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벗과 함께

철원 이야기 1. 가을 나그네

달처럼 2012. 11. 12. 19:18

가을 소풍을 가기로 한 날에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다.

변수를 기대하며 날마다 예보를 확인했지만 비 올 확률 100%란다.

여행 이틀 전부터 친구들에게 확인 문자가 왔다.

"비가 와도 가니?"

"응, 비 맞아도 상관 없는 옷 입고 와."

여행 당일 새벽에도 카톡이 온다.

"비가 많이 오는데 그래도 강행~? 우짜꼬..."

"철원 쪽은 덜 온대."

사실 어떤 여행 모음에서는 비 온다는 예보가 나오면 갑자기 여행 번개를 한다.

비 오는 날 안개가 자욱한 둘레길을 걷는 것은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

 

혹시 일찍 도착하여 기다리는 친구들이 있을까봐 출발 시간보다 약 1시간 가량 빨리 학교에 도착했다.

잠시 후에 회장인 최영남이 도착하고, 속속 친구들이 교문 안으로 들어온다.

비만 안 오면 옛 생각을 하며 언덕길을 걸어오려고 했다는 친구들.

졸업 30주년 행사 때 모교에 한 번 와 보고 그 이후 처음이라는 친구들도 있었다.

출발 전에 교정을 둘러보고 싶어하기에 몇몇 친구들과 청운지(본관 앞 연못)까지 걸었다.

 

 

가을 꽃이 핀 본관 앞 화단

 

 

청운지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연못가에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지금은 나무 둥치에 청운지라는 팻말만 걸려 있다.

그 대신 벗나무와 산수유가 봄날의 환희와 가을 날의 낭만을 옷입는다.

 

 

"이 청운지는 우리 14기 졸업 30주년 기념으로 다시 단장한 거야. 여기 기록이 있네."

"본관이 예전에는 붉은 벽돌이었는데..."

"바닥만 남기고 완전히 털어내고 리모델링했어.

내진 설계를 적용해서 튼튼해."

잠시 본관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 추억을 이야기한다.

 

 

"저 아래 운동장 옆 길은 예전에는 오솔길이었지. 지금은 차가 다니는 길이 되었네."

"이 단풍 예쁘다."

 

 

해가 나면 더 예쁠 텐데...

 

 

8시 반이야. 출발할 시간이다.

 

 

출발 직후 인증 샷

영남이는 아침부터 하루종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철원으로 소풍가기 때문이다.

 

 

소풍 간다는 설렘으로 지난 밤 잠을 설쳤다는 말이 믿기지 않게 모두 생기있는 표정이다.

 

 

소풍에는 김밥과 삶은 달걀이 제격이라며 명희가 준비해온 것을 나눠 먹고,

승란이가 불참하는 대신 협찬한 떡과 과일로 후식까지 해결하니 얼굴에 화색이 돈다.

철원까지는 두 시간 가량 걸릴테니 우리 재미있는 이야기 한 가지씩 하자고 제안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19금을 아슬아슬 넘나들며 이야기꽃을 피운다.

말을 꺼낸 내가 먼저 '오리 시리즈'와 '아담'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이어서 태웅이는 로마의 어느 장군 이야기로 바톤을 이어가고,

최명희는 컬투쇼에 방송되었던 '조퇴 사유' 로 배꼽을 잡게 한다.

그 사이 영남이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재미난 이야기를 청해 듣고는 전달한다.

웃다가 숨이 넘어갈 뻔한 친구가 있어 이야기를 잠시 중단시키기까지.

그러자 영남이가 한시를 한 수 읊어 좌중을 진정시킨다.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 있을 때 지은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秋風惟苦吟 (추풍유고음)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가을 밤 비는 내리고

 

쓸쓸한 가을 바람에 애써 시를 읊어보나

험한 세상길에 내 마음 알아주는 이 드물구나.

창밖에는 한밤중에 비가 내리는데
등불 앞에 내 마음은 만리 먼 곳을 향하네.

 

최치원이 타국에서 느꼈을 외로움과는 무관한 분위기이지만 비 내리는 가을날이라 떠올랐다고.

학창 시절에 배운 한시를 기억해내는 그에게서 다소 의외의 면모를 발견한다.

좋은 기분을 감추지 못하는 그는 이날 달변을 유감 없이 발휘하여 친구들을 즐겁게 했다.

 

 

온종일 이렇게 인정사정 없이 웃어 제꼈다.

우리 보약 먹은 거나 마찬가지라고~.