고, 부산어린이회관 관장, '현대시학'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며 활발하게 활동한 문인이다.

 

이영도 시인의 시조에는 우리 고유의 민족정서가 담겨 있으며, 잊혀져가는 고유의 가락이

꿈틀거린다.

그녀의 성격처럼 맑고 간결하며 경건한 정서를 가진 그의 시조를 읽다보면, 아름답고 관조적인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시조 ‘단풍’을 읽으면, 이런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너도 따라 여기

황홀한 불길 속에

사랑도 미움도

 

넘어선 정이어라

못내 턴 그 청춘들이

사뤄 오르는 저 향로!

 

--이영도 시인의 시 ‘ 단풍’

 

이영도 시인의 대표 작품으로는 '바람' '황혼에 서서' '미소' '아지랭이'등이 있다. 시조집 '靑苧集(청저집)' '석류' 등과, 수필집 '春芹集(춘근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 '머나먼 사념의 길목' 등이 있다. 1966년 제8회 訥月文化賞(눌월문화상)을 받는다.

 

글 : 시인 김경식

사진 : 문학기행 회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