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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의 원시림 트레킹 1.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 숲

달처럼 2012. 6. 3. 17:57

귀부인의 풍모를 지닌 순백의 자작나무 숲에서 신록에 젖다

 자작나무는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수종(樹種)이다. 자작나무는 겉은 희지만 속은 기름을 잔뜩 머금어 검다. 기름기 때문에 '자작자작' 소리 내며 잘 탄다고 해서 자작나무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山)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백석, '백화') 

 

함경도 함흥에서 교편을 잡았던 스물일곱 살 시인 백석은 그곳 북관(北關) 땅 어느 산속 여인숙에 묵었다가 자작나무 숲을 봤다. 그러면서 산 너머 저 먼 고향, 평북 정주를 그렸다. 그에게 자작나무는 鄕愁를 의미했다.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설자리를 삼가, 구중심처(九重深處)가 아니면 살지 않는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 공주(樹中公主)이던가! 길이 저물어, 지친 다리를 끌며 찾아든 곳이 애화(哀話) 맺혀 있는 용마석(龍馬石)― 마의 태자의 무덤이 황혼에 고독했다. 능(陵)이라기에는 너무 초라한 무덤― 철책(鐵柵)도 상석(床石)도 없고, 풍림(風霖)에 시달려 비문(碑文)조차 읽을 수 없는 화강암 비석이 오히려 처량하다. " (정비석, '산정무한')

 

 

작가 정비석이 금강산을 기행하고 쓴 '산정무한'에 자작나무를 아낙네의 살결에 비교하고 나무 중의 공주라고 묘사했다. 러시아나 북유럽 출신 작가들의 작품에 등장하는 자작나무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킨다.

 

오늘날 자작나무를 찾는 여행객이 많아졌다. 한때 경제수림으로 인정받아 정책적으로 조림했던 이 나무가 외국에서 수입되는 값싼 물건에 밀려 경제적 가치를 상실하여 벌목하지 않고 방치되었다가 풍류를 즐기는 호사가의 눈에 띄어 생태숲으로서 새로운 가치를  지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부처님 오신 날이 월요일이라 보너스 같은 3일 연휴가 생겼는데 남편이 거래처 사람들과 필리핀 세부에 간다고 해서 은근히 부아가 났다. 혼자 무얼 하며 지낸담. 밤 늦게 여행 카페에 들어가니 5월 27일 28일 1박 2일 인제 트레킹 공지가 보인다. '신록의 원시림 트레킹과 봄밤의 우수'. 제목부터 근사하다. 자작나무 숲에 호기심이 일었고, 곰배령 야생화가 마구 충동질을 했다. 이미 신청자가 정원을 넘겼지만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대기자로 올리고 기다렸다. 드디어 입금하라는 연락이 오고, 그제서야 체력이 받쳐 줄 지 걱정이 따른다.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을 찾아 간다.

홍천에서 인제로 향하는 44번 국도를 타고 가다 인제 종합장묘센터 쪽으로 벗어나 10㎞쯤 가면 '어서오세요 원대리'라는 표지석을 만난다.

거기서 100m쯤 더 간 오른쪽에 인제 국유림관리소가 만든 '원대 산림 감시 초소'가 있다.

 

 

 

임도를 100m쯤 들어선 갈림길에서 오른쪽 '원정도로'로 길을 잡는다.

임도는 본래 비포장 도로였지만 우리가 찾은 날 도로 포장을 위한 기반 공사를 하고 있었다. 인부들의 말로는 그 다음날 도로 포장을 한단다. 

임도를 3.2㎞쯤 올라가면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이라고 새겨진 장승이 서 있다. 왼쪽의 부드러운 비탈면 아래로 6㏊에 자작나무 숲이 거짓말처럼 펼쳐진다.

 

10m도 넘게 키가 훤칠한 자작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 속으로 오솔길이 나 있다. 카펫처럼 푹신한 흙길을 밟으며 걷는다.

휴일인데도 숲에는 우리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다. 눈부시게 하얀 줄기의 꼭대기에 연두빛 잎새가 팔랑인다. 숲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은 산림청 인제국유림관리소에서 1993년 조성한 국유림이다. 18년이란 시간이 이렇듯 환상적인 숲을 만들어낸 것이다.


 

베어 낸 자작나무로 산책로 경계를 만들었다.

 

 

숲 한가운데 자작나무로 자그마한 오두막을 지어 놓았다. 자작나무 그네에 매달려 타잔이 된다.

 

 

 

 

 

 

 

 

 

 

 

길게 뉘어놓은 자작나무를 벤치 삼아 죽 늘어 앉았다.

다음 일요일(6월 3일)에 방송한 '1박 2일' 프로그램에서는 멤버들이 여기서 턱을 꽃받침 모양으로 받치고 있더군.

 

 

 

원대리의 자작나무 숲은 안에 들어가 거닐며 냄새 맡고 소리 듣고 어루만지는 오감(五感)의 숲이다.

 

 

 

 

 

숲속 교실

자작나무에 초록 잎이 무성할 무렵부터 인근의 유치원이며 초등학교 학생들이 반나절쯤을 보내고 간다.

 

 

 

 

 

자작나무 고목은 가지를 베어낸 자리가 사람의 눈동자 모양이란다.

이 곳 나무는 이제 청년기에 접어들었다.

 

 

아늑한 숲에서 자작나무의 기운을 한껏 들이마신다.

 

 

 

 

I see You. (나는 당신을 봅니다)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Na'vi)족들의 인사다.

이들이 사랑을 고백할 때 나누는 말도 역시 "I see You."이다.

서로를 본다는 것은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혼자 남겨진 연휴에 트레킹을 하다가 숲에서 사랑의 소통을 생각한다.

 

 

자작나무들이 이룬 수직의 세상에서 누군들 바삐 걸을 수 있을까.

 

 

 

분홍 앵초

 

 

천남성

 

 

 

엉겅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